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일보, 군 원로·예비역에게 듣는다
고국 소식 전하는 ‘메신저’
장병 정신전력 강화 ‘동반자’
미래의 꿈 키워준 ‘도약대’
생생한 취재 ‘국민의 눈과 귀’
지난 60년 국방일보는 국군의 ‘전우’로서 동고동락했습니다. 새해 첫 일출을 장병과 함께 맞이했고, 마지막 날 역시 장병 옆에 있었습니다. ‘전우’에서 ‘전우신문’ 그리고 ‘국방일보’로. 이름과 모습은 달라졌어도 국방일보는 늘 국군의 곁을 지켰습니다. 긴 세월 쌓인 추억도 한 보따리입니다. 최전방 격오지에서,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국제 평화유지 활동을 위한 해외 파병지에서 국방일보는 장병들과 수많은 추억을 쌓았습니다. 창간 60주년을 맞아 군의 원로부터 최근 전역한 예비역까지, 국방일보와 얽힌 소중한 추억 보따리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임채무 기자/사진=국방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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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 기대·축하 속 탄생한 국방일보
“한목소리로 ‘우리 군인들을 위한 신문이 만들어졌다’면서 놀라워했죠. 모두 자기 일인 듯 축하하고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살아있는 ‘호국영웅’ 류재식(육군대령 예편)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지부장은 국방일보 60년 역사를 지켜본 사람 중 하나다.
류옹은 국방일보(당시 전우) 창간일인 1964년 11월 16일 육군본부 회계감사단에서 행정실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오래된 기억이지만 그날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또렷할 수밖에요. 신문이라는 매체는 세상의 소식을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통로였습니다. 그런데 군인들을 위한 신문이라니. 놀랄 수밖에 없었죠. 동료들과 국방일보(전우) 창간호를 돌려보면서 축하해주고, 앞으로 우리도 여기에 나올 수 있도록 열심히 근무하자고 얘기했죠.”
시간이 흘러 1970년 1월 1일 전방부대에서 대대장으로 근무하던 류옹이 국방일보에 등장했다. 당시 1군사령관이었던 한신 장군의 추천을 받아 신년 특별호에 대비태세 우수부대로 소개된 것.
류옹은 “사령관님이 추천해 주셨는데 안 나갈 수 없었다”면서 “그때 이후로 국방일보를 더 사랑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그해 베트남에 파병된 류옹은 또 한 번 국방일보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됐다. 고국의 소식을 전해주는 유일한 메신저 역할을 국방일보가 했기 때문이다.
“4일치가 한 번에 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국방일보가 오는 날이면 먼저 보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죠. 그도 그럴 것이, 국방일보는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고국의 소식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국방일보를 동료들과 돌려보면서 그리움도 많이 달랬죠.”
류옹의 가슴에는 6·25전쟁 때 적군에 맞은 총탄이 아직 박혀있다. 그가 6·25전쟁의 살아있는 영웅이라고 불리는 이유 중 하나다. 이러한 내용은 국방일보를 통해서도 여러 차례 보도됐다. 그는 국방일보 창간 60주년을 축하한다면서 앞으로 6·25전쟁과 관련된 내용을 더 많이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주형 기자님이 저에 대해 처음 보도한 것 같아요. 지금도 매일 아침 이주형 기자의 기사를 꼼꼼하게 챙겨봅니다. 국방일보가 아니면 누가 이런 소식들을 알릴까 싶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국방일보가 진짜 최고의 신문입니다. 6·25전쟁이 잊힌 전쟁이 되지 않도록 국방일보에서 신경 써 주시길 당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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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의 땅에서 장병과 함께한 ‘전우’
열사의 땅 이라크에서 국위를 선양하며 국방일보와 추억을 쌓은 사람도 있다. 22대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맹활약 중인 유용원 의원실의 손민석(예비역 육군대위) 선임비서관이 그 주인공이다.
“이라크평화재건사단(자이툰부대)에서 공보장교로 근무할 때였습니다. 박지숙 기자님으로 기억하는데, 제가 보도사진에 관심이 많은 걸 아시고 부대 관련 사진이 있으면 언제든 보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우리 기지 위에 무지개가 뜬 사진을 보내드렸죠. 그게 다른 면도 아니고 국방일보 1면에 나온 거예요. 1면에 실리기가 쉽지 않잖아요. 제목은 ‘자이툰부대의 상서로움이…’ 였던 걸로 기억해요.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보도사진에 진심이 됐죠. 이후 수시로 국방일보에 사진을 보내 어떤 사진이 보도사진에 적합한지 경험을 쌓을 수 있었어요.”
2008년 전역한 손 선임비서관은 국방일보와의 인연을 통해 쌓은 경험으로 군사사진 전문기자라는 타이틀에 도전했다. 그 결과 조선일보 객원 사진기자로 활동하며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부대를 취재했다. 또 국방부 멀티미디어 자문위원, 육·해·공군본부 블로그 외부 집필진에 위촉되기도 했다. 특히 국방부의 지원을 받아 군사 사진으로만 전시회를 두 번이나 여는 독보적인 경력을 축적했다.
“국방일보와 얽힌 얘기를 말하자면 끝이 없을 거 같아요. 요약하면, 국방일보는 제가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준 ‘도약대’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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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전력교육 핵심 자료 역할 톡톡
유재만 예비역 제독은 누구보다 국방일보를 가까이 두고 군 생활했다. 위관·영관장교 시절에는 세상을 이어주는 통로로, 지휘관을 하면서는 정신전력 핵심 자료로 군 생활의 동반자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부대원들의 정신전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국방일보가 없었으면 교육을 못 했을 거예요. 그야말로 정신전력교육 핵심 자료였죠. 국방부에서 국방일보를 활용해 정신전력교육을 할 수 있게끔 시스템을 구축한 부분도 있지만, 쉽게 접할 수 있는 국방일보에 교육자료가 실려 정말 편했습니다. 국방일보를 윤독하고 토론하면서 부대원들에게 국가관과 대적관을 심어줄 수 있었어요.”
유 예비역 제독은 영관장교 당시 연평도·대청도 근무를 언급하면서 “국방일보가 장병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역할도 해줬다”고 평가했다.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였죠. 육지에서 떨어진 서북도서 같은 오지는 오죽했겠습니까. 그렇다 보니 다른 부대 소식은 물론 세상의 다양한 얘기가 담긴 국방일보는 간부·수병 가릴 것 없이 인기가 좋았습니다. 국방일보를 기다리는 게 하나의 낙일 정도였죠.”
유 예비역 제독은 국방일보 기고 활동에도 열심히 동참했다. 그는 “밤낮없이 취재하며 해군을 알린 윤병노 기자가 아직도 기억난다”며 “국방일보가 ‘국군의 영원한 전우’로서 더욱더 발전하기를 바란다”고 기원했다.
“정신전력 우수부대 선정을 위한 것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애정이 있었기 때문 같아요. 이 애정은 아직도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빌려 제언하자면, 국방일보 모바일 앱의 접근성을 높이면 좋겠습니다. 헌혈 횟수, 운동 기록, 자격증 취득 정보 등을 앱에 포함하고 열심히 사용한 독자(장병)에게 혜택을 주면 활성화되지 않을까요. 또 ‘국방일보 홍보대상’을 만들어서 제작에 이바지한 장병들을 선정해 시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지역 매체와도 협업해 콘텐츠를 공유하거나 함께 기사를 작성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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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도 뚫고 취재… 군 홍보에 진심인 사람들
“군 홍보를 위해서라면 눈으로 막힌 도로도 뚫고 가는 사람들.”
2014년 2월 육군8군단 포병단 정훈장교였던 양동석(예비역 중위) 신창초등학교 교사가 조용학 기자를 보고 든 생각이다. 당시 양씨가 근무하던 강원도 영동지역은 ‘103년 만의 폭설’이라는 악명이 붙을 정도로 기록적인 눈이 쏟아졌다. 우리 군은 막힌 도로를 뚫어 고립된 주민들을 구하고, 구호품을 나르며 피해 최소화에 앞장섰다.
“공식 기록은 잘 모르겠지만, 열흘 정도 내린 눈이 자동차보다 더 높이 쌓였던 게 기억나요. 산간 지역은 3m 가까이 왔다고 들었어요. 도시 기능이 거의 마비됐죠. 언론이라고 해서 다를 게 있나요. 길이 막히니 취재도 쉽지 않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국방일보는 그 눈을 뚫고 취재하더군요. 취재를 마치고 숙소에 들어가는 모습을 잠깐 봤는데,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어요. 군 홍보에 진심인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년이 지났지만 양씨가 국방일보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부대원들의 반응 때문이다. 부대 홍보를 담당했던 양씨는 밤낮없이 작전에 투입돼 고생하는 장병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했고, 보람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 현장 취재 지원에 적극 나섰다. 덕분에 부대원들 모습이 국방일보에 보도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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