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4일 육군3사관학교(3사)에 전입신고를 했다. 주간위탁교육장교는 전입이 3월 초로 돼 있고, 2월엔 주로 개인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평소 사관학교에서 근무해 보고 싶었던 터라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육군본부에 건의해 2월 초 전입을 조치받았다. 분류는 ‘교관’으로 돼 있었는데, 학교 인사장교에게 ‘생도연대 훈육요원’으로 가고 싶다고 요청해 결국 힘들다고 소문이 자자한 훈육장교로 근무하게 됐다.
신병교육대·분대장교육대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어 교관 업무가 쉬울 수도 있었지만 추호의 망설임 없이 이런 결정을 내린 건 훈육장교로서의 기대, 바로 생도와 동고동락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첫날부터 훈육장교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44기 생도들이 1박2일 100㎞ 완전군장 행군을 마치고 복귀하고 있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들의 눈동자에는 추위와 한계를 극복하고 진정한 장교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들 곁에는 100㎞를 같이 걸으면서 생도들을 챙긴 훈육장교가 서 있었다.
본격적으로 훈육장교 업무가 시작됐다. 생도들이 기상하기 전 출근해 이른 아침부터 함께했다. 군가를 부르며 아침 뜀걸음을 하고, 밥을 챙겨 먹였다. 그런 뒤 학과 출장 준비를 하고 청운관 앞까지 분열연습을 시켰다. 도서관에서 자습하는 생도들을 찾아가 살펴보고 훈육대로 복귀해서는 시설물 보수와 보급품 수령, 행정 업무, 생도 면담 등으로 바쁜 일과를 소화했다. 지휘훈육 시간에는 각종 교육·제식훈련 등을 주관했다. 저녁·야간에도 전공학습·생활지도를 하고 자정이 돼 대부분 취침에 들면 몸은 피곤했지만 흐뭇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주말에도 나와 생도들이 쉬는 데 불편함이 없는지 확인하고 조정해 줬다.
군사훈련 기간에는 생도들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냈다. 훈련물자 수령·분배·사용 후 반납을 직접 했다. 이른 새벽 생도들을 기상시켜 아침밥을 먹이고 교장까지 함께 걸어가면서 상황조치훈련을 통제했다. 훈련 때는 끼니를 더욱 살뜰히 챙겼다. 군용트럭에 무거운 밥통과 국통을 싣고 내리다 보면 허리를 삐끗하기도 했다. 또 교육훈련이 끝나면 지친 생도들과 밤길을 걸어왔고, 생도들이 잠자리에 드는 걸 보고야 마음을 놓았다.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 형의 마음’으로 헌신했던 것 같다. 생도와 크게 나이 차가 나는 것도 아니었는데, 당연히 그리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44기 한 달에 이어 45·46·47·48기의 한 달을 함께했다.
전역 후엔 학업에 매진해 학위를 취득했다. 그 결과 올해 3사 군사사학과에 군무원 교수로 임용되는 기쁨을 누렸다. 교수가 된다면 3사에서 근무해 보고 싶었는데, 그 바람이 이뤄진 것이다. 주위에선 ‘지식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마음’만 가지면 된다고 하지만, 현재 60·61기 생도들을 보면 스승의 마음가짐에 더해 훈육장교 시절의 ‘부모의 마음, 형의 마음’이 떠오른다. ‘스승의 마음’에 ‘부모의 마음, 형의 마음’이 더해진다면 비록 힘은 더 들더라도 더욱 보람되지 않을까. 힘들 때마다 그런 마음을 되새기고 싶다. 그러다 보면 정말 그렇게 될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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