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는 화폭에 한숨은 여백에...삶, 그림 같구나

입력 2024. 10. 17   15:41
업데이트 2024. 10. 17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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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 예술 
옛 그림으로 떠나는 여행 ⑮ 무관에서 어진화사로, 채용신의 ‘평생도’ 

다양한 계층 붓에 담은 초상화로 유명 
채용신 생애로 꾸민 자전적 그림 열 폭
회갑연 기념해 그린 ‘인생 성공 드라마’
늦은 과거급제·명성 반비례한 형편 등
화려한 병풍 뒤 좌절·고통의 순간 짐작

채용신의 ‘평생도’(각 83.0×31.9㎝, 비단에 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고 이건희 회장 유족 기증).
채용신의 ‘평생도’(각 83.0×31.9㎝, 비단에 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고 이건희 회장 유족 기증).



어느 날 삶을 돌아보는 순간이 덜컥 다가왔다. 만약 누군가 당신의 인생을 열 장면으로 압축해 보라고 한다면 무엇을 얘기할까? 아마도 행복을 X축으로, 슬픔을 Y축으로 설정한 그래프의 최고점과 최저점을 넘나드는 몇몇 순간이 떠오를 터. 여기 열 폭의 병풍이 있다.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1850~1941)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았다. 채용신은 근대기에 초상화로 아주 유명한 화가였다. 고종부터 왕실 가족, 조선의 고위 관리, 최익현(崔益鉉)과 항일지사, 일본인 관리, 일반인, 여성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채용신의 붓끝에 담겼다.

채용신의 이야기는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공감할 만하다. 그림의 첫 폭부터 마지막 열 폭까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한양의 삼청동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집이 가난해 낮에는 남산에서 나무를 하고 밤에 공부했다. 소년의 총명함은 멀리 소문나 완산(完山·전북 전주시의 옛 지명)의 한 집에서 사위로 삼았다. 서른일곱이 되던 해 무과에 급제했다. 수군첨사가 돼 수군을 지휘했다. 이어 임금의 어진을 그리는 화가로 발탁됐다. 왕이 벼슬을 내려 경북 칠곡(漆谷) 군수, 정산(定山·충남 청양군) 군수가 돼 백성을 잘 보살폈다. 이후 장수해 아내와 회갑연을 맞았다.

이런 내용의 그림을 ‘평생도(平生圖)’라고 한다. ‘평생도’는 대개 사대부를 주인공으로 그들이 바라는 소망을 한 폭씩 나열해 보여 준다. 병풍에는 한 폭씩 출생을 시작으로 공부, 혼례, 과거 급제, 관직 임명, 회갑연 및 회혼례 등의 내용으로 꾸민다. 건강과 장수, 명예, 다산과 관계된 내용으로 보편적인 삶의 소망을 그림으로 담았다.



1폭 입학도 부분 확대(왼쪽). 5폭 사어용도 부분 확대.
1폭 입학도 부분 확대(왼쪽). 5폭 사어용도 부분 확대.



관리이자 화가였던 채용신의 ‘평생도’는 이보다 좀 더 자전적이다. 그림의 첫 폭에는 채용신이 살던 삼청동에서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우는 모습을 그렸다. 한양 도성의 성곽도 표현하고, 삼청동의 우물 이름인 ‘형제정(성제우물)’도 적어 뒀다. 여염집의 장독대에 거꾸로 붙여 놓은 흰색 버선 모양 종이와 마당의 개 한 마리가 정겹다. 집 앞으로 삼청동천과 다리가 있어 조선 후기 삼청동의 모습을 보여 준다.

1886년 채용신은 채동신(蔡東臣)이란 이름으로 무과에 급제했다. 서른일곱에 처음 종9품 소모별장(召募別將·군사를 모집하는 군관)으로 시작해 1890년 귀산(龜山·경남 창원)의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에 임명돼 4년간 근무했다. 현재 흑백사진으로만 전하는 군복을 입은 채용신의 자화상이 있다. ‘수군첨절제사 채용신 44세상’으로 당시 채용신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흑백사진이지만 얼굴의 세밀한 표현, 관복 묘사가 치밀하다. 관직에 있으면서도 꾸준히 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병풍의 4번째 면은 수군첨사로 수군을 훈련하는 내용이다.

바다에 2척의 판옥선이 가운데 있고, 전선들이 그 주변을 동그랗게 진을 쳤다. 모의훈련으로 추정되는데, 아래에서 다가오는 배가 적선이고 적선을 향해 포수들이 총을 쏘고 있다. 배마다 깃발 색이 다르고 노를 젓는 군사는 흰색, 외진에 있는 포수는 파란색 옷을 입고 있어 훈련현장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채용신은 판옥선 중심에 의관을 정제하고 이 훈련을 지휘 중이다.


병풍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5폭은 채용신이 궁궐에서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했던 시절인 1900년, 뜻밖에 고종의 부름을 받는다. 당시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했다. 이에 황실과 관련한 여러 사업을 벌였는데, 여기엔 태조의 어진을 다시 그리는 일도 포함됐다. 채용신은 51세의 나이로 당대 제일의 도화서 화원인 조석진(趙錫晋·1853~1920)과 함께 어진의 얼굴을 그리는 주관화사로 참여한다.

 

채용신 초상
채용신 초상



화면에는 이러한 순간이 잘 묘사돼 있다. 공간의 배경은 현재 덕수궁(경운궁)이다. 궁궐 밖에는 정동 주변의 아라사(鵝羅斯·러시아), 영국, 법국(法國·프랑스)의 국기와 공사관을 그려 넣었다. 영국은 국기의 모습이 달라 언뜻 보면 미국 국기를 잘못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덕수궁 흥덕전에서 태조의 어진을 모사 중인 주인공 채용신이 보인다. 그 옆에 황제(고종)와 황태자(순종)가 이를 바라보며 서 있고, 만조백관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건물 밖에는 전통 무관의 복장을 한 관리와 제복을 입고 칼을 찬 양장을 입은 관리들이 함께 서 있다. 문밖에는 황제와 황태자를 모셔 갈 의장기와 의장대, 가마와 가마꾼들이 한담을 나누고 있다. 주변으로 의장대를 호위할 군인들이 총을 모아 놓고, 대열을 지어 쉬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안타깝게도 채용신이 당시 그린 태조 어진은 화재로 현재는 절반만 남아 있다. 이후 채용신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관직을 받고, 종2품으로 관직 생활을 마무리했다.

채용신은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낙향해 전북 익산시 금마면에서 공방을 운영하다가 1923년 무렵 익산에 가족들과 함께 ‘채석강도화소(蔡石江圖畵所)’라는 공방을 열어 그림 주문을 받았다. 이 병풍은 아마도 회갑연을 기념해 채용신과 아들, 손주가 함께 그리지 않았을까 추정해 본다.

채용신의 ‘평생도’는 무관에서 어진화사로, 다시 정3품의 군수로 변신한 인생 성공 드라마를 보여 준다. 그림을 보다가 드문드문 빠진 이야기를 찾아본다. 아마도 그림에 담지 못한 좌절과 고통의 순간이 더 많았을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서른일곱의 늦은 과거 급제, 종9품으로 시작한 출세의 어려움,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해 그림으로 생활했던 이유, 조선의 관리로서 나라가 망한 비분강개, 유명세와 반비례했던 생활 형편 등이 그림에 숨어 있다. 역시 대가들은 그만큼의 고통을 딛고 기록으로 남는다.


필자 한세현은 서울디자인재단 DDP 전시팀에서 전시 기획 및 교육 운영을 담당했다. 현재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으며 국가유산청 문화유산감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필자 한세현은 서울디자인재단 DDP 전시팀에서 전시 기획 및 교육 운영을 담당했다. 현재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으며 국가유산청 문화유산감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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