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 이범석 다시알기 - 철기가 높이 평한 혁명동지들
북로군정서 발탁해준 ‘스승’ 김좌진
무관학교부터 함께한 평생 인연 지청천
이념 달라 갈라선 홍범도·김원봉까지
청산리 승리 일궈낸 ‘항일투쟁 전우’
임시정부 두 지도자와도 각별한 관계
이승만 타계 후 만장·묘비명 직접 써
백범 시신 반창고 붙은 총상 보며 오열
철기 이범석의 일생에는 조국 독립과 광복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혁명동지가 등장한다. 만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일 때는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장군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리고 광복군 시절과 광복 후에는 김구 선생과 함께 이승만 박사가 등장한다. 철기가 평하는 철기의 혁명동지들에 관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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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와 김좌진, 그리고 지청천
김좌진 장군은 철기에게 동지이자 스승이었다. 철기를 신흥무관학교에서 북로군정서로 발탁한 것은 김좌진이었다. 청산리전투에서는 현장 전투의 전권을 철기에게 위임했다. 청산리전투 이후 대부분 독립군 지도자가 공산 러시아행을 주장할 때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한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연해주 지역에서의 공산 러시아에 의한 무장해제, 그리고 만주 지역에서 중국군에 의한 무장해제로 철기가 반 유랑생활을 할 때였다. 신민부를 조직해 독립군 간부들을 양성하려던 김좌진은 철기에게 그 일을 맡기기도 했다. 마리아와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주선한 것도 김좌진이었다. 철기는 만주의 군벌인 장학량 군대에 쫓겨 대흥안령과 몽골 고원 사이에서 은거할 때 김좌진 장군 암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철기는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고 은거지에서 조문을 지어 예를 표했다.
철기와 지청천 장군은 평생의 동지였다. 철기가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을 할 때 지청천 장군도 같은 교관이었다. 청산리전투 이후 밀산에서 두 사람은 재회했다. 하지만 대한독립군이 자유시로 이동할 때 철기는 자유시 이동을 거부했다. 반면 지청천은 홍범도와 함께 자유시로 이동했다가 수난을 당했다. 광복군 창설 시 지청천은 사령관으로, 철기는 참모장과 제2지대 장으로 활동을 같이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 철기는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으로, 지청천은 무임소 장관으로 초대 정부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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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와 홍범도, 그리고 김원봉
철기는 홍범도와 김원봉이 이념적 차이로 자유 대한민국 만들기 여정에는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으나 항일투쟁 동지로선 높이 평가하고 있다. 홍범도는 일찍이 대한제국의 평양진위대 나팔수로 시작해 함경도 산악지대 일대에서 산포수 무리를 이끌고 초창기 항일무장투쟁 지도자로 명성이 높았다.
홍범도는 철기와 청산리전투를 같이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유시참변 후 볼셰비키혁명 전사로 변신해 이후 항일무장투쟁 대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항일 의열단 활동으로 유명한 김원봉은 신흥무관학교 재학 경험이 있었으니 따지고 보면 철기의 제자 격이다. 광복군 시절, 사회주의 계열의 김원봉은 광복군 창설 승인 방해와 9대 준승 해제 지연에 책임이 큰 인사였다. 광복 후 정부수립 시기에 북으로 가 6·25전쟁 때는 북한에서 장관직을 맡다가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했다. 그의 모든 항일무장투쟁 업적이 대한민국 역사 뒤안길로 사라졌다. 모든 선택의 결과는 오로지 본인 몫이다.
철기와 이승만, 그리고 김구
철기와 이승만의 관계는 청산리전투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산리전투의 쾌거가 임시정부에 알려지자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잠시 상하이에 머물던 이승만은 개인 서신을 만주의 청년 독립군 철기에게 보냈다. 그 편지는 다음과 같다.
“이 전투 덕분에 우리도 이제 독립투쟁을 하고 있음을 미국 조야에 떳떳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됐소.”
선물로 만년필도 같이 보냈다. 이것이 철기와 이승만의 첫 인연이었다. 광복 후 이승만은 철기를 초대 내각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 이후 철기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때로는 이용당하고 때로는 핍박받는 일이 반복됐다. 그러나 그 기저에 흐르고 있는 철기의 신념은 그가 환국 시 중국에서 각오했던 애국심에 기반한 구존유금 지재보국(苟存猶今 志在報國), 그리고 군인정신이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즉시 철기를 불러 섭섭함은 잊어버리고 국난 극복에 동참하기를 요청했다. 하지만 조야에서 나오는 철기를 국방부 장관으로 재임명하라는 다수의 요구를 물리치고 1950년 7월, 전쟁 중 대만대사로 출국시켰다. 이후 하와이로 망명한 이승만 박사 시신이 비행기에 실려 여의도로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영접한 것은 철기였다. 영결식 때 운구차를 덮은 만장은 철기의 글이었고, 이승만 박사의 묘비명도 철기의 작품이다.
철기에게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철기가 20세에 윈난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상하이로 돌아왔을 때 백범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 경무국장이었다. 40대의 백범 선생은 철기보다 20여 년 위여서 아버지와 같은 정을 느끼게 했다. 김구는 얼굴이 시꺼먼 빛을 발하는 까닭에 처음에는 좀 험상궂은 인상을 풍겼지만 접근할수록 비범한 분이었다고 철기는 회고했다. 중국군에 잠시 몸담고 있을 때도 철기는 임시정부와 비밀리에 연락을 취했다. 중?일 전쟁에 참가해 피를 흘려 조국광복을 쟁취하자는 철기의 생각과 김구 선생의 생각은 정확히 일치했다. 철기와 김구는 1945년 8월 9일 제2지대 국내 정진 준비 사열 후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둘은 일제의 항복 움직임 소식을 듣고 감격과 낙망을 같이하기도 했다.
해방 정국은 이승만 박사 측과 김구 선생 측이 남한 단독 정부수립 문제로 첨예하게 갈등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 두 분의 큰 뜻과는 무관하게 측근의 과잉 충성으로 정국은 소용돌이쳤다. 백범 선생이 비명에 가던 날, 지방에 있던 철기는 즉시 상경해 경교장으로 달려갔다. 총상을 입은 얼굴과 가슴에 반창고를 붙여놓고 염을 하던 참담한 상황에 철기는 통곡했다. 철기는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을 비교한 적이 있다. 이 박사는 이상에 중점을 둔 분이고, 백범 선생은 행동에 중점을 둔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박사에게는 숭고한 이상이 있었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백절불굴의 용기가 있었다. 백범 선생에게는 대의명분으로 늘 신의와 인격을 내세워 행동을 관철하는 무서운 저력이 있었다. 즉, 하늘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뜻한 바 행동을 밀고 나가는 박력이었다.”
이 박사는 서양적인 사고방식으로 타협을 선택했으나 김구 선생은 대의명분을 지키며 자주독립에서 양보가 없었다. 결국 이 박사는 초대 대통령이 돼 반 조각이나마 자유 민주국가를 수립하는 현실의 정치가가 됐고, 오늘의 대한민국 기틀을 만들었다. 김구 선생은 끝까지 대의명분을 주장하면서 민족통일을 관철하고자 한 이상의 정치가로 남았다. 이상에서 언급된 철기의 혁명동지 6명에 대한 평가 기준은 분명하다. 바로 무한 애국애족 정신이다. 애국애족 정신은 군인정신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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