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희의 마·이·클(마음으로 이어주는 클래식)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Winterreise)’
내성적 성격처럼 작품도 섬세
동시대 베토벤과 음악세계 달라
900곡 남겼지만 사후에 알려져
죽음 앞두고 ‘겨울나그네’ 작곡
뮐러 시에 곡 붙인 24개의 작품
실연으로 방황하는 방랑자 대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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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손대는 모든 것은 노래로 변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1797~1828)는 가곡에 특별한 능력을 보였습니다. 그가 만든 600곡의 가곡은 아름다운 선율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슈베르트는 이전 시대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가곡(Lied) 장르에 예술혼을 불어넣었습니다. 그의 노래는 선율을 더 풍부하게 이끌어 주는 피아노 반주로 고전적인 균형미와 넘치는 낭만적 서정성을 함께 담고 있습니다.
슈베르트의 음악에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이나 베토벤의 강렬함과는 다른 부드럽고 유연한 서정성이 느껴집니다. 또 자연스럽고 즉흥적인 선율들은 마법과도 같은 화성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슈베르트는 시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음악에 얹어 그의 가곡들은 원래의 시를 뛰어넘었습니다. 성악가를 위한 선율과 피아니스트의 화성은 평범한 시를 최상의 가곡으로 탄생시켰고, 그의 예술가곡은 가장 훌륭하고 표현적인 음악이 됐습니다. 슈베르트의 작품들은 자연에 관한 짧은 묘사부터 극적이거나 민속적인 선율, 적극적인 감정 표현 등으로 매우 다양합니다.
음악적인 분위기의 가정에서 태어나 탁월한 미성을 지녔던 슈베르트는 빈 소년합창단의 전신인 슈테판성당 부속 합창단에서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변성기가 지나서는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연주하고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며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잠시 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도 했지만, 내성적이었던 슈베르트는 직장생활을 잘 이어 나가지 못해 평생을 프리랜서 작곡가로 살았습니다.
슈베르트의 수줍고 겸손한 성격처럼 그의 작품들도 섬세하고 서정적입니다. 규모가 큰 장르보다 아기자기한 작품과 잘 맞았던 슈베르트가 수많은 가곡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베토벤과 거의 비슷한 시대 인물이었지만 음악세계는 매우 달랐습니다. 베토벤의 작품들은 그의 생애 동안 대부분 출판돼 자주 연주됐지만, 슈베르트의 작품은 아주 일부만 그가 살아 있을 때 출판되었습니다. 3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가곡을 포함해 총 900곡을 남겼지만 거의 슈베르트의 사후에 알려지게 됐으니, 그의 샘솟는 창작 능력이 생전에 인정받지 못했다는 점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슈베르트는 사회성이 부족했지만 다행히 평생의 벗이 될 소중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시인, 철학자, 법률가, 화가 등으로 활동하던 그들은 베토벤처럼 대중적 인기를 끌지 못한 슈베르트를 위해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라는 연주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하고 허약했던 슈베르트가 활동하는 데 큰 힘이 됐죠.
슈베르트는 주위의 도움에도 항상 외로움에 억눌렸고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슈베르트의 심오한 작품은 대부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병고에 시달렸던 시기에 나왔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슈베르트는 “아직 더 배울 것이 남아 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는 연가곡집 ‘겨울나그네’(1827)와 3개의 피아노 소나타 등을 작곡했습니다.
늦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클래식 연주 무대를 장식하는 ‘겨울나그네’는 한마디로 ‘세상에서 외면당한 젊은 나그네의 정처 없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헬름 뮐러의 시에 곡을 붙인 24개의 작품으로 이뤄진 ‘겨울나그네’는 직역하면 ‘겨울여행’입니다. 혼자 떠나는 쓸쓸하고 외로운 여행이죠.
이전에 썼던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1824)는 설렘과 행복감에서 시작돼 이뤄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를 노래했습니다. 하지만 아픈 몸으로 쓴 2번째 작품집인 ‘겨울나그네’에서는 옛 시절에 대한 향수와 체념, 현실과 환상 사이를 방황하는 고독한 방랑자의 모습이 혼란스럽게 그려집니다. 사랑했던 사람에게 거절당한 춥고 어두운 어느 겨울밤의 황량한 풍경이 주인공 청년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미래를 약속했던 여성이 그를 배신하고 풍족한 남자과 결혼을 택하면서 갑작스럽게 청년에게 이별을 고하고, 이에 충격받은 청년이 도시를 떠나 겨울에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느끼는 감정을 노래한 ‘겨울나그네’의 첫 곡은 작별 인사를 의미하는 ‘안녕(Gute Nacht)’으로 시작합니다.
‘이방인으로 왔다가 다시 이방인으로 떠나네. 5월은 아름다웠네. 꽃들은 만발하고 소녀는 사랑을 속삭였네’. 담담하게 시작하는 피아노 반주 위로 흐르던 단조의 선율은 후반부에서는 장조로 바뀌며 작은 희망과 용기를 노래하는 듯합니다. ‘너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으리. 발걸음도 들리지 않게 살그머니 문을 닫겠다. 떠나며 그 문에 안녕이라고 적으리라. 너는 그것을 보고, 너를 사랑했던 내 마음을 기억할까’.
5번째 곡인 ‘보리수(Der Lindenbaum)’는 ‘겨울나그네’뿐만 아니라 슈베르트의 모든 가곡을 통틀어 가장 가장 유명한 곡입니다. 앞의 4곡은 모두 단조로 돼 있는데, ‘보리수’에 이르러 장조로 바뀝니다. 한겨울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 방랑길에 오른 청년이 가장 좋아했던 장소가 바로 보리수나무 곁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함께했던 보리수나무 그늘 아래 사랑을 꿈꾸던 달콤한 추억을 떠올리는 아픈 청년에게 나뭇가지를 흔들며 속삭입니다. ‘이리 오게 친구여. 여기서 안식을 찾게’.
마지막 곡 ‘거리의 악사(Der Leiermann)’는 슈베르트의 작품 중 가장 절망적인 느낌을 담고 있습니다. 완전 5도의 공허한 반주 음향은, 시종일관 지속되고 읊조리는 듯한 노래는 비틀거리며 손풍금을 연주하는 늙은 악사의 힘없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노인이여, 나와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내 노래 맞춰 연주해 주오’라는 마지막 노랫말은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병약한 슈베르트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음악은 여기에 고귀한 보배와 그보다 훨씬 귀한 희망을 묻었노라.” 슈베르트의 친구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평소 존경했던 선배 음악가 베토벤의 곁에 그를 묻으며 이런 비석을 세웁니다. 슈베르트의 작품이 후세에 널리 알려지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겨울나그네’에는 병으로 인해 심신이 약해진 젊은 음악가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아직은 매서운 바람이 낯선 가을날, 겨울여행을 시작하지 못하고 가을(11월 19일)에 떠난 슈베르트의 인생에 대한 고백과 같은 ‘겨울나그네’를 들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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