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형 기자의 ‘펜 들고 세계 속으로’ 25 - 2008년 이라크 자이툰부대 철수<4>
모래바람 휘몰아치는 버지니아 캠프
야전침대 2개…70인용 막사서 생활
숙박·식사 등 시설 생각 이상 쾌적
군용물자 대부분 슈아이바항서 수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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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버지니아 캠프에서는 70인용 막사에 머물렀다. 처음에는 24인용 막사로 숙소를 배정 받았는데, 곧바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24인용에는 전기 콘센트가 없어 컴퓨터를 끼고 사는 직업상 어쩔 수 없었다.
막사에는 개인당 야전침대가 2개씩 할당됐다. 하나는 짐을 두는 용도로, 다른 하나는 잠자는 용도였다. 막사 환경은 생각 이상으로 쾌적했다. 대신 잠잘 때는 좋지 않았다. 막사 한쪽에 설치된 발전기 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다. 한밤중에 화장실 간다고 한 사람이 일어나면, 저벅저벅 소리에 다들 잠이 깼다. 참고로 막사 소등 시간은 밤 11시, 점등 시간은 새벽 5시였다.
우리 장병 1명이 버지니아 캠프에 머무는 데 드는 비용은 하루 53.85달러. 숙박과 3끼 식사, 시설이용료가 포함된 가격이다. 정산은 나중에 국방부에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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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D-FAC)은 숙소에서 도보로 20여 분 거리였다. 식당 앞에는 ‘Clear All Weapons’라고 쓰여 있었다. 총을 지녔으면 식당에 들어가기 전 총구를 저 안에 대고 발사해야 한다. 혹시라도 장전된 총탄으로 인해 일어날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여러 종류의 음식을 푸짐하게 먹고, 아이스크림으로 후식을 즐기고,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당구·탁구·영화도 즐겼으니 53달러 이상은 충분히 뽑은 듯하다.
불편함도 있었다. 버지니아 캠프의 둘레는 약 12㎞인데, 수시로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사막이라 야외활동이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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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전까지 버지니아 캠프에 머무른 기간은 6일이었고, 외부에 나갈 기회가 3번 있었다. 다이만부대장 주관 만찬(13일), 슈아이바항 견학과 주쿠웨이트 대사 주관 만찬(14일), 현지 교민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방문(15일)이 그것이다.
슈아이바항은 버지니아 캠프에서 남동쪽으로 2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다. 미국·영국·호주 등 이라크에 주둔 중인 다국적군이 사용하는 장비 가운데 해상으로 수송하는 것은 모두 이곳을 거친다. 공항을 통해 들여오기도 하지만, 해상수송이 압도적이다. 우리 군용물자도 여기로 들여왔고, 이곳을 통해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군용물자를 고국으로 재수송하는 것은 적성 국가가 좋지 않은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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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찾아간 주쿠웨이트 대사관에서는 문영한 대사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줬다. 문 대사는 육군 장성 출신이다. 2005년 방문 땐 송근호 예비역 해군중장이 대사였다. 왠지 모르게 정겨웠던 건 두 분이 군 출신이었기 때문이리라.
다음 날 게스트하우스에서 확인한 현지 물가에 깜짝 놀랐다. 3성급 호텔이 1박에 300달러 이상이란다. 4층 건물인 게스트하우스는 1박에 110달러. 이로 인해 아는 사람들은 이곳을 이용한다고 한다.
만찬 덕분에 귀국 후 먹으려고 했던 것은 웬만큼 해결했다. 회, 보쌈, 잡채, 갈비 등 잔칫집 저리가라였다. 다만 평을 하자면 민간인 게스트하우스의 음식이 조금 더 입맛에 맞았다. 대사관저의 만찬이 ‘멋’이라면, 게스트하우스는 ‘맛’이라는 표현이 좋을 듯.
18일 드디어 출발하는 날이 왔다. 한국까지는 8시간30분 거리다. 전세기는 처음인데, 좌석도 비즈니스로 배려해줬다. 매번 이코노미석만 이용했는데, 비즈니스석이라니.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졌다.
19일 오전 6시50분, 경기도 성남시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전세기의 바퀴가 지면에 닿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오더니 기내 전체로 퍼졌다. 너도나도 싱글벙글.
전세기 문을 열고 내리기 전 양해를 구했다. 우리가 먼저 내려 역사적인 귀국 현장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그래서 D일보 기자, 촬영을 맡은 공보장교와 함께 맨 앞에 섰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졌다. 언론매체 기자들이 기수단을 필두로 장병들이 내려오는 줄 알고 촬영한 것이다. 트랩 아래에는 국방부 장관과 합참의장, 육·해·공군 참모총장 등 군 주요 직위자들이 환영하러 나와 있었다. 그들 모두가 놀랐으리라. 파병 장병들인 줄 알았는데 웬 ‘듣보잡’들이 갑자기 나타나다니.
바로 뒤에 기수단이 있어 전세기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방법은 단 하나. 고개와 허리를 숙이고 재빠르게 트랩을 내려와 사라지는 것. 장병들이 고국 땅에 발을 디디는 모습을 최초로 촬영하겠다는 꿈은 저 멀리 날아갔다.
사실 자이툰부대는 첫 파병 때 극심한 ‘반대’ 여론에 의해 출병식과 환송식이 비공개로 진행됐다. 출국도 비밀리에 했다. 그런 생각에 먼저 내리겠다고 한 것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환영 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
시간이 흘러 조금 한산해지자 우리는 다시 전세기에 올라 짐을 챙겨 내려왔다. 그리고 서로 수고했다는 인사와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나는 사무실로, D일보 기자는 로밍폰을 반납하러 인천국제공항으로(지금처럼 휴대전화를 껐다 켜면 바로 로밍이 되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공보장교들은 해단식 장소로.
그런데 사무실로 가려니 막막했다. 당시는 교통편이 발달하지 않았다. 양손에 짐을 가득 챙기고 드문드문 지나가는 택시라도 잡아야 하나 고민하던 참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지원차 서울공항에 온 공군 공보장교를 만난 것. 덕분에 용산까지 편히 올 수 있었다. 그가 베푼 이러저러한 덕이 쌓여 나중에 공군 정훈공보실장을 지냈다고 하면 너무 과장이려나?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있다. 이라크 출입국과 관련해서다. 자이툰부대에 갈 때는 이라크 에르빌에서 정식으로 입국 절차를 밟았다. 하지만 나올 때는 군 수송기를 이용해 쿠웨이트로 왔다. 쿠웨이트에서는 전세기로 귀국했다. 쿠웨이트는 공식적인 입출국 기록 없이 왔다 갔지만, 이라크는 입국 기록만 있다. 그래서 난 아직도 이라크에 머무는 것으로 되어 있지 않을는지. 만약 이라크에 다시 간다면 문제없이 들어갈 수 있을까?
다음 주는 싱가포르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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