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의 길…이름을 지우며 걷는다는 것

입력 2024. 09. 11   16:38
업데이트 2024. 09. 11   16:47
0 댓글

정덕현의 페르소나 - ‘유어 아너’로 명배우 재입증한 김명민 

무소불위 권력자의 아들 잃은 고통과 분노
억누른 감정·낮은 목소리로 긴장감 더 높여
메소드 연기에서 한 걸음 물러난 여유
‘대립각’ 손현주와 기막힌 연기 앙상블
이름 아닌 역할로 남는 배우 본보기로 우뚝

"저 작품의 그 사람이 이 작품을 했다는 게 
의심스러울 정도로 차별화하고 싶어요"



“나는 화가 안 나. 너무 아파서, 너무 슬퍼서 화가 날 겨를이 없어. 어떻게 화를 내는 건지도 기억이 안 나.”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유어 아너’에서 김강헌(김명민)은 아들이 죽었는데도 왜 화조차 내지 않느냐며 나무라는 아내에게 그렇게 말한다. 이 말은 김강헌이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이며, 앞으로 어떤 일들을 해 나갈 것인가를 잘 드러낸다. 조직 보스에서 우원그룹 대표로 우뚝 선 이 인물은 우원시(시 이름조차 회사 이름에서 따올 정도다)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자다. 손 하나 까딱하는 것으로 누군가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건 너무 쉬운 일인 그런 인물. 그런데 막상 자신의 아들이 죽자 그는 화조차 내지 않는다. 그것은 화를 내는 것이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너무나 축소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닌 분노와 고통은 그래서 보통 사람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 말 한마디에 ‘유어 아너’라는 작품이 지닌 극적 긴장감은 최고조로 올라간다. 보통 사람이 느끼는 고통 그 이상을 가진 무소불위의 존재가 앞으로 어떤 복수를 해 나갈 것인가가 그 긴장감을 무한대로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유어 아너’는 이처럼 아들의 살인범을 추적하는 무자비한 권력자 김강헌이 만들어내는 강력한 힘이 그 중요한 추진력의 한 축을 차지하는 드라마다. 다른 한 축은 그 살인을 저지른 아들의 아버지인 송판호(손현주)가 쥐었다. 세상의 존경을 받는 정의로운 판사인 송판호는 김강헌과 정반대 위치에 서서 어떻게든 아들을 살리기 위해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는다.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른다. ‘유어 아너’는 그래서 김강헌과 송판호의 부성애가 격돌하는 대치 상황을 그려 나간다. 하지만 그 열쇠는 주로 모든 걸 꿰고 있고, 심지어 송판호가 꾸미는 일들조차 쉽게 알아차리는 김강헌의 손에 쥐어진다.

김명민은 이번 김강헌 역할을 하기 위해 영화 ‘대부’를 참고했다고 한다.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하지만 누구나 긴장하며 들어야 할 것 같은 위압감이 느껴지는 ‘대부’의 돈 콜레오네(말런 브랜도)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대부’를 참고했다고 하지만 ‘유어 아너’의 극적 긴장감이 폭발력을 지니게 만든 건 김명민이 김강헌 역할을 소화하는 데 있어 ‘발산’이 아닌 ‘억압’하는 연기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김명민은 뭐든 할 수 있는 권력자가 그걸 억누를 때 극적 긴장감이 생긴다는 걸 잘 이해하고 연기했다. “그렇겠지. 쉬운 싸움이 아니겠지. 존경받던 사람이 나쁜 짓을 해야 하니까 어렵겠지. 근데, 내가 너를 죽이는 일은 쉬운 일이야. 너는 무척 어려운 일을 해야 하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을 참아야 해.” 김강헌이 송판호에게 으름장을 놓는 이 장면에서 그 역할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을 억눌러야 하는 최고 권력자, 김강헌이라는 인물이 ‘유어 아너’에서 소화해야 하는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걸 김명민은 간파했다.


 



사실 이런 연기 스타일은 기존의 김명민이 해 왔던 ‘메소드 연기’와는 조금 다르다. 김명민은 자타가 공인하는 메소드 연기의 대가다. 영화 ‘내 사랑 내곁에’에서는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종우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 50㎏에 가깝게 살을 급격히 빼고(저혈당 증세가 올 정도였다고 한다), 관련 서적을 수십 권씩 독파했으며, 그 고독을 느끼기 위해 몇 달간 사람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촬영 중 휠체어에서 쓰러지는 장면 하나를 제대로 하기 위해 몇 차례씩 다시 찍는 비하인드 영상이 공개되기도 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힘겹게 느껴질 정도였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성웅 이순신의 인간적인 고뇌까지 담아내는 연기를 선보였는데, 그것 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소설가 김훈의 『칼의 노래』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고, 이순신 연령에 맞는 목소리 톤을 미리 준비하며 연습을 반복했다고 한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에서는 “똥덩어리”라는 명대사가 완벽하게 입에 착 달라붙을 정도로 그 캐릭터에 몰입했다. ‘하얀거탑’의 장준혁에서는 성공을 향해 질주하며 거의 신경쇠약 직전에 이르는 인물 그 자체가 됐다. 그의 메소드 연기는 이처럼 완벽하게 그 인물 자체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유어 아너’에서 그는 인물 자체가 돼 빠져들기보다는 그 인물이 특정 상황에서 주는 효과를 적절히 맞춰나갔다. 김명민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왜 이런 연기의 변화를 시도했는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너무 메소드, 메소드 하니 힘들어 보이고 주변 사람들이 멀리하는 것 같아요. 요새는 쉽게 쉽게 연기하는 걸 좋아하는데 강압적으로 연기하는 게 힘들어 보일 수도 있다는 충고를 들었거든요.”

물론 그렇다고 그의 연기가 메소드에서 벗어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그의 이런 이야기는 너무 역할에 과도하게 빠져들기보다 적절한 선과 여유가 생겼다고 봐야 할 게다. 이런 여유는 당연히 연기에 있어 개인적 기량보다 중요한 앙상블에는 오히려 더 좋은 상황을 만들어낸다. ‘유어 아너’에서 대립각을 세워야 하는 손현주와의 연기 앙상블이 기막히게 맞아떨어진 건 아마도 이런 한 걸음 빠져나온 김명민의 여유에서 가능해진 게 아닐까 싶다.

“제 이름이 아니라 캐릭터만 쭉 올라오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요. 저 작품을 했던 사람이 이 작품을 했다는 게 의심 갈 정도로 캐릭터의 차별화가 확실했으면… 사람들이 제 이름을 제대로 모르고 못 알아봐도 제가 배우의 길을 제대로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하죠.”

과거 한 인물 다큐에서 김명민이 했던 ‘연기에 대한 자세’에 관한 말은 여전히 달라진 게 없다. 다만 김강헌이라는 인물을 감정을 폭발시키는 게 아니게 안으로 억누르는 연기로 더 강렬한 존재감을 만든 것처럼, 이제 그는 어떤 연기가 극에 효과를 극대화해 주는가를 정확히 간파해 가며 연기하는 여유가 생겼다. 자신의 이름이 아닌 역할로 남는 배우가 무엇인가를 이 작품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또한 하나의 작품이 잘 되기 위해서는 도드라진 한 인물이 아니라 저마다의 역할이 조화를 이룰 때라는 것 또한 그는 보여줬다. 그리고 이건 함께 무언가를 해 나가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 봐야 할 지점이 아닐 수 없다.


필자 정덕현은 대중문화평론가로 기고·방송·강연을 통해 대중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MBC·JTBC 시청자위원을 역임했고 백상예술대상·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필자 정덕현은 대중문화평론가로 기고·방송·강연을 통해 대중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MBC·JTBC 시청자위원을 역임했고 백상예술대상·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