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 이범석 다시알기 - 국군장교단 인맥 편중 문제 해결
일본·만주군 출신이 조선경비대 주력
국군 인적 정통성 재정립 시급히 추진
해외 체류 김홍일 장군 등 광복군 영입
육사 7·8·9기생만 3720명 대거 임관
우수한 사회 청년단체 요원도 장교복
6·25전쟁 최전선서 국가 수호 주역으로
국군 장교단의 인맥 편중이란 국군 출범 시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장교가 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상황을 말한다. 이는 특정 파벌이 형성될 가능성과 함께 국군의 정통성과도 연결 지을 수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국군 출범 전 조선경비대 실정
조선경비대 창설 이전에는 군사영어학교가, 경비대 창설 이후에는 조선경비대 사관학교와 조선해안경비대 사관학교가 장교 양성 기관이었다.
국군 출범 시 편입시킨 조선경비대 장교단은 군사영어학교 출신과 조선경비대 사관학교 6기까지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미군정 당국의 경비대 창설 시 무엇보다 우선한 것은 미군과의 의사소통이 가능한 간부 양성이었다.
미군정 당국은 출신 불문하고 과거 군사경력을 지닌 사람 중 희망자 중심으로 기초 군사영어를 교육하기 위해 군사영어학교를 1945년 12월 5일 서울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 자리에 개설했다. 그런데 군사영어학교 창설 시 대부분 광복군 출신은 임시정부 정통성을 주장하며 응시를 거부했다. 따라서 군사영어학교 입교자는 자연히 당시 미군정 참여에 협력적이었던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었다.
군사영어학교는 2개기 110명이 졸업했다. 출신별로 보면 일본군 출신 87명, 만주군 출신 21명, 그리고 광복군 출신이 2명으로, 일군과 만군 출신이 98%로 압도적이었다.
미군정은 군사영어학교를 1946년 4월 30일 해체하고, 5월 1일부로 태릉에 남조선 국방경비사관학교를 창설했다. 이후 정부 출범 전까지 6개기 1254명이 남조선 경비대사관학교를 거쳐 장교로 임관했다.
육군사관학교 입교 확대
독립군과 광복군 출신인 철기가 국방 최고책임자로 부임하면서 국군의 인적 정통성 문제는 반드시 슬기롭게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핵심은 두 가지였다.
첫째, 일본군 출신과 그 아류인 만주군 출신이 경비대 주력이라는 현실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경비대에 참여하지 않고 아직도 군 밖에 있는 군사경력자의 군내 흡수였다.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모두가 독립군을 직접적으로 탄압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나 이들이 신생 독립국가 국군 간부의 중심세력이 되는 것은 분명히 모순이었다. 정치적으로 비판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교단은 전투지휘와 조직관리를 하는 전문가 집단이란 점을 고려해야 했다. 그러기에 장교단 예비 인재풀이 형성돼 있지 않았고, 광복군 출신이 미군정 경비대 참석을 거부하던 당시 상황에서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유경험자의 포용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철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단의 정책을 추진했다. 주한미군 철수와 맞물려 국군을 확충하기 위해 육군사관학교 입교생을 대폭 확대했다. 또 기수마다 특별 기수 임관제도를 만들어 군사 유경험자로서 군정에 협력을 거부하며 정부 수립을 기다리고 있던 광복군 출신에게 대거 입대를 요청했다.
해외에 체류하고 있던 김홍일 장군과 신성모, 그리고 오광선, 안춘생, 이준식, 박영준, 권준, 장흥, 김관오 등 광복군 출신이 대거 군에 들어왔다. 유승열, 안병범, 신태영, 김석원, 백홍석, 이대영, 이종찬, 이형석, 이용문 등 일군 출신도 병행 영입하는 결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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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1948년 8월 9일 입교한 육군사관학교 7기생은 당일 입교한 602명 외에 정부 출범 직후인 8월 17일부터 특별기와 후기를 추가로 별도 신설해 1098명이 임관했다. 8기생은 정규 입교 외에 특별기 4개기를 추가해 2042명이 임관했다. 9기생은 단일기로 1950년 1월 698명이 임관해 3개기에서 총 3720명이 임관(임관 숫자는 육사 기별 졸업생 명단 기준)했다.
군사영어학교 수료 2개기 110명과 경비대사관학교 1~6기까지 졸업생 1254명 등 총 1364명의 기존 장교단을 2배 이상 압도하는 인원이 단기간 내에 군 장교단으로 들어왔다.
광복군 출신으로 제7기 특별반에는 김관오, 김국주, 장흥 등이 입교했다. 제8기 특별반에는 이준식, 오광선, 안춘생, 박영준, 권준, 장호강, 김영일, 전성호 등이 입교했다. 이 외에 철기 후임으로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김홍일 장군, 제1지대장인 채원개가 특임으로 임관했다. 최용덕, 김구 선생의 자제 김신은 공군으로 임관했다. 특별기 출신은 임관 시 고급장교로 임관하게 했다.
이로써 그동안 군 참여에 은인자중하던 광복군 군 유경험자그룹이 군에 들어오게 됐다. 이들이 들어오면서 군 상층부 리더 층이 채워졌다.
또한 사회 청년단체 요원들도 대거 군에 장교로 들어왔다. 철기의 민족청년단, 지청천 장군의 대동청년단 등과 이북에서 월남한 서북청년회, 대동강동지회, 압록강동지회 등 우익 청년단체 회원, 그리고 사회에서 대학을 다니거나 졸업한 엘리트 청년이 대거 입대했다. 이때 철기가 육군사관학교와 관련해 조치한 사항들은 이후 군과 사회에 끼친 영향이 지대했다.
첫째, 군의 인적 정통성과 정체성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이들은 기존 장교단의 75%를 차지하고 있던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중심의 군 장교단 비율을 일거에 역전시켜 일본군과 만주군 색채를 희석시켰다. 이로 인해 6·25전쟁 직전에는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 전체 장교단의 5분의 1 수준으로 희석됐다.
둘째, 육군사관학교 7기·8기·9기 졸업생은 곧 이듬해 발발한 6·25전쟁의 최전선에서 대한민국을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구해내는 주역이 된다. 특별기 임관자는 사단장 이상 고급 지휘관으로, 정규 기수 임관자는 중?소대장으로 공산주의 침략을 온몸으로 막아냈다.
셋째, 이들이 군에서 체득한 선진 미국의 행정과 조직관리 능력은 이후 대한민국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넷째, 철기는 국군이 광복군정신을 이어받는다는 의미에서 광복군 출신을 육군사관학교장으로 임명해 국군 정통성에 관한 상징을 만들었다.
경비대사관학교까지는 일본군 출신이 교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철기가 장관 취임과 동시에 육군사관학교로 명칭을 개칭한 후부터 광복군 출신이 학교장을 이어서 맡았다.
7대 학교장 김홍일 장군(광복군 참모장), 8대 학교장 이준식 장군(광복군 제1지대장), 9대 학교장 안춘생 장군(광복군 2지대·안중근 의사 조카) 등이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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