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주년 광복절 대한민국 국군의 근원을 찾아서…

입력 2024. 08. 13   17:06
업데이트 2024. 08. 27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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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되찾은 국권 흔들림 없는 軍… 이들이 뿌리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1948년 8월 15일 건군
시작은 국가 보위할 국군 창설
영웅들 희생·헌신 있었기에...

광복절. 잃었던 국권을 회복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경축하며 독립정신 계승을 통한 국가발전을 다짐하는 날이다. 현대사에서 8월 15일은 두 가지 굵직한 일이 있었다. 1945년 8월 15일엔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았고, 정확히 3년 뒤인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광복부터 정부 수립까지 가장 우선한 작업은 국가와 민족을 보위할 국군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건군(建軍) 과정에서 우리는 광복군에서 시작된 국군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건군정신과 국군이념을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작업의 중심에는 적통성을 이어받은 독립군·광복군 출신 인사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다. 독립운동부터 6·25전쟁까지 격변의 시기 국군의 기틀을 세운 위인들을 소개한다. 이원준 기자/사진=국방일보 DB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 사진. 국방일보 DB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 사진. 국방일보 DB

 

유동열
유동열


초대 통위부 장관 유동열 (1879~1950)
광복군 출신 합류 이끌어 법통 등 계승

유동열은 1940년대 광복군 참모총장을 지낸 군인이자 독립운동가다.

유동열은 190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대한제국 군인이 일본에서 교육받는 일은 흔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대한제국 파견 무관 자격으로 일본군에 종군했다. 이후 대한제국군에 복귀했지만 1907년 8월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광복 이후 유동열은 1946년 초대 통위부 장관이 됐다. 통위부는 미군정이 만든 국방부 조직이었다. 통위부 장관 전신인 치안국장과 국방사령관은 모두 미국인이었지만 한국인이 수장으로 오르면서 군 통수권이 이양됐다. 이때부터 모든 통신, 명령, 지휘, 메모 등이 한국인 참모를 통해 하달됐고, 문서 작성에 공식적으로 한글이 사용됐다.

통위부 장관 후보로는 유동열을 비롯한 광복군 출신이 주목받았다. 광복군 법통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조치였다. 유동열은 장관직을 수락하기까지 상당히 고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위 설득 끝에 ‘임시정부 법통을 국군이 계승할 수 있는 하나의 숭고한 사명’이라는 생각으로 최종 승낙했다고 한다.

유동열의 취임으로 광복군 출신의 국군 합류가 물살을 탔다. 유동열 본인도 광복군 출신을 많이 증원해 미 군정기 조선경비대를 실질적인 광복군으로 개조하려는 구상을 했다. 이러한 생각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돼 국군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초대 국방부 장관으로 광복군 출신 이범석이 임명되며 이어졌다.


지청천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1888~1957)
만주서 생도들 가르치며 독립군 양성

지청천은 1940년 9월 17일 광복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됐다. 이후 중국에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중국, 미국 등과 힘을 합쳐 일제 타도와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했다.

191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26기로 졸업한 지청천은 1919년 일어난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중국 만주로 망명길에 오른 그는 최신 군사학 서적과 군용지도를 들고 만주의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도들을 가르치는 교관 겸 교성 대장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후 광복군 총사령관 등 무장투쟁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광복이 되고나서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 이후 남은 업무 처리, 중국 내 한인 동포 보호와 임시정부 계열 인사의 생활보장 문제, 환국문제 처리, 광복군 훈련, 대중국 교섭 등 중책을 맡았다. 1946년 5월 16일 중국 현지에서 진행한 ‘광복군 복원선언’을 통해 고국으로 돌아가 새로운 국가의 군대 건설에 종사할 것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듬해 4월 개인 자격으로 조국으로 돌아왔다.

지청천은 환국 후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26개 청년단체를 통합한 대동청년단을 창설해 단장이 됐다. 제헌국회의원과 초대 무임소 장관을 역임하고 제2대 국회의원,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이범석
이범석


국군의 이념 정립 이범석 (1900~1972)
독립·광복군 맥 잇는 국군 정통성 수립

이범석은 독립군·광복군의 맥을 잇는 국군의 정통성을 수립하고, 초대 국방부 장관으로 국군 건설에 이바지했다.

1915년 중국으로 망명한 뒤 중국 운남강무당 기병과를 수석 졸업한 이범석은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 교관을 지냈다.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는 김좌진 장군과 함께 독립군을 지휘해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1940년대에는 임시정부 광복군 참모장 등을 맡아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광복 후 광복군 복원선언에 따라 광복군 500여 명을 이끌고 1946년 6월 귀국했다.

이범석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으로서 국가 발전 기틀을 마련하고 국군을 창설·육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독립군이자 광복군 출신인 이범석이 초대 국방부 장관에 임명됐다는 것은 국군의 정통성이 광복군과 그 법통에 기반한다는 상징이었다.

이범석은 취임 이후 ‘국군장병에게 보내는 훈령’을 통해 미군정 초부터 추진한 국군 건립 성격을 ‘국방군’으로 규정하고, ‘진충보국’을 실천해 국민의 군대가 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1948년 12월 1일에는 국군의 정신적 기초를 담은 ‘국군 3대 선서’를 제정했다. 전 장병이 준수해야 할 복무 신조로 민주주의 국가의 군대와 군인정신의 좌표, 국군의 사명을 강조한 강령이었다. 1950년 2월 28일에는 군인복무령을 제정, 군인복무에 관한 정신적 강령을 법제화했다. 이로써 우리 군의 건군 이념과 사명이 법령으로 정립됐다.


손원일
손원일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1909~1980)
'우리 바다 지킨다' 충무공 정신 실천

‘해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손원일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에서 해양의 중요성을 일찍 깨닫고 대한민국 해군 창설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해양 선각자다.

손원일은 독립운동으로 유명한 애국자 집안 출신이다. 그의 부친 손정도 목사는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내는 등 조국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인물이었다. 손원일은 중국 남경의 국립중앙대학 항해과를 졸업한 뒤 외국 선박회사에서 승무원으로 근무했다. ‘우리 민족이 번영할 수 있는 지름길이 바다에 있다’고 생각해 항해술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손원일은 부친 사망 소식을 듣고 뒤늦게 귀국했다가 일제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다시 중국으로 떠난 그는 무역회사 동화양행의 상해 지사장으로 근무하며 큰 성공을 거뒀다. 수입의 일부를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으로 보내는 등 항상 조국의 광복을 먼저 생각했다.

손원일은 1945년 광복이 되자 ‘우리의 바다는 우리의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해군을 건설할 동지를 규합했다. 1945년 11월 11일 해안경비를 담당할 해방병단을 창설하고, 초대 단장에 취임했는데 이것이 한국 해군의 전신이며 모체가 됐다.

1948년 8월 정부가 수립돼 해안경비대가 해군으로 편입됨에 따라 초대 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됐다. 손원일은 참모총장으로서 충무공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몸을 삼가 바치나이다”란 표어를 내걸고 장병들에게 구체적 실천 지침을 지시했다.

손원일은 1953년 6월 해군중장으로 예편한 뒤 그해 8월 제5대 국방부 장관으로 취임해 국방력 증강과 인재 양성에 공헌했다.


1945년 8월 광복군 국내 정진대와 미군 OSS 일행이 여의도 비행장을 떠나 상해로 가다 불시착한 산동성 유현 비행장에서 촬영한 기념사진. 국방일보 DB
1945년 8월 광복군 국내 정진대와 미군 OSS 일행이 여의도 비행장을 떠나 상해로 가다 불시착한 산동성 유현 비행장에서 촬영한 기념사진. 국방일보 DB

 

최용덕
최용덕


하늘의 개척자 최용덕 (1898~1969)
국군조직 개선, 공군 창설 주역

1898년 서울 성북동에서 태어난 최용덕은 일제의 국권 침탈 후 중국으로 망명했다. ‘실력으로 싸워서 우리 주권을 회복하자’는 결심으로 군문에 지원한 그는 3·1운동을 계기로 항일무장 투쟁에 앞장섰다.

1932년 일본 해군육전대와 항공부대가 상해를 침공한 당시 최용덕은 중국 국민혁명군 항공부대장으로 일본과 공중전을 벌였다. 그는 1940년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자 곧바로 합류했다. 최용덕은 비서처 업무를 관장하며 총사령 지청천을 보좌했다. 광복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온 최용덕은 공군 창설에 노력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국방부 차관에 발탁됐다. 최용덕은 이범석 장관과 함께 국군조직을 새롭게 개선하며 내실을 다졌다. 특히 국군조직법 부칙에 ‘육군에 속한 항공병은 필요한 때에 독립한 공군으로 조직할 수 있다’는 조항을 넣어 공군 창설의 근거를 마련했다. 그의 노력으로 1949년 10월 1일 공군이 창설됐다. 최용덕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공군의 작전 책임자가 돼 일선 전투를 섬세하게 지휘했다. 1952년 12월에는 2대 공군총참모장(참모총장)이 돼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공군의 모든 작전을 지휘하며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특히 제트 전투기를 도입하는 등 공군 현대화에 나서는 한편 ‘공군의 전통’ ‘공군가’ 등을 제정해 공군의 지표를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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