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에 이룬 소망…꿈엔들 잊힐리야

입력 2024. 11. 14   16:23
업데이트 2024. 11. 14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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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 예술
옛 그림으로 떠나는 여행  16. 강세황의 중국 사행: ‘영대기관첩(瀛臺奇觀帖)’에 나타난 빙희(?戱)

평생 꿈꾸던 청나라 사행 기회 
72세에 본 ‘영대빙희’ 그림 남겨
궁중회화 같은 사실성 부족해도
격조 있는 문예적 내공 엿보여

 

강세황, ‘영대빙희(瀛臺?戱)’ ‘영대누각(瀛洲樓閣)’ ‘영대기관첩(瀛臺奇觀帖)’, 1784, 각 23.3×13.7㎝,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 ‘영대빙희(瀛臺?戱)’ ‘영대누각(瀛洲樓閣)’ ‘영대기관첩(瀛臺奇觀帖)’, 1784, 각 23.3×13.7㎝, 국립중앙박물관



고요한 호수에 홍살문 하나가 높이 섰다. 홍살문 아래로 술 달린 동그란 공이 달리고, 그 아래로 화살을 든 사람들이 순서대로 지나간다. 옆에는 용 모양의 배 한 척이 있다. 주변 나무들의 앙상한 가지가 추운 겨울임을 알려준다. 이 그림은 강세황(1713~1791)이 1784년 그렸다. 중국 사행 여정을 담은 서화첩인 ‘영대기관첩(瀛臺奇觀帖)’에 수록된 글과 그림 중 하나다.

‘영대빙희’와 ‘영대누각’은 그림이 이어진다. 그림 속 호수는 태액지(太液池)로 중국 북경의 자금성 바깥에 있는 대단히 넓은 인공호수고, 방위별로 이름이 있다. 그림 오른쪽에는 북해의 백탑(白塔)이 보인다. 누각은 아래쪽 중해(中海)에 있는 수운사(水雲?)이고, 빙희연은 남해에서 펼쳐졌다. 왼쪽 위에 보이는 건물들이 일명 ‘영대(瀛臺)’로 여름이 되면 이곳에서 정사를 봤다고 한다.

강세황은 어떻게 이 장면을 보게 됐을까? 조선은 매해 청나라로 가는 외교사절단으로 동지사(冬至使)를 꾸렸고, 여기에는 관리 30~40명에 수행 인원 200~300명 정도가 포함됐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사대부에게 사행은 새로운 문물을 보고 견문을 넓히는 기회로, 많은 이가 선망했다. 강세황은 명문 사대부가의 자제였지만, 형의 귀양살이와 가난으로 오랫동안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영조의 배려로 예순한 살에야 비로소 벼슬을 제수받을 수 있었다. 그는 조선 문예를 이끄는 사람이었지만 늘 넓은 세상을 동경했다. 서른두 살이나 어린 박제가(1750~ ?)가 중국 사행 일원이 되자 이를 부러워하며 보낸 편지가 있다.

“나는 평생에 한이 있는데, 중국에서 출생하지 못한 것이 그러하다. 사는 곳이 멀리 떨어져 궁벽한 곳이기에 지식을 넓힐 도리가 없다. 중국 학자들을 만나 막힌 가슴을 터놓는 게 소원이다. 어느덧 백발이 됐는데 어떻게 날개가 돋을 수 있을까?” (‘贈別恩?赴盛京’ 『근묵』 중에서)

어느 날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왔다. 1784년은 청나라 건륭제(재위 1735~1796)가 재위 50주년을 기념한 ‘천수연’에 조선의 관리를 초대했다. 천수연에는 벼슬이 있는 자는 65세까지, 일반 군인과 백성은 70세까지 연령 제한을 뒀다. 강세황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자신까지 삼대가 기로사(耆老社: 나이 70세 이상 문과 출신 정2품 이상 전·현직 관리의 친목 기구)에 들어간 학문과 장수를 상징하는 집안 출신으로, 조선 관리를 대표해 사행 부사로 참석했다. 이들은 한양에서 1784년 10월 8일(음력) 출발해 12월 6일 북경에 입성한다. 이곳에서 50일 정도 머무르면서 행사를 마친 후 다음 해 1월 25일 출발, 3월 17일에 한양에 도착했다. 장장 6개월에 걸친 여정이었다. 이 기간에 강세황은 중국 지식인과 소통하고, 강세황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글과 그림으로 교류했다.

‘영대빙희’는 1784년 12월 21일 황제가 초대한 행사다. 빙희는 청나라의 국가적인 행사로, 여진족 근거지였던 요동반도 태자하에서 했던 군사행사에 뿌리를 뒀다. 이후 동지 즈음 북경의 내성인 자금성 옆에 있는 태액지에서 황제가 직접 참관했다. 그리고 여러 나라의 외교 사절을 함께 불러 팔기군(八旗軍) 무예 숭상을 고취하고, 군사적 위용을 대외적으로 과시했다.

 

金昆 외, ‘빙희도(?戱圖)’, 청, 비단에 채색, 35X578.8㎝, 북경고궁박물원.
金昆 외, ‘빙희도(?戱圖)’, 청, 비단에 채색, 35X578.8㎝, 북경고궁박물원.

 


청의 궁정화가들이 그린 ‘빙희도’에는 팔기군이 깃발을 따라 활빙하는 모습을 황제가 용상에서 보고 있는 장면을 그렸다. 빙희에는 크게 속도활빙, 빙상기교, 빙상축구 등 세 가지 항목이 있다. 활빙은 스케이트처럼 날이 있는 신발을 신고 구불구불한 수도 위를 깃발을 따라 빨리 달려 홍살문 위에 매달린 공을 화살로 맞히는 경기다. 빙상기교는 빙상 위에서 거꾸로 서거나 장대, 축 등을 이용하는 무술을 보여준다. 빙상축구는 가죽으로 만든 공을 군대가 무리 지어 차지하는 운동으로 500명을 5부대로 나눠 매년 10월 빙상훈련을 시작했다고 한다. 건륭제는 빙희를 일컬어 “빙희는 놀이지만, 그 뜻은 무(武)를 따른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행사였다. 사행을 다녀온 후 정조 임금에게 올린 보고서인 장계를 보면 강세황이 속도활빙을 본 것으로 알 수 있다. 

“21일에는 황제가 영대(瀛臺)에서 빙희(氷戱)를 구경하였습니다. (중략) 신 등이 걸어서 영대 가로 따라가니, 얼마 뒤 황제가 빙상을 탔는데 모양이 용주(龍舟)와 같았습니다. 좌우에서 배를 끌고 얼음을 따라가는데, 얼음 위에 홍살문을 설치하고 거기에 홍심(紅心)을 달아놓았습니다. 팔기(八旗)의 병정들로 하여금 각각 방위에 해당하는 색깔의 옷을 입고, 신발 밑바닥에는 목편과 철인(鐵刃)을 부착하고, 화살을 잡고 얼음에 꿇어앉아 홍심을 쏘게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말 타고 달리면서 꼴로 만든 표적을 쏘는 것과 같았습니다.”- ‘북경에서 도착한 정사 이휘지·부사 강세황의 장계’ 『정조실록』(정조 9년, 2월 14일)

강세황의 그림은 전체 공간의 느낌과 하나의 사건을 간략하게 전달하는 느낌이 강하다. 청나라의 궁중회화처럼 황제의 위용과 팔기군의 생동감을 전달하는 사실성은 떨어지지만, 시적인 여운이 깊이 자리 잡았다. 화려한 행사를 보고 마음이 들뜨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강세황은 이를 자신이 오래 지지해 온 문인화의 격조로 표현했다. 72세의 나이로 평생의 꿈을 이룬 강세황의 문예적 내공이 엿보이는 순간이다.

 

필자 한세현은 서울디자인재단 DDP 전시팀에서 전시 기획 및 교육 운영을 담당했다. 현재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으며 국가유산청 문화유산감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필자 한세현은 서울디자인재단 DDP 전시팀에서 전시 기획 및 교육 운영을 담당했다. 현재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으며 국가유산청 문화유산감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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