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그들이 온다 - 우방국 스파이 활동의 한계
한국 정부 위해 일하며 신고하지 않은
수미 테리 기소로 미 방첩행위 드러나
10년이나 미행·감청·해킹 당한 국정원
동맹관계에 기댄 안이한 활동 도마에…
한국은 같은 사례 처벌할 법 체계 없어
70년 동안 적국만 대상 간첩죄도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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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검찰, 한반도 전문가 수미 테리 기소
미국 내 한반도 문제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미 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 수미 테리 씨가 지난 7월 16일 뉴욕남부검찰청에 의해 기소됐다. 10여 년간 한국 정부를 위해 일하면서 외국대리인등록법(FARA· Foreign Agents Registration Act)에 따른 신고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혐의다. 간첩은 아니지만 “외국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미리 법무부에 등록해야 한다”는 FARA 규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1938년 나치 독일의 영향력 공작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으로, 미국 방첩에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는 FARA가 이번에도 적용된 것이다.
수미 테리는 2001년부터 미국 중앙정보국(CIA), 2008~2009년에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서 한반도 및 동아시아 전문가로 일했다. 이후에도 여러 싱크탱크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주요 언론에 한반도 관련 글을 기고하는 등 널리 알려진 한반도 안보문제 전문가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수미 테리는 2013년 8월 뉴욕 유엔 대표부 외교관 신분인 국정원 요원과 처음 접촉한 뒤 워싱턴의 한국대사관 소속 국정원 요원들과 계속 접촉하면서 한국을 위한 일을 해 왔다고 한다. 2016년 12월 중순에는 당시 새롭게 출범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안보 고위 인사들과 한국 관리들의 만남을 주선했다. 2019년 1월 15일에는 소속 싱크탱크를 통해 방미 중이던 국정원장과 미 국방부 및 전직 CIA 관리들의 모임을 개최했다.
이후 활동도 대부분 미국 주요 관리와 한국 외교관의 모임을 주선해 주거나, 한국 정부에 유리한 내용의 글을 언론에 써주는 것으로, 모든 나라가 워싱턴에서 하고 있는 외교 활동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민감한 활동으로 볼 수 있는 것은 2022년 6월 17일 국무부 건물에서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5명의 북한 전문가가 참석한 1시간에 걸친 비공개 대담을 마치고, 인근에 대기하던 국정원 직원의 차 안에서 주요 내용을 필사한 메모지 2장을 사진으로 촬영토록 한 것 정도다. 또 2022년 7월 8일 국정원 요청으로 의회 직원들과 한미동맹 관련 연구 모임을 가진 후 국정원 요원들과 함께하는 별도 식사 모임을 주선, 국정원 요원들에게 “Spot and Assess”(포섭 대상자를 물색 및 평가한다는 뜻의 정보용어)의 기회를 줬다는 혐의도 이런 범주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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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한 공작활동 vs 철저한 방첩
사건 이후 많은 국내 언론에서 국정원의 정보활동에 관한 비판이 일고 있다. 비밀정보기관의 활동이 상대국 방첩기관에 노출돼 10년간 감시당하면서도 알아채지 못하고 접촉 장면 사진, 대화내용, 오고간 문자, 고가 선물 영수증, 기부금 내역 등이 검찰 기소장에 첨부됐다는 것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외국에서 활동하는 정보요원이 지켜야 하는 신분노출 금지, 역감시 철저, 휴대전화 자제, 주재국 방첩활동 평가 등 기본 수칙이 지켜지지 않았으며, 고가의 핸드백 등 선물을 사주면서 외교관 면세 혜택을 받기 위해 신분증을 제시한 것도 문제가 있다. 다만 우리 정보요원이 러시아, 중국에서도 이런 식의 행동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면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 한미동맹이라는 양국 간 신뢰를 고려할 때 이 정도의 정보활동은 허용될 것이라는 기대가 안이한 활동의 원인이 됐을 것이다.
반면 FBI는 우방국인 우리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방첩활동을 수행해 온 것이 확인됐다. 국정원 요원이 대상자를 어디서 만나고, 무슨 음식을 먹으며, 어떤 대화를 나눴고, 무슨 선물을 사줬는지 뿐만 아니라 주고받은 문자메시지와 대화내용 등 10년간의 면밀한 감시 활동이 31장 68개 항목의 공소장에 글과 사진으로 잘 나타나 있다. 공소장 내용만으로도 그간의 감시 활동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대상자 동선의 상세한 기술과 음식점 접촉 장면의 촬영 각도 등으로 봐 밀착 미행감시가 이뤄진 것은 분명하다. 이메일과 문자로 오간 대화 내용 및 차 안에서 찍은 메모지 사진까지 입수된 것으로 봐 휴대전화 감청 및 해킹도 이뤄졌을 것이다. 2023년 1월 10일 저녁 만남에서는 국정원 요원이 ‘확장억제’와 ‘고체연료 시험성공’에 대해 설명하자 테리가 이를 받아 적었으며, 한국이 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정보도 공유한다는 ‘핵협의그룹’(NCG) 구상이 제안됐다고 하자, 이후 테리는 이런 내용을 언론에 기고했다.
공소장에는 이날 만남이 대화체로 상세히 묘사돼 있어 식당 룸에서 몰래카메라 설치 및 대화 감청이 이뤄졌을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결국 우방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상대의 방첩 수준이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한미동맹 70주년 행사 공동개최’ ‘한미동맹 의미 강조 칼럼 게재’ 등 양국 관계에 우호적인 활동까지 공소장에 포함된 것은 과도한 측면이 있다. 우방국 간 정보활동이 문제가 된 경우 물밑 접촉으로 자제를 요청하거나 경고하는 것이 관행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간첩행위도 아닌 이번 사건의 경우 미국 측 대응은 지나치다는 것이다. 또한 방첩이 늘 외교적 카드로 활용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지금은 정보활동 실패의 책임을 따지기보다는 ‘왜 지금 견제구를 날린 것인가?’ 하는 점을 고민하며, 한미관계에 문제점은 없는지 면밀하게 점검해 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방첩의 현실을 돌아봐야 할 때
이번 사건은 뉴욕타임스의 분석대로 “최근 몇 년간 수십 건의 기소로 이어진 외국의 영향력 공작에 대한 압박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2016년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이후 중국 등 외국의 영향력 공작 위협에 대응해 강화된 미국 방첩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관례대로 활동한 것이 잘못이다. 공교롭게도 검찰 공소장이 공개된 당일 미국 상원의 외교위원장이었던 거물 정치인 로버트 메넨데즈 의원이 현금과 골드바 등을 대가로 이집트를 위해 활동한 혐의와 뇌물죄 등에 대해 배심원들로부터 유죄 평결을 받았는데, 미국에서 현직 상원의원이 FARA 위반 혐의로 기소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미국이 외국의 영향력 공작에 대한 방첩에 얼마나 진심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한미 간에 정보활동이 문제 된 사건은 그리 많지 않다. 1976년 중앙정보부가 재미교포 박동선을 활용해 미국 의원들을 대상으로 로비활동을 한 ‘코리아 게이트’, 1996년 한국계 미 해군정보국 분석관이 한국대사관 해군무관에게 북한군 관련 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체포된 ‘로버트 김’ 사건이 있었다. 작년에는 미국이 한국 국가안보실 고위 관리를 감청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번 사건은 간첩 사건은 아니지만 한동안 미국 내 한국을 지원하는 관료와 학자들이 접촉을 기피할 것이고, 그만큼 대미 정보활동은 위축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미국은 대선을 앞두고 미국 내 각국 정보기관들의 활동을 억제하고, 그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미국인들을 위축시키는 방첩 효과를 거둔 셈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국에서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적용할 외국대리인등록법이 없으므로 처벌이 불가하고, 통신비밀보호법 미흡으로 휴대전화 감청도 불가능하다. 무엇보다도 간첩죄가 70년간이나 ‘적국’을 대상으로만 묶여있는 우리의 방첩 현실이 암울할 뿐이다. “우방국은 있으되 우호적인 정보기관은 없다”는 격언을 명심하고, 하루빨리 방첩 역량을 키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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