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 이범석 다시알기 - 낭만과 여유의 혁명가
매일 아침 각설탕·당근 주며 애지중지
유언에 따라 마구 등과 함께 육사 기증
생도들에 철기 애국정신 전승 상징으로
육사·해사 교명 등 철기 서예 작품 다수
이승만 대통령 운구 만장·묘비명도 써
전장서 함께한 김마리아 여사와 혼인
사별 후 한밤중 그리움에 쓴 시 애달파
군인 철기는 모든 일에 애국심이 첫 번째였고, 군인정신에 투철했다.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그였으나 낭만과 여유도 남겼다. 독서와 시, 서예와 승마 등이다. 군인에게 낭만과 여유는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체력단련과 정신수양, 그리고 인격도야와 연결돼 있다. 결국은 군인정신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함이다. 평생을 망명 무장 독립투쟁으로 대륙을 누비던 철기의 일화에서 우리는 지도자가 자기 수련을 통해 품격을 갖추는 교훈을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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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와 말(馬)
평생을 말과 더불어 전장을 누빈 철기에게는 관련 일화가 많다. 철기가 초대 국방부 장관 시절 말을 타고 출퇴근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독립군 출신의 자랑스러움과 무인의 기개였다. 또 중국 운남군관학교 졸업 시 만든 그의 호인 철기의 ‘기(驥)’자는 천리마 ‘기’자를 말한다. 기병은 과감히 마상 돌격할 수 있는 민첩, 용감, 대범한 기질을 지녀야 한다. 특히 기병의 생명인 말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기병은 인마동체(人馬同體)가 핵심이다. 철기는 여기에 적합한 체격과 기질을 타고났다.
철기 일생에서 유명한 말 중 하나가 ‘설희(雪姬·snow queen)’다. 순백색 말인 설희에 대한 철기의 애정은 그야말로 지고지순했다. 철기는 비 오는 날을 빼고는 매일 아침 각설탕과 당근을 들고 설희를 찾았다. 조련을 끝낸 다음에는 꼭 손수건으로 눈곱과 입 언저리를 닦아주곤 했다. 철기가 운명하던 1972년 5월 11일 상오 6시쯤, 설희는 마사공원 마구간에서 갑자기 큰소리로 세 번 울었다. 마사공원 직원들은 이날 7시 뉴스로 철기의 서거 소식을 듣고 역시 설희는 명마인지라 주인의 운명을 느낀 것으로 짐작했다고 한다.
설희는 철기의 국민장 때 운구차를 뒤에서 묵묵히 따랐다. 철기 사후에 제대로 먹지 않고 힘이 없었기에 유언에 따라 육군사관학교에 기증됐다. 설희는 철기의 승마복, 안장, 장화, 굴레 등과 함께 육군사관학교로 옮겨졌다. 조국 광복에 일생을 바친 철기였다. 설희는 육사 생도들에게 철기의 우국충정을 배우게 하는 역할을 끝으로 육사에 묻혔다. 독립군 장군이자 대한민국 국군의 아버지 철기의 애마다운 마지막 이야기다. 설희를 육군사관학교에 기증하던 상황을 당시 육사생도였던 모 국방부 장관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육군사관학교 생도 4학년 시절인 1974년 5월 어느 날, 2년 전 돌아가신 철기 장군님의 마지막 애마 설희를 육사에 기증하는 행사가 화랑연병장에서 거행됐다. 그 자리에서 노산 이은상 선생께서 말씀하시길 ‘이 말을 특별히 육군사관학교에 기증하는 목적은 철기 장군께서 만주벌판에서 풍찬노숙하며 오직 조국 광복을 위해 노심초사한 그 독립 애국정신을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전승해주길 바라는 것이 국민의 마음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나는 그때 가슴이 전율함을 느꼈다. 지금도 그 느낌이 생생하다.”
철기의 서예
철기는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다. 문무겸전(文武兼全)이었다. 그는 많은 서예 작품을 남겼는데, 글의 뜻과 글자 획의 힘이 넘친다고 평가받고 있다. 연세대 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고 백낙준 박사는 “철기는 공자가 말하는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 품위·음악·활쏘기·말타기·글쓰기·계산)의 육례를 갖춘 위인이었다”고 말했다. 국군 출범 시 명명된 육군과 해군사관학교 교명, 이승만 대통령 영결식 때 운구를 덮은 만장, 묘비명이 모두 철기의 글이다. 그 외에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 나이 16세에 중국으로 망명해 30여 년을 전장을 누빈 철기에게 서예를 익히고 담금질할 시간과 여유가 없었을 터이니 틈틈이 시간을 아껴 이를 익히고 숙달하지 않았을까 한다.
영원한 혁명동지 ‘김마리아’
철기의 청년 시절 로맨스는 ‘북극풍정화’란 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영원한 혁명동지는 부인 김마리아 여사였다.
김마리아의 선대는 러시아 연해주로 귀화한 한국인이었다. 철기가 고려혁명군 기병사령관에 이어 ‘수이푼 지구 합동민족군’을 이끌던 시절, 마리아는 러시아 공산당에서 파견한 정치부원이었다. 철기는 공산주의자가 못마땅해 마리아를 피하기만 했다.
‘스파스카야 전투’가 둘 사이의 전환점이었다. 철기는 전력을 다해 강력한 요새 스파스카야를 함락시켰다. 마리아는 자원해서 간호 요원으로 활동했다.
이때 마리아는 철기에게서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을 느끼고, 온 마음을 쏟았다고 훗날 고백했다.
1925년 마리아는 숙청을 피해 공산 러시아를 탈출해 철기를 찾아 나섰다. 만주에서 재회한 두 청춘남녀는 이내 백년가약을 맺었다. 청산리전투를 같이 치른 김혁 선생의 주례와 김좌진, 조성환 선생의 후견으로 한 쌍의 ‘혁명동지 결혼’이 이뤄졌다. 이후 부부는 하얼빈 근처에서 고려혁명군 결사단을 조직해 일제 관동군을 괴롭혔다. 이때 필요한 권총, 수류탄 등의 구입은 러시아어에 능통한 마리아의 몫이었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마리아는 한국광복군 2지대에 입대해 광복군 상사 계급으로 남편인 이범석을 보좌했다. 그녀는 또 한국광복군 대원들 교육을 담당하기도 했다. 해방 후 국내에서 생활을 시작할 때 마리아는 철기에게 조용히 이야기했다.
“나는 고국의 말도 서투르고 풍속도 아는 것이 없어요. 하지만 당신 생활을 돌봐주고, 당신이 시련과 유혹에 부딪치면 당신의 명예를 지켜줄 거예요.”
그리고 이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광복 후 사회적·윤리적 제도와 장치 공백으로 금력과 권력이 횡행하던 시절 이야기다. 철기가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 시절, 어떤 사람이 마리아에게 한 번은 금 반상기를, 또 한번은 현찰 두 트렁크를 가져왔다. 마리아는 두 번 다 문전 퇴짜를 놓았다. 철기에게는 상의 한마디 없었다.
1970년 2월, 마리아는 철기보다 2년 먼저 타계했다. 철기는 몇 달 뒤 꿈에서 그녀를 본 뒤 한밤중에 일어나 마리아를 그리는 한 편의 시를 썼다.
“빈방 찬 이불에 잠 못 이루어 이슬 맺힌 베란다에 달빛 기울고 호수 같은 가을 하늘 밤은 오경 남녘 연변에 가로등 가물가물”
사별한 평생 동지 마리아를 사모하는 깊은 정이 가슴을 울린다. 김마리아 여사는 사후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부부가 독립유공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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