큰 담론보다 작은 습관…‘소학’ 가르침 여전한 울림

입력 2024. 12. 19   16:52
업데이트 2024. 12. 19   16:54
0 댓글

구보의 산보, 그때 그 곳
추원재, 배움을 실천하려 한 점필재의 공간 

김숙자·김종직 부자가 살던 터 추모 공간으로
점필재, 함양군수 시절 유자광 시 불태운 악연
무오사화 때 빌미 되어 ‘부관참시’ 오욕 겪기도
말보다 행동 중시 사림 현실정치에 날 선 비판 언행 불일치 세력 맞서

 

추원재 전경. 필자 제공
추원재 전경. 필자 제공

 

 

경남 밀양 부북면의 추원재(追遠齋)는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1431~1492) 선생이 살았던 터다. 부친 김숙자가 터를 잡고 아들이 평생 살았던 곳으로, ‘추원’은 ‘조상의 덕을 추모한다’는 뜻이다. 대학자의 위명에 비해 집은 소박하다. 본채와 뜰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다. 현재의 본채는 1810년 사림과 후손들이 6칸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으로 고쳐 지은 것이다. 선생의 5대 종손이 경북 고령군 개실마을로 이주함에 따라 이곳은 선산 김씨들이 제사를 모시는 집, 재사로만 쓰인다. 점필재는 관료이자 학자였고 뛰어난 문장가였다. 인조 때 문신으로 글을 잘 썼던 장유는 점필재를 김수온·서거정·성현과 더불어 4대 문장가로 꼽았다(『간이당집』). 점필재의 저서 『청구풍아』는 신라서부터 조선 초기까지의 한시 517수를 험벽한 고사에 일일이 주를 달고 난해한 어구를 풀어 설명한 역작이다.

구보가 이곳에 주목하는 이유는 말에 그치지 않고 실천이 따른 유학이 태동한 곳인 까닭이다. 김숙자 부자는 학문의 시발점을 소학(小學)에 두었다. 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작은 덕목들을 하나하나 짚었다. 거대 담론에 앞서 사소한 것이라도 먼저 실천하는 습관을 쌓게 했다. 그런 소양들이 잘못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사림파는 현실정치에 날 선 비판을 가하면서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와 대립했다. 점필재는 후학을 두루 배출해 사림파가 정치 중심에 서는 데 공헌했다. 김굉필·정여창·김일손·유호인·남효온·조광조·김안국·손중돈 등이 그의 학맥을 이었다. 추원재 안내판에 쓰인 것처럼 조선시대 사림은 이곳을 ‘정신적 고향’으로 여겼다.

점필재의 부친 김숙자는 고려 멸망 후 선산에 은거한 길재(1353~1419)에게서 성리학을 배움으로써 정몽주~길재로 이어진 사림파의 맥을 이었고, 아들 점필재에게 고스란히 전수했다. “‘광풍제월(光風霽月: 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갠 날의 달처럼 상쾌하고 맑은 마음 상태)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필재의 가르침을 김굉필도 마음에 간직해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경현록』). 조선 풍토에서 사림파의 실천 중시와 비판의식은 적을 양산했다.

 

 

점필재 김종직 초상. 선산 김씨 대종회 소장
점필재 김종직 초상. 선산 김씨 대종회 소장

 

추원재
추원재



점필재는 1459년 문과에 합격해 중앙관직에 진출했다. 세조가 집현전을 없애고, 선비 10명으로 예문 기능을 대신하게 했을 때 뽑혔다. 수찬을 지낸 후 모친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희망해 함양군수로 전출했다. 이곳에서 유자광(1439~1512)과의 악연에 휘말린다. 1471년 함양 관내 학사루 정자에 걸린 유자광의 시를 발견하자 “맹랑하다”며 사액을 떼서 불태워 버렸다. 이 일이 훗날 화근이 된다. 선산부사를 거쳐 1482년 성종의 부름을 받아 다시 중앙으로 올라갔다. 성종은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에게 힘을 불어넣어 줬다. 점필재는 그 중심에 있었고, 성종의 신임은 깊었다. 홍문관·직제학·도승지·이조참판 등 요직을 두루 지냈다. 우부승지 시절 성종의 장인이던 훈구파 최고권력자 한명회(1415~1487)와 만난 일화는 당시 두 진영의 날 선 대립상을 보여준다. 점필재가 사직서를 낸 한명회를 찾아가 ‘거두어 달라’는 성종의 명을 전한 자리였다. 한명회가 자신은 ‘국록을 축내고 있을 뿐’이라며 고사하고선 점필재에게도 ‘학문을 아껴서 그런다’며 ‘종사에서 떠나 후학을 양성하는 데 전념할 것’을 권고했다. 점필재가 “유념하겠다”고 답하자, 한명회가 “왜 내 말이 달갑지 않은가?”라고 윽박질렀다. 한명회의 말 속에 뼈가 있다는 걸 감지했으나 ‘김일손 등 제자들의 안위를 생각하며 참고 대응했다’고 김호용 선산 김씨 대종회 회장이 전했다. 1487년 전라도 관찰사, 이듬해 공조참판을 지낸 후 1489년 병이 깊어 밀양으로 돌아가 정양에 들어갔다. 집 근처 위량지(爲良池) 주변을 산책하며 건강을 되찾으려 했으나 1492년 6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구보는 점필재의 일생을 들여다보며 유자광 시 소각과 한 해에 자녀 셋을 잃은 일, 그리고 54세 때 17세 규수와 재혼해 늦둥이 아들을 얻은 일이 특이한 사항일 것으로 여긴다. 유자광과의 악연은 부메랑으로 되돌아 왔다. 이른바 ‘조의제문(弔義帝文)’ 사초 사건이다. ‘弔義帝文’은 항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살해당한 초나라 의제를 점필재가 추모한 글이다. 구보는 그 글의 내용이 박학다식하고 문장이 고아하다고 느낀다. 의제의 손자가 점필재에게 현몽해 “의제가 항우에게 살해돼 빈강에 던져졌다”고 하는 말을 듣고 점필재가 영령을 위로한 내용이다. 시대와 잘못 엮이면서 세조의 패역을 비꼰 것으로 둔갑했다. ‘정축년 10월에 꾼 꿈’이니 문과에 합격하기 전인 1457년 추원재에서 지내던 때였다.

글에도 ‘밀양에서 성주로 향하던 도중 여관에서 자다가 꾼 꿈’으로 기술됐다. 점필재 사후 6년이던 1498년 사관 김일손이 ‘조의제문’을 선왕인 성종의 실록 사초(史草)에 기재한 것이 발단이 됐다. 훈구파는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반격을 노리다가 이 ‘조의제문’을 불충 사례로 확대시킨다. 수양대군이 단종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을 비꼰 것이라며 세조의 손자 연산군을 자극했다. 당시 훈구파의 중심은 유자광이었다. 사림파가 대거 숙청되고, 점필재도 부관참시당했다. 무오사화다. 실록청 당상관 이극돈이 자신의 비위 사실 기술을 열람하고선 김일손에게 삭제해 줄 것을 청탁했으나 거절당하자 사초를 빼돌려 유자광과 의논하면서 ‘조의제문이 벼락을 맞았다’는 비화가 선산 김씨 문중에 전한다. 유자광의 무함에 대해서는 후대 왕조 실록에 여러 번 언급된다(『연산군일기』 4년 7월, 『승정원일기』 영조 즉위년 11월 등). 사초가 원인이 됐다고 해서 이 사화(士禍)를 사화(史禍)라고도 부른다. 이를 전기로 훈구파가 다시 정권을 차지했다.

점필재 사후 75년이 지난 1567년 밀양부사 이도우 형제가 생가에서 가까운 곳에 그의 지덕을 기리는 덕성서원을 건립했다. 고풍에 학문 수양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점필재의 저서 『이준록』과 『점필재집』이 보관돼 있다. 1669년 현종 10년에 ‘예림’으로 사액됐다.

구보는 엘리트들의 언행 불일치가 조선 사회를 붕괴했다고 본다. 배운 바를 행동에 옮기려는 양명학적 자세는 실천보다 명분, 균형보다 독점을 원하는 조선 성리학적 풍토에서 살아남기 어려웠음을 재확인한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

오늘의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