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닿지 못한 고음, 장미 대신 가시 키웠다

입력 2024. 09. 10   17:10
업데이트 2024. 09. 10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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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스테이지 -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

막 올리자마자 호평·악평 엇갈려
방대한 원작 축약·로맨스 대신 혁명…
이성준 작곡가 특유의 ‘닥치고 함성’
배우 성대·관객 고막 대결인 듯
옥주현 ‘5단 고음’ 나무랄 데 없지만
오스칼 넘버들 딱딱하고 단조로워
고은성 ‘앙드레’ 매운 작품의 단맛
‘마담 폴리냑’ 캐릭터 가장 매력적

 

‘오스칼’ 역의 옥주현. 연합뉴스
‘오스칼’ 역의 옥주현. 연합뉴스

 


모처럼 호불호 이슈가 만만치 않다. 막을 올리자마자 호평과 악평이 서로의 진영을 향해 포를 쏘아댔다. 포연으로 눈이 매운 이 뮤지컬의 제목은 ‘베르사유의 장미’.

40대 중반 이상의 여성이라면 이케다 리요코 원작의 일본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를 잊지 못할 것이다. 이 만화가 일본에서 처음 출간된 것이 1974년이니, 무려 50년 전에 나왔다. 이 작가의 또 다른 유명작으로는 ‘올훼스의 창’이 있다.

이런 이유로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는 일본 작품일 것 같지만 한국 뮤지컬 제작사가 만들었다. 마타하리, 웃는남자, 엑스칼리버, 프리다, 베토벤에 이은 EMK뮤지컬컴퍼니의 여섯 번째 창작 뮤지컬이다. 왕용범 연출과 이성준 음악감독 명콤비가 의기투합한 작품이기도 한데, 이들은 프랑켄슈타인, 벤허 등의 작품에서 함께했다.

EMK가 야심 차게 내놓은 작품이지만 앞서 언급했듯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고 있다. 상당 부분 호불호는 취향 문제인 경우가 많다 보니, 같은 것을 놓고도 누군가는 좋아하고 누군가는 싫어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방대한 원작을 2시간30분짜리 뮤지컬로 만들다 보니 스토리의 과도한 축약은 어쩔 수 없다. 왕실을 호위하는 자르제 가문의 딸로, 아버지에 의해 남성처럼 자라 왕실 근위대 장교가 되는 오스칼과 황후 마리 앙투아네트가 원작에서는 주인공이지만, 뮤지컬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귀족 페르젠의 이야기를 아예 통째로 날려버렸다. 인물들의 관계와 로맨스를 줄이는 대신 프랑스혁명의 거대한 서사로 후반부를 휘몰아 간다.

 

 

‘오스칼’ 역의 옥주현.
‘오스칼’ 역의 옥주현.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의 한 장면. 사진=EMK뮤지컬컴퍼니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의 한 장면. 사진=EMK뮤지컬컴퍼니

 

앙드레 역의 고은성.
앙드레 역의 고은성.



마리 앙투아네트 스토리를 잘라내 버린 데에는 제작사의 고민이 더해졌을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젠의 스토리를 다룬 뮤지컬 ‘마리앙투아네트’가 이미 있는데, 이 일본 작품을 라이선스로 들여와 무대에 올린 곳이 바로 EMK다.

풍요로운 18세기 귀족 문화와 분위기를 EMK만큼 잘 살리는 곳은 없을 것이다. 의상, 조명에 웅장한 떼창까지 눈과 귀가 흐뭇하다. 작곡가 이성준의 음악은 여전하지만, 확실히 더 매워졌다. 배우마다 “노래의 난도가 너무 높다”고 하소연할 정도인데, 엄살로 들리지 않는 것은 관객의 귀에도 그렇게 들리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성준 작곡가 특유의 ‘닥치고 전방에 함성’ 넘버들이 즐비하다. 대극장에서 공연하는 뮤지컬 작품의 경우 ‘힘주는 넘버’들이 몇 개쯤 들어가 있게 마련이다. 노래가 끝날 때 주인공이 크고 길게 고음을 지르고, 음향실에서는 소리를 키우고, 주인공이 불끈 쥔 주먹을 치켜올리면서 암전이 되면, 관객들의 함성과 박수가 쏟아지게 된다.

하지만 좋아하는 음식도 끝없이 연달아 나오면 물리기 마련. ‘프랑켄슈타인’도 만만치 않았는데 ‘베르사유의 장미’는 그야말로 고음의 오마카세다. 배우들 성대와 관객들 고막의 대결 구도처럼 느껴질 정도다.

남장여인 오스칼은 원작에 비해 다소 딱딱하게 캐릭터를 만들어 놓았다는 평이 많다. 그래서일까. ‘오스칼’ 옥주현의 노래는 영 맛이 없게 들린다. 오스칼의 넘버 중에는 가문의 하인이자 친구인 앙드레를 생각하며 부르는 ‘넌 내게 주기만’이 가장 유명한데, 이 곡은 후반부에 고음에 고음을 쌓아 무려 ‘5단 고음’을 소화해야 하는 극악의 난도를 갖고 있다.

옥주현은 거대한 성량과 최고 수준의 테크니션답게 5단의 고음을 수컷 공작새의 날개처럼 화려하게 펼쳐낸다. 하지만 다른 작품, 다른 캐릭터에서와 달리 전반적으로 노래들이 딱딱하고 단조로워 귀에서 마음까지 쑥 내려가지 않는다.

여성 캐릭터 중에서는 ‘마담 폴리냑’이 가장 매력 있었다. 이 작품 최고의 빌런으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총애를 받아 권력을 쥔 인물이다. 캐릭터 자체도 드라마틱한 데다 1막의 솔로 넘버 ‘마담 드 폴리냑’이 대단히 근사하다. 리사가 ‘폴리냑’을 잘 연기했다. 개성이 강한 캐릭터를 통해 장면 하나를 통째로 장악하는 능력이 뛰어난 배우다.

고은성 ‘앙드레’도 작품 곳곳에서 맹활약한다. 씹기 쉽지 않은 작품에 단맛을 내주는 고마운 앙드레다. 처음 보았지만 ‘베르날’의 서영택도 눈길을 오래 잡았다.

EMK 특유의 작품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베르사유의 장미’는 매우 마음에 들 것이다. 모든 등장인물이 화가 잔뜩 나 있는데, 그것도 이 작품의 독특한 점이다. 그 덕분에 에너지는 무척 힘차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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