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빛 아우라 핏빛을 녹이다

입력 2024. 10. 08   16:54
업데이트 2024. 10. 09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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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현의 페르소나 - ‘지옥에서 온 판사’의 박신혜, 러블리한 악마 캐릭터의 탄생

10대부터 쌓은 내공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
월드투어 팬미팅 첫 국내 여배우 자리매김
특유의 건강함이 주는 매력이 더해지면서
악마조차 발랄하게 느껴지는 변주 만들어
故 김영애 “신혜는 땅을 딛고 서있는 아이”
건강한 에너지로 판타지물에 현실감 부여

 

 


“이게 진짜 재판이야.” SBS 금토드라마 ‘지옥에서 온 판사’에서 강빛나(박신혜)는 지옥에 가는 게 마땅한 가해자들을 처단하며 그렇게 말한다. 그는 지옥에서 온 악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사망한 판사 강빛나의 몸으로 들어왔다. 지옥의 총책임자인 악마 바엘(신성록)에 의해 인간세상으로 보내졌고, 죄인들을 지옥으로 보내야 하는 벌이 내려졌다. 세계관 설정부터가 현실과 거리가 있다. 지옥에, 악마에, 판사라니.

하지만 그런 이유로 지상에 내려와 판사로서 활동하게 된 악마 강빛나가 벌이는 가해자 처단은 시청자들에게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그 이유는 가해자들이 너무 잔혹한데 그들이 저지른 벌에 비해 처벌이 솜방망이인 현실 때문이다. 첫 번째 가해자로 등장한 인물은 심각한 교제 폭력을 저지르고도 300만 원의 벌금형만 받고 나와 또다시 피해자를 찾아가 끔찍한 폭행을 저지른 자다. 강빛나는 그에게 나타나 그가 피해자에게 저지른 대로 고스란히 당하며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 결국 “죽을죄를 지었다”고 말하면 “그럼 죽어”라며 지옥으로 보낸다. 보험금을 노리고 남편을 둘이나 살해한 후에도 아이까지 상습적으로 학대해 온 범죄자와 일가족을 살해한 범죄자 같은 끔찍한 사건이 드라마에 등장하고, 법망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려는 가해자들을 시원하게 처단하는 악마 판사의 모습이 보여주는 카타르시스에 시청자들은 대리만족을 느낀다.

악마가 하는 처단이라 그런지 판타지가 섞여 있지만 그래도 잔혹한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 잔혹함이 자칫 지나친 폭력성과 자극으로만 느껴지지 않게 해주는 주인공이 바로 박신혜다. 그는 ‘러블리’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배우이니 말이다.

 

 

 

 

‘천국의 계단’에서 여주인공 한정서 아역으로 연기를 시작한 박신혜는 그 후에도 주말드라마 ‘깍두기’ ‘미남이시네요’ ‘넌 내게 반했어’ ‘상속자들’ ‘피노키오’ ‘닥터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그리고 최근에 방영된 ‘닥터 슬럼프’까지 러블리한 여성 캐릭터를 주로 맡아 왔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러블리한 아우라의 원천은 건강한 에너지다. 과거 드라마 ‘닥터스’를 함께한 고 김영애 선생님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박신혜를 두고 한 말이 그 단서를 알려준다. “신혜는 발이 땅을 딛고 서 있는 아이 같아요. 땅을 튼튼하게 짚고 서 있는 참 밝고 건강한 아이. 이쪽 일을 하다 보면 땅에서 붕 떠 있는 아이들이 많은데 신혜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좋은 배우가 될 것 같고, 좋은 여자, 좋은 엄마가 될 수 있겠다 싶었어요. 함께 호흡을 맞추는 게 예뻤어요.” 

발을 땅에 딛고 서 있는 아이 같은 건강함에서 나오는 러블리함. 그런데 그 러블리함은 지옥에서 온 판사 같은 하늘에 붕붕 띄워진 캐릭터에서도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눈빛이 악마로 변할 때는 섬뜩한 면을 주지만, 처단하는 모습에서는 마치 천진한 아이 같은 깨발랄함이 느껴지니 말이다. 건강하고 발랄한 러블리한 면모가 있어 자칫 과도한 잔혹함으로 흐를 수 있는 장면들이 중화된다. 박신혜라는 배우가 지닌 힘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박신혜는 애초부터 이 길을 꿈꾼 배우가 아니었다. 그의 데뷔 과정을 보면 독특한 면이 있는데, 잘 알려진 이승환과의 인연이 그것이다. 독실한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다니던 교회에 이승환 팬인 선생님들이 많았다. 어느 날 박신혜의 사진을 당시 이승환이 운영하는 회사 드림팩토리클럽(지금은 이승환 1인 회사)에서 공고한 뮤직비디오 배우 오디션에 보낸 게 이 길로 들어선 계기가 됐다. 당시 오디션에서 떨어졌지만 다음 앨범인 이승환의 ‘꽃’ 뮤직비디오에 발탁됐다. 박신혜의 본래 꿈은 가수였지만 노래를 표현하기 위해 연기 수업을 받던 중 배우가 더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천국의 계단’ 아역 오디션을 보면서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이승환의 드림팩토리가 어려워져 문을 닫으면서 박신혜는 다른 회사로 옮겨가게 됐지만 그때의 경험은 아마도 밴드 이야기를 소재로 담은 ‘미남이시네요’에서도 좋은 자양분이 됐을 것이다. 박신혜가 남장여자 고미남 캐릭터로 나온 이 작품은 일본에서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고, 작품에 함께 출연한 정용화와 ‘넌 내게 반했어’를 이어서 한 계기가 됐다. 남장여자 캐릭터로서 남자들 사이에서 털털한 모습을 연기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박신혜 특유의 건강한 러블리함으로 그들 사이에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김은숙 작가의 ‘상속자들’을 하면서 그는 드디어 ‘한류퀸’으로 떠올랐다. 미국, 중국, 일본은 물론 아시아권까지 월드투어 팬미팅을 한 첫 번째 국내 여자 배우가 됐다.

 

 

드라마 ‘지옥에서 온 판사’ 제작발표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배우 박신혜. 연합뉴스
드라마 ‘지옥에서 온 판사’ 제작발표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배우 박신혜. 연합뉴스



이제 겨우 30대지만 10대부터 연기해 온 박신혜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역할을 소화했다. 멜로를 기반으로 하는 작품이 많았지만 ‘피노키오’ ‘닥터스’처럼 전문직 장르물도 소화했고, 게임과 현실이 오버랩되는 독특한 세계관을 가진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는 실제 전직 기타리스트인 호스텔 주인과 게임 속 신비로운 NPC 캐릭터 엠마의 1인2역을 연기했다. 어려서부터 무용, 서핑 같은 다양한 스포츠를 해왔던 그는 액션 연기도 잘 소화해 ‘#살아있다’ 같은 좀비 영화나 ‘콜’ 같은 액션이 많은 스릴러, ‘시지프스: the myth’ 같은 SF 판타지에서도 이물감 없는 연기를 펼쳤다. 

‘지옥에서 온 판사’가 큰 인기를 끄는 건 이 작품의 강빛나 캐릭터가 지닌 전복적인 요소들이 그 자체로 반전의 카타르시스를 주기 때문이다. 대부분 범죄물에서 여성들이 피해자로 등장하고 심지어 그 피해자가 당한 범죄 판결도 주로 남성 판사들이 함으로써 억울한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 작품은 이러한 성별 구도를 뒤집어 놨다. 여성이 늘 당하기만 하는 피해자가 아니라 처단자 역할을 보여줌으로써 이 인물 자체의 매력도 커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박신혜가 지닌 특유의 건강함이 주는 매력이 더해짐으로써 악마조차 발랄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변주가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김영애 선생님이 표현한 것처럼 그 건강함은 허공으로 붕붕 띄워지는 상황 속에서도 굳건히 땅에 발을 딛고 있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현실감을 잃지 않는 건강함, 이건 박신혜만이 아닌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필자 정덕현은 대중문화평론가로 기고·방송·강연을 통해 대중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MBC·JTBC 시청자위원을 역임했고 백상예술대상·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필자 정덕현은 대중문화평론가로 기고·방송·강연을 통해 대중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MBC·JTBC 시청자위원을 역임했고 백상예술대상·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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