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족 토벌한 문신…제주서 발견한 ‘뜻밖의 정몽주’

입력 2024. 10. 17   16:27
업데이트 2024. 10. 17   16:30
0 댓글

구보의 산보, 그때 그 곳 - 명월포, 정몽주의 족적이 남은 곳 

원에 말 보내기 위해 파견된 ‘목호’들
나라 망해도 돌아가지 않고 행패 부려
최영과 배 314척 이끌고 가 정벌
한림항·명월성지서 발자취 떠올려
가죽옷이 해질 때까지 일본에 머물며
왜구에 끌려간 백성 수백 명 구하기도

 

명월진 성곽 멀리 수평선과 한림해안의 풍력발전기가 보인다. 필자 제공
명월진 성곽 멀리 수평선과 한림해안의 풍력발전기가 보인다. 필자 제공

 


한림항은 제주도 서쪽에 위치한다. 2개의 방파제가 외파를 막아 선박들을 안전하게 지켜 준다. 제주도 서부에서 가장 큰 항구다. 일제강점기에는 어업기지로 사용됐다. 지금도 추자도에서 조업한 배들이 조기를 싣고 들어와 그물에 걸린 조기를 털어 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구보는 2018년 가을, 한림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그곳이 만만찮은 역사를 품고 있음을 알게 됐다. 포은 정몽주(1338~1392)를 재발견한 까닭이었다. 한림항에서 접한 안내판에는 “고려정부군이 이곳에 상륙해 제주 목호(牧胡·몽골족)들을 토벌했다”고 쓰여 있었다.

『고려사』를 들여다보니 공민왕 21년이던 1372년이었다. 중국에서는 1368년 한(漢)족 주원장이 몽골족의 원(元)을 무너뜨리고 명(明)을 세운 직후였다. 명 왕조가 들어서자 공민왕이 예부상서 오계남에게 명나라에 말을 바치게 함에 따라 오계남이 명의 비서감 유경원과 함께 말을 구하러 탐라에 갔는데, 탐라 목호들이 유경원과 제주목사(牧使) 겸 만호(萬戶) 이장용을 살해하는 반역을 저지르자 임금이 명에 주청해 토벌에 나섰다. 원이 이미 망했는데도 제주 목호 3000여 명이 돌아가지 않고 계속 토호 행세를 하며 횡포를 부린 까닭이었다. 총사령관 최영 장군과 부사령관 정몽주가 배 314척에 군사 2만5605명을 이끌고 전남 나주에서 출발해 제주도 서쪽 명월포(한림)로 상륙해 토벌했다(『고려사』 ‘공민왕세가’ 21년).

원은 1273년 몽골에 대항하며 탐라에 주둔해 있던 고려의 무신정권 친위부대 삼별초를 평정한 뒤 1284년부터 탐라총관부를 설치해 직접 관할했다. 말을 길러 원나라에 바치는 게 주 임무였다. 우두머리인 ‘다루가치(시정관)’는 원나라에서 파견한 몽골족이 맡고, 휘하 관원들은 제주 토착민으로 채워 탐라를 지배했다. 전형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이었다. 1000명 이상의 군대도 주둔시켰다. 행정적으로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장악하려 했던 것이다. 충렬왕 27년에 ‘돌려달라’는 요청이 받아들여져 탐라총관부는 고려가 관할하는 탐라군민만호부로 개편됐다가 원의 세력이 약화되던 공민왕 5년인 1356년에 폐쇄됐다.

그런 연후에도 목호들은 현지화돼 돌아가지 않고 제주에 눌러살고 싶어 했다(『디지털제주문화대전』). 명월포는 당시에도 큰 포구여서 삼별초나 여몽연합군도 사용했다. 구보는 한림 내륙 금악리에 목장들이 집결해 있어 말을 실어 나를 용도로 명월포구가 형성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조선 중종 때부터 명월포의 출입상황을 관리·감독하도록 1.3㎞ 둘레의 명월성을 지어 군사시설인 명월진(明月鎭)을 운영했다. 명월성지에는 지금도 성곽 일부와 성문을 지키던 옹성, 성터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유래한 명월리라는 행정구역이 존재한다. 포은도 목호 토벌 당시 항구에서 금악의 목장으로 진입하는 초입에 위치한 이곳에 진을 쳤을 터. 구보는 문신으로 알았던 정몽주가 토벌대에 참가했다는 사실에 눈길이 갔다. 원이 망한 후에도 탐라도호부 소속 몽골족이 철수하지 않은 채 말을 기르고 살았다는 사실도 처음 접했다.

 

 

명월산성 전경.
명월산성 전경.


구보는 그전에도 포은과 관련된 기록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1994년 중국 남쪽 창(長)강 변 양저우(揚州)에서다. 양저우는 당송(唐宋) 시절의 인문지로서, 특히 이백이 머물며 시를 지은 공간으로 유명하다. 이백이 “양저우가 달 구경하기에 좋다”고 말한 것이 산이라곤 없는 평지였기 때문이었음을 확인한 여행길이었다. 일찍이 신라시대의 천재 최치원이 유학생 신분으로 과거에 급제해 현령을 지낸 고장도 이곳에 있었다. 그 정도는 진즉 알고 있었던 사실이나 포은이 5번이나 양저우를 방문했다는 기록은 금시초문이었다. 새로 들어선 명 왕조의 수도 남경이 이곳 언저리에 있었던 까닭이다. 교통편이 원활치 않던 시기에 포은의 노고를 확인하던 순간이었다. 1372년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남경을 다녀오던 길에 풍랑으로 배가 뒤집혀 13일간 사경을 헤매다가 구조선에 구출돼 이듬해에 귀국하기도 했다(『고려사』 ‘공민왕세기’ 21년).

구보는 당시 포은이 이용했던 교통로가 어디였을까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뱃길이었다. 고려 수도 개성에서 가까운 예성강의 벽란도에서 배를 타면 보름 정도 걸려 중국 남쪽의 강소성 해안에 닿았다(『송사(宋史)』). 송(宋·960~1279) 왕조 때부터 벽란도는 중국 남쪽으로 가던 고려의 외항이었다. 사대하느라 강의 이름도 ‘예성(禮成)’이라고 불렀다. 구보는 역사교육이 지금껏 조선사에 치중돼 있는 탓에 고려사를 배운 적이 없어 두 사례 다 생소하기만 했다.

외교관으로서 포은의 활약은 왜(倭)와의 교섭사에도 기록됐다.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이 잦아지자 1377년 화친을 맺으려 위험을 무릅쓰고 규슈(九州)로 건너가 이듬해 7월까지 협상을 벌여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고려사』 ‘우왕세가’ 3년). 당시 일본에서 지은 시가 전한다. “갖옷 해지도록 뜻을 펴지 못했으니/세 치 혀를 소진에 견주기 부끄러워라/(중략) 만 리 길 멀리 왔는데 돌아가는 배 없으니/아득한 푸른 바다 소식 전할 길 없네.”

이 시는 정희득(1575~1640)이 일본에서 우연히 포은의 시(詩)를 보고 감동해 저서 『월봉해상록』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정희득은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인목대비 폐위에 반대하다가 전남 함평에 낙향해 있던 중 정유재란 기간인 1597년 왜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1599년 탈출해 대마도를 거쳐 부산포로 돌아온 바 있다. 포은은 일본 체류가 길어지면서 오언과 칠언을 합해 모두 13수, 96구(句)의 시를 남겼다.

경북 영천 출신인 포은은 1360년 문과에 장원급제, 예문관으로 출사해 여러 방면에서 업적을 냈다. 1363년 문신이면서도 동북면도지휘사의 종사관으로 종군해 이성계와 함께 여진 토벌에 참가했다. 그 무렵 일기 시작한 한족의 부흥 기미를 파악해 친명정책을 주장했을 만큼 국제정세에 밝았다. 고려 사회가 혼탁했지만, 체제를 뒤집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개혁을 하려 했다. 그는 조준·남은·정도전 등이 이성계를 추대해 역성혁명을 꾀하려는 것을 알고, 이성계가 낙마해 병석에 누운 틈을 타 그 일파를 제거하려다가 이를 눈치챈 이방원에 의해 개성 선죽교에서 격살됐다(『태조실록』 1년 7월 28·30일).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