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군의 날 특집] 최초의 여성 조종사이기 전에…나는 ‘애국지사’입니다

입력 2024. 09. 05   17:03
업데이트 2024. 09. 05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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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의 어머니’ 권기옥 지사 

평양 만세운동 참가했다 고초 겪고 
일제 감시 피해 1920년 중국 망명
윈난항공학교서 조종사의 길 첫발

조국 독립에 쓰일 날 기다리며
1300시간 비행기록 세우기도
임정 공군 건설계획에 힘 보태고
광복 후 국회 국방위 전문위원 활동

최초의 여성 의병 지도자 윤희순, 지청천 장군의 딸이자 광복군 최초의 여성대원 지복영, 1949년 1월 10일 입대와 동시에 중위로 임관한 공군 최초의 여군 이정희…. 구한말·일제강점기 국권 회복을 위해, 창군 초기 군 발전을 위해 힘쓴 여성들의 면면이다. 6일 여군의 날을 맞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우리 민족 최초의 여성 조종사, 임시정부 군무부 공군설계위원, 광복 후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 등으로 시대를 넘나들며 열정을 다한 인물에게 초점을 맞춰 본다. ‘하늘의 독립군’ ‘공군의 어머니’ 등으로 불리는 애국지사 권기옥의 삶을 정리했다. 최한영 기자/사진=권현 제공

 

서울 강서구 국립항공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서 있는 권기옥 지사 동상. 국방일보 DB
서울 강서구 국립항공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서 있는 권기옥 지사 동상. 국방일보 DB

 

 

1901년 1월 11일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태어난 권기옥 지사는 네 살 때 가족과 평양으로 이사했다. 어릴 때부터 독립의식이 높았던 권 지사는 1917년 9월 미국인 조종사 아트 스미스가 평양 상공에서 한 곡예비행에 매료돼 처음으로 비행사의 꿈을 품었다. 1919년에는 평양 3·1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3주 동안 유치장에 갇혔다. 이후 독립운동자금 모금, 대한민국임시정부 발행 공채 판매에도 나선 권 지사는 1919년 10월 평양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돼 3주간 고문당하고, 6개월 징역살이를 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20년 11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권 지사는 윌로스항공학교장이었던 노백린 선생을 만나 비행의 꿈을 되살렸다. 1923년 12월 중국 윈난항공학교 1기로 입학해 훈련에 매진한 그는 1924년 7월 프랑스제 ‘꼬드롱 G.3 훈련기’로 단독비행에 성공했고, 1925년 2월 졸업과 동시에 비행사 시험에 합격했다.

권 지사는 1926년 4월 군벌 펑위샹이 이끄는 중국 국민군 항공사령부 비행사가 됐다. 다시 1년 뒤에는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정부로 투신했다. 권 지사는 상하이와 난징 사이 연락·정찰비행과 비행 연습을 하며 자신의 비행술이 조국 독립에 쓰일 날을 기다렸다. 1932년 1월 상하이사변이 일어나자 권 지사도 출격했지만, 일본 비행기와 마주치지는 못했다. 1935년 중국 청년들의 공군 지원을 독려하는 선전비행 조종사로 뽑힌 그는 같은 해 조종사 생활을 마감했다. 그때까지 권 지사가 기록한 비행시간은 1300시간이었다.

권기옥 지사가 ‘꼬드롱 G.3 훈련기’에 탑승한 모습. 권 지사가 1924년 7월 안창호에게 보낸 사진이다.
권기옥 지사가 ‘꼬드롱 G.3 훈련기’에 탑승한 모습. 권 지사가 1924년 7월 안창호에게 보낸 사진이다.

 

권기옥(왼쪽 둘째) 지사가 1935년 선전비행을 준비하며 찍은 사진.
권기옥(왼쪽 둘째) 지사가 1935년 선전비행을 준비하며 찍은 사진.



1943년 3월 임시정부가 군무부 역할·기능에 공군을 명시하고, 8월 공군설계위원회 조례가 통과되자 권 지사는 군무부 공군설계위원으로 참가한다. 공군 건설계획을 본격화한 과정에 힘을 보탠 것.

고대하던 광복을 맞았지만 그는 생활고를 겪는 동포들을 돕기 위해 한동안 중국에 남아 있다가 1949년 5월 비로소 귀국했다. 이후 1955년까지 국회 국방위 전문위원으로 건군 초기 국군 예산·조직을 다뤘다. 6·25전쟁 때는 격전지를 돌며 장병들을 위문했다.

망명 시절부터 지속한 사회활동도 쉬지 않았다. 권 지사는 노년에 사재를 털어 후학을 위한 장학기금을 조성했다. 권 지사에게 장학금을 받은 학생 수는 2000년대 중반까지 150여 명에 이른다.

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권 지사는 1988년 4월 19일 생을 마감했다. 권 지사는 1968년 3월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 1971년 10월 대만 정부의 ‘중화민국 비행흉장’, 1977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1990년 독립장으로 직급 조정)을 받았다. 2003년 8월에는 국가보훈처(현 국가보훈부) 이달의 독립운동가에도 선정됐다.



인터뷰 / 권기옥 지사 아들 권현 씨 
“대쪽 같던 어머니…젊은이들이 큰 꿈 품어야 나라에 희망 있다고 믿으셨죠”

권기옥은 많은 이에게 ‘최초의 여성 전투조종사’로 기억된다. 1920년대 이후 행적을 보면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고 한다. 아들 권현 씨는 국방일보 인터뷰에서 “어머니께서는 살아 계실 때 ‘왜 나를 비행사로만 불러 줄까. 나는 애국지사인데’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전했다. 독립운동을 위한 방법으로 비행사를 택했다는 것이다. 권씨는 어머니의 호칭도 ‘권 지사’로 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가 광복회 의정부지회 사무국장을 맡은 것도 어머니의 뜻을 잇기 위해서다.

권씨에 따르면 권 지사는 숭의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8년 송죽결사대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일본의 암살 위협에도 흔들림이 없었던 강인한 정신은 평소 성격에서 기인한다는 게 권씨의 설명이다. “어머니는 평소 조용한 편이셨고, 말씀도 신중하게 하셨다. 다만 성격이 대쪽 같아 한 번 뱉은 말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내면이 강한 분이셨다.”

권 지사가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는 이유 중 하나는 전 재산을 후세를 위해 내놔서일 것이다. 권씨는 “어머니께서는 ‘젊은이들이 큰 꿈을 품고 공부하면 나라에 희망이 있다’ ‘나라가 강해지려면 학생들이 공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며 “똑똑하지만 경제적으로 힘든 학생들에게 늘 도움을 주려 하셨다”고 강조했다.

‘대한민국 여군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권 지사가 살아 있다면 여군 후배들에게 어떤 당부를 할까.

아들 권씨의 생각은 이랬다. “지금 힘들 수 있겠지만 본인들의 어깨에 있는 짐을 너무 무거워만 하지 않았으면 한다. 본인들이 입고 있는 전투복이 어머니로부터 이어지는 소중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군 복무가 향후 더 큰 도약을 위한 기반이 될 수도 있다. 매일 열심히 생활하면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글·사진=최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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