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견제 지속되자 김구에 ‘선 창설, 후 협상’ 제안

입력 2024. 09. 10   16:11
업데이트 2024. 09. 10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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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 이범석 다시알기 - 임시정부 광복군 창설에 동참

중국, 임정 군대 조직에 곱지 않은 시선
준비 마치고도 교섭 지연 시간만 흘러
1940년 9월 17일 광복군 창설 단행

40대 열정과 중국군 고위 장성 경력에
참모장 낙점 실질적 지도자 동분서주
1년여 뒤 드디어 국민당 승인 얻어내

1940년 9월 17일 광복군 창설식인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이 중국 충칭 가릉강가에 있는 가릉빈관에서 임시정부 요인들과 외국인 귀빈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출처=위키피디아
1940년 9월 17일 광복군 창설식인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이 중국 충칭 가릉강가에 있는 가릉빈관에서 임시정부 요인들과 외국인 귀빈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출처=위키피디아



1937년 중일전쟁과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세계는 바야흐로 세계전쟁이라는 대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아시아에서 일제의 아시아 지배는 눈앞에 있는 듯했다.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 병탄이 30여 년 흐른 시점이었다. 수많은 애국지사가 광복은 불가능하다고 체념하고 친일로 돌아섰거나 아니면 공산주의 대안론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도 지조 있고 통찰력 있는 애국지사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서둘러 우리 군대를 만들어 연합군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방략을 세웠다. 일제의 만주국 건설로 만주 일대에 있던 대부분 한인 독립군이 중국 내륙으로 들어온 가운데, 임시정부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을 통합한 광복군 창설을 주도했다.

특히 윤봉길 의사 의거는 장제스를 포함한 중국 국민당 지도자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객식구에서 동맹국으로 키워야겠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중국군 고위 직위를 내던지다 

철기는 중국군과 함께 톰스크에서 8개월간 억류 생활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독일 등 선진 서구 군사 문물을 견학했다. 1940년 초, 철기가 중국군 소장으로 국민당 중앙훈련단의 고위 간부로 재직하던 시기, 철기는 임시정부 요청에 당시 안락한 중국군 고위 장성 직책을 흔쾌히 내던지고 춥고 배고픈 광복군 창설에 동참했다.

그의 인생에서 고교 시절 중국 망명 결심, 중국 군관학교 졸업 후 만주행 결심, 그리고 청산리 전투 후 자유시 북행 거부 결심에 이은 네 번째 결정적 결심이었다. 애국애족 군인정신 일념이 그것들을 가능하게 했다.

광복군 창설 준비기구로 ‘광복군 창설 7인 위원회’가 조직됐다. 임시정부와 무장 독립투쟁 지도자를 대표해 김구, 박찬익, 지청천, 유동렬, 김학규, 조경한, 그리고 이범석이 여기에 합류했다.

하지만 광복군 창설에 관한 중국 국민당과의 교섭은 지지부진했다.

중국 측의 광복군 승인 지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중국 국민당 일부 지도자는 1927년 중국공산당의 광저우 봉기 시 황푸군관학교에 있던 한인들이 여기에 가담한 사실에 주목하고 한국인의 투쟁 목표가 공산주의국가 건설이라고 오해했다.

또한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이 임시정부와는 별개로 1938년 10월 독자적인 무장 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한 것이 문제였다. 중국 황푸군관학교 출신인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 군내 인맥을 바탕으로 임시정부보다 한발 빠르게 무장력을 조직했다.

이는 중국 국민당 일부의 임시정부 견제 의도와 맞물렸고, 김원봉은 광복군 정식 승인을 반대하는 장문의 서한을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 군사처에 직접 보내기도 했다.


윤봉길 의사 의거는 당시 장제스 국민당 지도부와 군부 지도자들에게 큰 충격을 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관심을 두고 지원하는 계기가 됐다. 출처=위키피디아
윤봉길 의사 의거는 당시 장제스 국민당 지도부와 군부 지도자들에게 큰 충격을 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관심을 두고 지원하는 계기가 됐다. 출처=위키피디아



전략적 통찰력과 추진력

임시정부에 합류한 철기는 능숙한 중국어와 자신의 인맥을 바탕으로 중국군 실력자를 상대로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여러 불신 요인을 해명했다. 그리고, 한국인이 중국과 동맹이 되면 발생하는 국제정치적, 군사 전략적 장점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기도 했다. 철기는 또 임시정부 지도자들에게는 중국 국민당 승인 이전이라도 먼저 창설부터 하고 보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일단 일을 저질러 놓고 봅시다. 시간은 결코 우리 편이 아닐 겁니다.”

‘선 창설, 후 협상’이라는 전략에 김구 주석이 흔쾌히 동의했다. 매사를 저질러 놓고 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국제정치에서 세계사의 흐름은 결코 우리 편이 아닌 경우가 많다고 철기는 판단했다. 우리가 지체하더라도 세계사는 그 큰 바퀴를 쉼 없이 돌린다는 것이 당시 철기의 통찰력 있는 판단이었고, 그것은 후에 일제의 조기 패망으로 증명됐다. 마침내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중국 국민당 승인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광복군 창설을 단행했다. 임시정부의 정규 군대 창건은 대단히 지난한 작업이었다. 중국 내에서의 군대 창설은 복잡한 정치문제이고, 임시정부 내에서도 주도권 다툼이 있었다. 망명정부라서 재원은 전적으로 중국 국민당에 의존해야 할 처지였다. 더욱이 자유시 참변으로 대한독립군이 무너진 상태라 모체로 할 만한 조직도 없는 상태였다.

그나마 작은 조직을 가진 의열단 출신인 김원봉은 임시정부와 생각이 달랐다. 광복 후 국군 창설 여건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강력한 의지와 추진력, 정치적·전략적 통찰력과 비전이 요구됐다.

다행히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는 새롭게 합류한 철기 이범석이 있었다. 당시 임시정부 내 무장 투쟁지도자는 대부분 60대 전후의 노쇠한 인사였다. 이 때문에 보다 정열적이고 실력 있는 실무 책임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체계적이고 다양한 군사 경력과 중국군 고위 장성 출신으로서 향후 중국 국민당과의 원활한 협조 가능성 등을 고려해 40대 초반의 철기가 참모장으로 낙점됐다. 원칙적으로 참모장이란 지휘관 지침 아래 움직이는 수석보좌관 역할이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철기는 주도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해 광복군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초창기 광복군은 중국에 산재한 한국인을 기반으로 창설 1년 이내에 최소한 3개 사단을 편성해 연합군 일원으로 참전하는 데 목표를 뒀다. 하지만 중국 측의 승인과 원조는 여전히 부진했다. 중국군은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를 우선 지원하면서, 광복군을 동맹군이 아닌 자신들의 보조군으로 예속하고자 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 위상이 양적 규모에 좌우된다고 판단하고, 인적 기반 확대를 위해 한인동포 20여만 명이 있는 화북지방을 타깃으로 사령부를 산시성 시안으로 이동시켰다. 철기는 임시정부가 머문 충칭에 잔류하면서 중국 군사위원회와 군사협정 및 지원 문제 등을 계속 협의했다.

이러한 노력은 광복군 창설 1년여 만에 빛을 봤다. 1941년 10월 31일, 드디어 중국 국민당 정부는 ‘중국 군사위원회 통할 지휘’라는 조건 아래 한국광복군을 승인했다.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를 동시에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시키고 중국군 참모총장이 직접 통제한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정책이 결정된 것은 철기의 노력과 함께 김원봉 휘하의 조선의용대 약 3분의 2 규모가 옌안의 중국공산당 산하로 들어간 사실이 결정적이었다. 중국 국민당 중앙은 한국인 무장세력을 확실히 장악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필자 박남수는 현 철기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장으로 육군사관학교장과 서경대학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저서 『군인 이범석을 말한다』를 통해 장군의 리더십과 군인정신을 알리고 있다.
필자 박남수는 현 철기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장으로 육군사관학교장과 서경대학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저서 『군인 이범석을 말한다』를 통해 장군의 리더십과 군인정신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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