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해서 욱해서…탐욕의 구멍으로 국력이 샌다

입력 2024. 09. 27   16:02
업데이트 2024. 09. 27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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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스파이 전성시대

해외유출 기술 대한민국 주력 산업에 집중 반도체 조선 디스플레이 등이 78% 달해 
고액 연봉으로 유혹해 핵심 기술 익힌 후 토사구팽 공익 우선하도록 보안교육 강화해야


독일 베를린의 스파이 뮤지엄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스파이 활동의 흔적으로 기원전 15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제조된 도자기 그림이 전시돼 있다. 기술유출 방지를 위해 제조기법을 암호화한 설형문자 문양으로 그려 넣었다고 한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병법서에 간첩 활용법을 상세히 기술한 손자병법이 기원전 500년경의 기록이라고 하니 적어도 역사적 유물로는 군사 분야보다 산업 부문에서 스파이 활동이 먼저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근대에 이르러 18세기에는 앞선 기술을 보유한 영국이 숙련기술자의 해외 이주를 금지하는 등 산업보안에 힘쓴 반면 프랑스는 영국의 유리와 철강 기술을 빼내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예산을 편성했다. 스페인은 장교들을 산업스파이로 육성해 금속공학과 대포 제조기술을 수집했다. 

영국이 그토록 보호하고자 했던 방적기 제조기술도 젊은 기술자의 이민에 의해 당시 적성국이던 미국으로 빠져나가 미국 산업 발전의 기반이 됐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21세기에는 경제적, 재정적 첩보활동이 증가하고 기업은 스파이의 온상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 정보화시대를 예측한 그가 산업스파이 전성시대를 예측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모든 정보가 디지털화되는 정보화시대 특성이 휴대용 저장장치와 인터넷 등을 통해 정보 유출과 전달을 극도로 용이하게 했기 때문이다.

기술 인력 숙련도가 중요하고,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설계 도면과 방대한 기술자료를 일일이 복사해 훔쳐 갈 수 없던 시절에는 5년, 10년의 기술 격차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 됐다. 최근에는 기술이 경제뿐 아니라 국가안보까지 좌우하면서 국가 간 기술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에서도 기술 탈취와 기술이전 제한 등 기술 전쟁이 가속화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미국 대통령은 방한 시 판문점과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했다. 2022년 5월 방한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첫 일정으로 삼성전자를 방문해 상징적으로 기술동맹의 중요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조선, 자동차 등 핵심 산업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춘 우리나라가 기술 우위를 지켜나가기 위해 사활적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중국의 기술탈취 전략과 인재 유출

지난 10일 삼성전자 전직 임직원이 삼성전자의 반도체 핵심기술을 빼돌려 중국 지방정부와 합작으로 현지 공장을 설립한 사실이 경찰에 적발돼 관련자들이 구속 송치됐다. 그들은 2020년 9월 중국 청두시로부터 4600억 원을 투자받고, 삼성전자 수석연구원 등 기술 인력을 대거 영입해 2021년 12월 회사를 설립했다. 경제적 가치가 4조3000억 원에 달하는 삼성 핵심기술을 활용해 1년3개월 만에 20나노급 D램 반도체 시제품 생산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줬다.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최종병기’라는 반도체가 산업스파이들에 의해 위기를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국정원이 최근 10년간 적발한 해외로의 기술 유출 실태를 보면 반도체, 디스플레이, 조선, 자동차, 정보통신, 2차전지, 전기전자 분야가 176건(77.8%)으로 대한민국 주력 산업에 집중돼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 분야는 LNG 선박 및 해양플랜트 제조기술 등 해외로 유출될 경우 국가안전보장 및 국민 경제에 중대한 악영향을 줄 우려가 있어 산업기술보호법에 특별히 보호돼야 할 기술로 지정된 ‘국가핵심기술’ 유출 비율이 전체 18건 중 15건으로 83.3%에 달하는 등 심각한 상황이다. 세계적인 선박 검사기관의 한국 대표가 “전 세계 어디서라도 ‘메이드 인 코리아’라고 표시됐을 때 최고 명품으로 인정받는 제품이 바로 배”라며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우리 조선기술의 자부심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다.

중국은 산업 구조상 활용도가 높은 우리 기술을 훔치는 데 진력해 왔다. 최근에는 기술자료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공정관리를 할 수 있는 기술 인력을 유치하려는 노력을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고액 연봉과 생활여건 보장 등 솔깃한 조건에 현혹돼 섣불리 해외 이직을 추진할 경우 핵심기술만 빼앗기고 토사구팽 당하거나 현지 적응 실패로 낭인이 되는 경우도 속출하고 있다. 연봉의 2배와 아파트 및 자동차, 최소 3년의 고용을 보장받고 영입된 대형 조선사 협력업체 직원이 LNG선박 핵심공정 모두를 요구하며 추가 기술탈취를 강요하는 중국 업체의 강압에 못 이겨 1년 만에 귀국한 사례도 있다. 이렇게 귀국한 기술자들은 배신자로 낙인 찍혀 재취업이 불가능해 경력을 살리지 못하고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계약 위반을 주장할 수도 있지만 자국기업 보호를 우선하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외국인이 권리를 인정받는 것은 쉽지 않다. 노벨상 수상이 기대될 정도로 유망했던 미국 나노기술 권위자였으나 중국의 천인계획(해외두뇌 유치계획)에 참여해 중국 우한이공대 나노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며 기술을 유출하다가 2020년 FBI에 체포된 하버드대 찰스 리버 교수나, 천인계획에 참여해 자율주행 기술 72건을 중국에 유출하다 2020년 국정원에 적발돼 지난 5월 대법원에서 징역 2년의 실형이 확정된 KAIST 교수 등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인생을 망친 사람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국가안보 차원의 경각심 필요

인재 유출은 규제가 어렵고, 기술 및 장비와는 달리 통제를 우회할 수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처럼 빠른 기술진보 상황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1~2년 후 기술을 전수한 뒤에는 쓸모없는 사람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무엇보다 기술인들의 자각이 중요하지만, 실태를 알리고 현실을 일깨워 주는 국가적 노력도 필요해 보인다. 국내에서 기술유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기사 내용 중 빠지지 않는 것이 솜방망이 처벌이다. 산업기술보호법이 산업기술의 국외 유출에 대해 15년 이하의 징역(국가핵심기술 3~30년)으로 비교적 엄중히 처벌하도록 하고 있음에도, 실제 실형 선고 비율은 10% 선에 그치며, 그나마 형량도 1~2년 징역형에 불과하다.

이토록 형량이 적은 것은 기술유출을 단순 재산범죄로 판단하는 경향 때문이다. 해외로의 기술 유출은 해당 기업 재산권을 침해할 뿐 아니라 관련 산업 전반의 국가 경쟁력 상실을 일으켜 국민 생존권마저 위협하는 중대한 국가안보 침해 행위로 봐야 한다. 미국의 경제스파이법(Economic Espionage Act)이 특정 요건에 해당하는 기술 유출을 간첩행위로 보는 이유다.

법원의 전문성 강화와 양형기준 정상화가 절실하다. 또한 산업스파이의 85% 이상이 전현직 직원으로, 내부자 위협이 크다는 점을 감안할 때 보안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돼야 한다. 내부 스파이의 이상 징후는 동료의 눈을 피해 가기 어렵지만, 그들이 신고하지 않는 이유는 확신 부족, 개인적 인간관계, 절차상 불편함 등으로, 이런 심리적 저항요소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이익이 우선돼야 한다는 반복적 보안교육이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민들의 기술 유출에 대한 경각심을 제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국민 모두가 산업스파이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보안대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 배정석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 겸임교수는 국가정보원에서 방첩업무를 담당했으며 현재 국제정보사학회와 한국국가정보학회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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