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보적 경험·철학·리더십…대한민국 국방 초석 다져

입력 2024. 10. 22   17:09
업데이트 2024. 10. 22   17:27
0 댓글

철기 이범석 다시알기
독립군-광복군-국군으로 이어진 정통성

미 군정사령관 하지 장군의 강력한 추천
100만 단원 민족청년단의 막강한 배경
정치조직 가담 않은 순수한 청년운동가
쟁쟁한 후보 제치고 초대 국방장관 임명
냉전 상황 속 군대 창설·국방 설계 중책
단기간 내 정책 수립·운용 수많은 업적

철기는 30년 망명생활 동안 오직 항일무장투쟁에 전념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독립군 장군 출신으로서 카리스마 넘치는 국방부 장관이었다. 철기는 승용차보다 말을 타고 출근하는 것을 즐겼다. 사열한 청년들을 말을 타고 점검하는 철기의 모습. 독립기념관 제공
철기는 30년 망명생활 동안 오직 항일무장투쟁에 전념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독립군 장군 출신으로서 카리스마 넘치는 국방부 장관이었다. 철기는 승용차보다 말을 타고 출근하는 것을 즐겼다. 사열한 청년들을 말을 타고 점검하는 철기의 모습. 독립기념관 제공



일반적으로 문민통제 아래에서 국방부 장관은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으로부터 국가의 무력 조직인 군대 통솔에 관한 위임된 권한을 지니고 국가 안보를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군대와 국민으로부터 신뢰받을 수 있는 강력한 카리스마가 요구된다.

특히 신생국가의 초대 국방부 장관은 완전 백지 위에서 군대를 창설하고 그 성격과 역할을 규정해야 한다. 새로운 자유민주국가라는 체제에 부합한 국방의 기본을 만드는 것이다. 다시는 국망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는 국민적 열망 속에 신생국가 국방을 누가, 무엇을,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지대한 관심사였다. 열의는 뜨거웠으나 자유민주주의국가 군대 설계 경험은 없었던 것이 1948년 8월의 대한민국이었다.


왜 철기 이범석인가?

당시는 일제가 패망한 후 중국에서 장개석 국민당 군대가 모택동 공산당 군대에 밀리는 대소용돌이 때였다. 태평양전쟁 승자로 동아시아에 미국이라는 거대한 해양 세력이 들어온 가운데, 소련을 정점으로 하는 공산주의 세력도 동아시아로 밀려오고 있었다. 세계사적으로 냉전이라는 거대한 갈등 구조가 형성되던 시기였다.

한반도는 일제 압제로부터 해방은 됐으나 한민족이 원치 않은 남북 분단상황이 발생해 냉전 구도 속에 그대로 갇혀 버렸다. 대한민국은 공산주의 팽창을 막아내야 하는 자유 진영의 최첨단 보루가 됐다. 초대 국방장관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국방을 설계해야 했다.

초대 국방부 장관 후보로는 광복군 출신의 원로그룹과 일본과 만주군 사관학교, 중국 군관학교 출신 등 중진이 많이 거론됐다. 결과는 철기였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초대 내각 국무총리로 지명된 철기에게 국방부 장관직을 겸임하게 했다.

왜 철기인가? 광복군 연구의 최고 전문가인 한시준 교수는 철기가 초대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된 요인으로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당시 군정사령관 존 하지 장군의 강력한 추천이라는 것이다. 독수리계획 추진 과정에서 보여준 추진력과 통찰력, 그리고 웨드마이어 장군의 통위부장 추천과 사양 과정에서의 처신 등이 그 배경이다.

둘째, 철기가 환국 후 조직한 100만 명이 넘는 단원을 보유한 민족청년단이라는 막강한 힘을 꼽았다.

세 번째, 철기가 특별한 정치조직에 가담하지 않고 순수한 청년운동에만 전념했다는 참신함이 그 배경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 추가해 30년 항일무장투쟁의 산 역사라는 절대적 후광, 초지일관한 자유민주주의 사상 견지, 그리고 상대적으로 40대라는 연부역강(年富力强)의 나이가 신생 독립국가로서 과거를 연결하면서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시대적 요구의 산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철기와 미국 장교 베스 중령. 독립기념관 제공
철기와 미국 장교 베스 중령. 독립기념관 제공



대한민국 국군사 큰 흐름에 신의 한수 

철기의 국방부 장관 취임으로 대한민국 국군사의 큰 흐름에 신의 한 수가 놓였다. 장군은 이후 사임하는 1949년 3월 21일까지 길지 않은 8개월간 초대 국방부 장관으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 국방 초석을 마련했다.

일부에서는 8개월이라는 짧은 재임 기간을 두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잘 모르는 사람의 말일 뿐이다. 초석이 잘못 깔리는 경우 시간이 지나면 집을 허물 수밖에 없다. 시작 단계의 8개월은 그 이후의 8년보다 더욱 중요한 시간이다.

그 시간에 철기는 엄청난 일들을 했다.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국군 창설, 성격과 이념, 사명 규정, 국방기구와 방위체계의 확립, 국방기조 설정, 정체성 확립과 사상 혼란의 수습, 공산주의를 이기기 위한 대비 등 모든 국방정책과 국군 운용에서 그의 경험, 철학과 사상, 그리고 리더십이 건군 과정에 녹아들어 갔다.


국군의 정통성 명확히 확립 

무엇보다 초대 국방부 장관인 철기라는 존재는 국군 정통성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가 장관으로 수행한 여러 정책은 국민과 역사의 기대대로 국군의 정통성을 명확히 확립했다. 한국군의 정통성이 독립군-광복군으로부터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당연하고 상식적인 것임에도 불구, 일부 이를 흠집내는 주장이 있다. 하나, 한국군이 미군정의 경찰 예비전력인 남조선경비대에서 출발한다는 ‘남조선경비대 모체설’이다. 하지만 이 가설은 국군이 ‘경찰 예비대’에서 출발했다는 군의 정체성과 자존심 차원에서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운 주장이다. 항일무장투쟁 정신과 역사를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국군이 당시 여러 무장단체 중 하나인 남조선경비대를 흡수한 것이라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또 다른 하나는 ‘광복군 무의미론’이다. 광복군은 불과 수백 명에 불과하고 전투다운 전투 경력이 없으므로 이를 계승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주장이다. 일제 항복 당시 광복군 규모가 불과 500여 명에 불과했다는 주장은 맞다. 그러나 광복군은 현 대한민국 헌법에도 명기된 한민족의 유일한 망명정부 조직이었던 임시정부의 군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1920년대 3600여 명에 달했던 독립군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일제 강점이 길어지고 중일전쟁 등의 여파로 항일무장투쟁이 어려움을 겪었지만 40여 년에 이르는 항일무장투쟁 상징이 독립군?광복군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광복 직전 광복군은 한미연합으로 독수리계획이라는 국내 진공을 추진하는 등 그 정신과 기개는 계속 이어졌다.

광복군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미군정청의 대나무계획에만 천착하고, 자기 조상들의 정신과 기개를 부정하는 뿌리 없는 사람에 불과하다. 북한의 선전 선동에 기인한 국민 안보의식 해이, 국군 역사에 대한 오도된 인식이 국군의 정통성을 폄훼하고 있다.


국군 정통성은 애국애족 군인정신의 근본

국군의 정통성은 군인에게는 군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과 긍지, 그리고 정신적 헌신을 가능하게 해 무형 전투력인 애국애족의 군인정신을 형성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힘이다. 군을 바라보는 국민에게는 자랑과 긍지를 느끼고 군을 아낌없이 지원하게 하는 바탕이다. 철기는 독립군-광복군-국군의 정통성을 연결하는 상징이었다. 철기는 지난 30년의 항일무장투쟁 경험과 경륜을 바탕으로 신생국가 초대 국방 수장에게 요구하는 시대적 과업을 실현하기 위해 남다른 정책 리더십을 발휘했다.

 

필자 박남수는 현 철기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장으로 육군사관학교장과 서경대학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저서 『군인 이범석을 말한다』를 통해 장군의 리더십과 군인정신을 알리고 있다.
필자 박남수는 현 철기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장으로 육군사관학교장과 서경대학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저서 『군인 이범석을 말한다』를 통해 장군의 리더십과 군인정신을 알리고 있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