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면 걱정 덜었던 공간, 역사의 고단함 잊는 시간 품다

입력 2024. 09. 12   16:41
업데이트 2024. 09. 1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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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보, 그때 그 곳 - 망우리, 근심을 잊는 곳

태조가 묏자리 정하고 돌아오며
‘망우’ 언급하며 지명 비롯돼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공동묘지 
유관순·한용운 등 애국지사들 모셔
안창호 묘는 도산공원으로 이장
한때 분묘 수 4만7000여 기 달해 
추석이면 성묘객 30만 명 다녀간 곳

 

망우리에 안장된 인사들. 필자 제공
망우리에 안장된 인사들. 필자 제공

 


‘망우리’는 오랫동안 공동묘지의 대명사였다. 추석이면 성묘객으로 붐비던 곳이었다. 시작은 그냥 도로변이었다. 한양에서 관동으로 가던 시작점이었으며, 조선 왕들이 태조의 동구릉과 세조의 태릉으로 행차할 때 지나던 통로였다. 의령 남씨와 동래 정씨, 평산 신씨들이 각각 태조와 태종, 세종으로부터 토지를 하사받아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망우동지』). 망우리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일제강점기 시기였다. 공동묘지가 들어서고 철도가 놓인 것이다. 1963년 서울시로 편입되고 2022년 역사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신망우동지』).

‘망우(忘憂)’라는 이름은 “태조가 무학대사와 함께 자신의 묏자리로 구리의 건원릉터를 정한 후 돌아오는 길에 ‘이제 근심을 잊겠다’고 말한 데서 비롯됐다”고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는 전한다. 망우산 북쪽 구릉산 자락에 조성된 건원릉은 김인귀와 하륜이 천거하고 정도전이 검증한 ‘길지’였다. 태조가 귀로에 멈춰 서서 ‘망우’를 언급해 이름 지어진 ‘망우현(망우리 고개)’은 현재 서울시와 구리시의 경계를 이룬다. ‘망우’의 연원에 관한 이야기는 실록뿐만 아니라 조선 개국공신 남재 집안에서 기록한 『경이물훼』를 비롯, 망우리에 세거지를 형성했던 세 가문이 1780년 무렵 지역 역사와 지리, 풍속, 인물 등을 담아 펴낸 『망우동지』에도 담겼다. 의령 남씨 가문에서는 “동구릉은 개국공신이던 남재가 먼저 묏자리로 삼았다가 태조에게 헌상했다”고 전한다. 남씨 가문은 태조가 망우리 고개에서 건원릉을 바라보는 ‘태조망우령가행도’ 그림도 남겼다. 망우리에는 세 가문의 묘가 많다.

7호선 사가정역에서 내려 용마산을 거쳐 망우산 자락을 걷다가 구보는 익숙한 이름의 산소들을 하나씩 만난다. 유관순·지석영·오세창·한용운·김영랑·김상용·조봉암·박인환·권진규·이기붕·박마리아·송진우·임방울·차중락 등이다. 100여 년 역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다. 홍구공원 폭탄사건 배후로 검거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38년 이곳에 묻히자 일경은 그의 영향력을 감안해 1년간 조문객 동태를 감시하기도 했다. 도산은 그의 유언에 따라 아끼던 비서 유상규 옆에 묻혔다가 1973년 강남 도산공원으로 옮겨졌다. “유상규(1897~1936)는 서울의전 학생 때 3·1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했다”고 친구 이미륵이 『압록강은 흐른다』에 썼을 정도로 애국청년이었다. 요주의 인물이 되자 상해로 망명해 도산 선생과 만났다. 1925년 귀국해 대학을 마치고 의사로 활동하다가 환자의 연쇄상구균에 감염돼 요절했다. 상해임시정부에서 김구를 보좌하며 통역과 섭외, 피난처 물색 등을 맡았던 박찬익(1884~1949)의 묘도 보인다. 박찬익은 김구와 장개석 국민당총재와의 만남도 성사시킴으로써 한국인이 낙양군사학교에 입학하도록 길을 열었다.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에 유관순 열사도 함께 모셔졌다. 필자 제공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에 유관순 열사도 함께 모셔졌다. 필자 제공

 

망우리 묘역 멀리 망우동이 보인다. 필자 제공
망우리 묘역 멀리 망우동이 보인다. 필자 제공



묘비에는 시인 조지훈이 “한 조각 붉은 마음이사 백일(白日)이 비추리라”며 그림자처럼 처신했던 그를 추모했다. 걸음을 옮길수록 구보는 이곳이 품고 있는 역사적 무게에 압도됨을 느낀다. 구보는 천재 화가 이중섭(1916~1956)의 묘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가족이 굶주림에 직면하자 일본의 처가로 보낸 후 혼자 힘든 삶을 살다 간장염으로 사망했다. 구보는 묘소에서 시인 구상의 손길을 느낀다. 가족을 대신해 중섭을 장례 지내고 이곳에 묻은 벗이었다. 20세기 초 지한파였던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와 사이토 오토사쿠의 묘도 보인다. 아사카와는 도예가로서 ‘조선의 소반’과 ‘조선도자명고’를 발간했고, 독특하게도 소나무 양묘법을 개발해 광릉수목원 조성을 이끌었다. 오토사쿠는 임야소유권 개념을 심고, 식목일을 제정했으며, 포플러와 아카시를 들여왔다(『디지털구리문화대전』).

매장 문화를 고수하던 조선시대 한양 주변은 온통 묘지였다. 도성 밖 십리까지는 묘를 쓰지 못하게 금했지만, 조선 말기 접어들면서 흐지부지돼 버렸다. 19세기 말 미국공사 호러스 앨런이 “마마 자국 같다(『조선견문기』)”고 표현했을 정도로 도성 부근은 무덤 천지였다. 이태원 묘역이 가장 컸다. 남산 하얏트호텔 위아래가 제1묘지, 삼각지 국방부 청사 자리가 제2묘지, 보광동이 제3묘지였다. 제1묘지에는 이태원에 거주하던 하급 군인이 주로 묻혔다.

1912년 총독부가 지정 공동묘지 외에는 묘지를 못 쓰도록 하는 ‘묘지규칙’을 정하면서 조선은 ‘공동묘지’ 시대에 들어간다. 1913년에는 광희문 밖 신당동과 금호동 등 집단 매장지를 중심으로 ‘경성공동묘지 19개소’를 고시했다. 이후 1929년에 홍제동, 1930년에는 미아리 등에 공동묘지를 추가 조성했다. 이태원 묘역은 보광동에 모범묘지만 남긴 채 철거에 들어갔다. 묘역 위치가 광화문 총독부나 용산 관동사령부와 가까워 일본인들의 주택지로 적합했던 까닭이었다. 남산을 등에 지고 한강을 굽어보는 명소였던 환경도 작용했다. 연고 묘들이 미아리 등지로 이장을 마친 1939년, 3만7000개의 분묘가 있던 12만여 평 규모 공간에 신주택지가 들어섰다. 이 과정에서 망우리가 새 공동묘지로 조성됐다. 75만 평 규모였다. 1935년 이태원 공동묘지에 있던 무연고 조선 군인들의 2만8000여 기 분묘가 화장돼 망우리에 합장된 걸 필두로 노고산 공동묘지의 무연고 묘도 망우리로 이장됐다. 1920년 이화학당이 이태원묘지에 안장했던 유관순 열사도 1936년 무연고 망자들과 함께 망우리에 합장됐다. 이후 망우리는 저명인사들의 영면이 이어지면서 1973년에는 분묘 수가 4만7000여 기로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그 시절 추석이면 망우리공동묘지를 찾는 성묘객이 30만여 명에 달했고, 400여 명의 경찰관이 동원돼 5000여 대의 차량을 교통정리했다(『신망우동지』). 도시개발이 가속화하면서 1958년 7만3000평에 분묘 3만5000기 규모이던 미아리 묘지를 시작으로 1970년에는 망우리를 제외한 모든 공동묘지가 폐기됐다. 금호동 묘지는 1950년대 피란민의 판자촌에 잠식당했다. 망우리에도 2022년 현재 7000여 기만이 남았다.

유일한 공동묘지에 서서 구보는 이곳 지명 ‘망우’가 ‘고달픔을 모두 잊고 영면에 든다’는 뜻을 거쳐 ‘삶의 고단함을 잊고 시간을 즐기는 공간’으로 전이된 사실에서 문자가 빚어내는 인연의 힘을 감지한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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