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몸처럼 싸웠다, 하나되어 지켰다

입력 2024. 07. 25   17:20
업데이트 2024. 07. 2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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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71주년·유엔군 참전의 날 기획
한국을 도운 유엔군 참전용사들

생사고락… 한몸처럼 싸웠다, 
영웅들… 하나 되어 지켰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지구 반대편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유엔군 장병들은 195만4000여 명(연인원)에 이른다. 이들의 헌신·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다. 제임스 밴플리트 부자(父子), 더글러스 맥아더, 월턴 워커 등 잘 알려진 군인들 외에 한국인이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할 참전용사는 부지기수다. 누군가는 ‘계급 강등’을 자청했고, 누군가는 스포츠 스타로서의 경력 중단을 감수했으며, 누군가는 전쟁고아를 구하기 위해 규정 위반을 무릅썼다. 6·25전쟁 정전협정 기념일이자 유엔군 참전의 날인 27일을 앞두고 한국을 도운 유엔군 참전용사들을 소개한다. 자세한 내용은 전쟁기념사업회와 국가보훈부가 올해 2월 출간한 ‘6·25전쟁 12명의 유엔군 영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한영 기자

앙리 모로 드 믈랑.
앙리 모로 드 믈랑.


벨기에 국방부 장관의 참전 - 앙리 모로 드 믈랑

벨기에 국방부 장관이었던 앙리 모로 드 믈랑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에 갈 지원병을 모집했다. 복잡한 벨기에 국내 상황 속 믈랑은 결국 장관 자리를 내려놓고 1950년 8월 편성된 한국 파병부대(제1벨기에대대)에 예비역 소령 신분으로 자원했다. 부대대장으로 다른 벨기에·룩셈부르크 자원자 700여 명과 한국에 도착한 믈랑은 영국군 29여단에 배속돼 임진각 북쪽 금굴산을 방어하고 있었다.

1951년 4월 23일 새벽, ‘4월 공세’에 나선 중공군이 대대를 포위할 때 여단 연락장교 임무를 맡았던 믈랑 소령은 미 3사단을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배속받은 전차 네 대를 직접 지휘하며 중공군을 격퇴했다. 그 덕분에 대대는 포위망을 뚫고 철수할 수 있었다. 믈랑 소령은 그해 12월 귀국할 때까지 일선에서 대대원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1953년 1월, 미국 정부는 장관으로서 벨기에군 참전을 준비하고, 파병까지 나선 그의 공훈을 기려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수여했다.


랄프 몽클라르(왼쪽) 장군이 6·25전쟁 기간에 프랑스대대를 방문한 더글러스 맥아더(오른쪽) 장군과 대화하고 있다.
랄프 몽클라르(왼쪽) 장군이 6·25전쟁 기간에 프랑스대대를 방문한 더글러스 맥아더(오른쪽) 장군과 대화하고 있다.


계급 낮춰서라도 한국으로 - 랄프 몽클라르 

6·25가 발발하자 프랑스 정부는 참전을 결정했지만, 전투부대 파병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다. 앙리 블랑 육군참모총장은 ‘현역·예비역 장병의 자원을 받아 미군 보병대대 형태로 부대를 편성한다’는 방안을 수립했고, 존경받던 군 원로인 랄프 몽클라르 중장이 부대장에 자원했다. 몽클라르 중장은 파병부대 규모와 유엔군 지휘서열에 맞춰 자신의 명목상 계급을 중령으로 낮췄다.

1950년 11월 한국에 도착한 몽클라르 장군은 58세로 비교적 고령인 데다 1차 세계대전 때 입은 부상까지 겹쳐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걸을 때 지팡이를 짚어야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최전방 참호를 일일이 둘러보고 적의 포탄이 떨어질 때도 몸을 피하지 않으며 장병들의 경외감을 자아냈다. 1951년 2월 프랑스대대가 중공군 공세를 좌절시킨 지평리전투를 전개할 때도 포위망 안에서 대대원을 독려하며 유엔군 전체의 존경을 받았다. 그해 11월 파병 기간이 끝나고 귀국한 몽클라르 장군은 프랑스 정부에 장병들이 열악한 상황에도 영웅적으로 싸우고 있음을 역설하며 인적·물적 지원을 끌어냈다.


에밀 J. 카폰 대위.
에밀 J. 카폰 대위.


최전선 두려워하지 않은 신부 - 에밀 J. 카폰 

군종장교(신부)였던 에밀 J. 카폰 대위는 미 1기병사단 8기병연대에서 복무 중이었다.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한국에 온 카폰 대위는 ‘최전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부’로 장병들의 존경을 받았다. 낙동강전투가 한창인 그해 8월 2일에는 적의 기관총 사격에 고립된 부상병을 군종병과 함께 들것에 실어 구조한 공로로 동성훈장도 받았다.

카폰 대위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사단 장병들과 함께 북진했으나, 중공군 참전으로 전세가 바뀌며 평안북도 운산에 포위됐다. 탈출을 포기한 채 부상병들을 지킨 그는 적의 포로가 됐고, 전우들을 부축하며 140㎞가 넘는 혹한의 행군 끝에 평안북도 벽동 포로수용소에 도착했다. 극심한 추위와 굶주림, 전염병으로 연일 포로들이 목숨을 잃는 가운데 카폰 대위는 손수 화장실을 만들고, 동료들의 불화를 중재하는가 하면 사망자를 위한 장례식을 주관했다.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음식을 주변에 나누고, 심지어는 목숨 걸고 적의 식량·약품을 훔치기까지 했다. 군인이자 종교인으로서 남에게 헌신하는 와중에 이질, 폐렴, 다리 혈전으로 고통받던 그는 1951년 5월 23일 향년 35세를 일기로 선종(善終)했다.

 

러셀 L. 블레이즈델.
러셀 L. 블레이즈델.


전쟁고아들의 아버지 - 러셀 L. 블레이즈델

1940년 미 육군항공대 군목사로 임관한 러셀 L. 블레이즈델 중령은 1950년 7월 한국 전선을 지키는 미 5공군사령부에 군종참모로 부임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서울에 진주한 5공군 장병들은 수많은 전쟁고아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것을 본 뒤 이들을 보살피기 시작했다. 블레이즈델 중령은 미 5공군의 고아 보호사업을 총괄했다.

1950년 12월, 중공군 공세로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5공군도 철수를 준비했다. 블레이즈델 중령은 보호하던 고아들을 후송할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인천항을 통한 해상 수송이 막히고, 중공군이 서울 북방에 이르자 블레이즈델 중령은 작전참모 터너 로저스 대령을 설득해 김포비행장에 있던 C-54 수송기 16대를 이용하기로 했다. 블레이즈델 중령은 인천에 있던 고아들을 김포로 옮기기 위해 규정 위반을 무릅쓰고 미 해병대 트럭을 징발했다. 그의 헌신 덕분에 1000명이 넘는 고아들이 김포로 이동한 다음 수송기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테드 윌리엄스.
테드 윌리엄스.


조종간 잡은 전설의 타자 - 테드 윌리엄스 

‘마지막 4할 타자’로 불리며 훗날 미국 메이저리그(MLB)의 전설이 된 테드 윌리엄스는 2차 세계대전에 이어 6·25전쟁에도 미 해병대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윌리엄스는 1952년 5월부터 1년 동안 미 해병대 311해병공격비행대대 소속으로 총 39회 출격했다. 북한 후방지역 폭격, 근접항공지원 등의 임무를 수행하던 그는 1953년 2월 16일 평양 남쪽 북한군 훈련소 폭격 중 적의 대공포탄에 손상된 기체를 조종해 동체착륙으로 귀환하기도 했다.

파병을 마치고 귀국해 바로 MLB에 복귀한 그는 야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타자이자 전쟁 영웅으로 미국인의 사랑을 받았다. 선수로서 최상의 기량을 보이던 때 두 번이나 전쟁에 참전하며 여섯 시즌을 놓쳤지만, 그는 이를 공개적으로 불평한 적이 없었다. 1966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그의 동판에는 야구선수로서 세운 수많은 기록과 함께 ‘1952~1953년 한국에서 해병대 전투기 조종사였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윌리엄 스피크먼 이병.
윌리엄 스피크먼 이병.


“한국에 묻히고 싶다” - 윌리엄 스피크먼 

영국군 스코틀랜드 국경연대 1대대 소속으로 6·25에 참전한 윌리엄 스피크먼 이병은 서부전선 임진강 방어 임무에 투입됐다. 1951년 11월 4일 스피크먼 이병을 비롯해 경기도 연천군 마량산을 방어하던 400여 대대원은 6000여 명에 달하는 중공군 공격을 받았다. 상부의 철수 명령을 받은 가운데 스피크먼 이병은 아군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용감히 싸웠다. 고지 정상으로 접근하는 중공군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보관 중이던 수류탄이 소진되자 10여 차례 후방 보급소를 오가며 전투를 이어갔다. 그의 분전을 지켜본 6명의 전우가 전투에 합류했고, 스피크먼은 혼자 100여 발의 수류탄을 던지며 중공군 공격을 격퇴했다. 이 과정에서 스피크먼은 적의 총탄에 다리와 어깨를 맞았지만 잔여 병력은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다.

스피크먼 이병의 전공은 본국에 알려졌고, 귀국 후 당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직접 빅토리아십자장(Victoria Cross)을 받았다. 빅토리아 십자장은 영국군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으로, 6·25전쟁 중 네 명에게만 수여됐다. 2015년에 방한한 그는 그동안 받은 훈장들을 전쟁기념관에 기증하며 “한국에 묻히고 싶다”고 밝혔다. 2018년 향년 91세로 별세한 그의 유해는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됐다.

사진=국가보훈부·전쟁기념관 오픈아카이브·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미 공군박물관·천주교 미국 캔자스 위치타교구 홈페이지·MLB 명예의전당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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