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에서 맛본 한 끼의 힘, 죽음의 공포·두려움 극복할 힘으로

입력 2024. 07. 25   17:10
업데이트 2024. 07. 25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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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71주년·유엔군 참전의 날 기획
육군53보병사단 부산여단 체험형 정신전력교육 현장

생면부지…낯선 땅에서 맛본 한 끼의 힘,
사생관…죽음의 공포·두려움 극복할 힘으로

부산 고찰 범어사 보제루

6·25전쟁 중 숨진
유엔군·국군 유해·위패 모시고 넋 위로
전몰 글귀·밥 한 끼에 얽힌 사연 등
현장서 보고 듣고 느끼고
정신전력 향상…전투형 강군 육성 결의

27일은 정전협정 체결 71주년이다.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국군과 유엔군은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어깨를 맞대고 싸웠다. 이 과정에서 전사한 유엔군 장병 수도 4만여 명에 이른다. 2013년, 정부는 유엔군 장병들의 희생·공헌을 기리기 위해 이날을 ‘유엔군 참전의 날’로 지정하고 매년 추모행사를 열고 있다. 70여 년 전 생면부지의 땅에서 자유를 위해 싸웠던 유엔군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이해하는 과정은 우리 군 장병들의 정신전력 강화를 돕는 좋은 교보재다. 육군53보병사단 부산여단이 실시 중인 현장 체험형 정신전력교육 현장에서 그 효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최한영 기자

 

6·25전쟁 중 범어사에서 열린 ‘유엔군 전몰장병과 순국선열 추모재’ 모습. 오른쪽 귀퉁이에 ‘유엔군 전몰’ 글귀가 선명하다. 사진 제공=김화선 금정중학교장
6·25전쟁 중 범어사에서 열린 ‘유엔군 전몰장병과 순국선열 추모재’ 모습. 오른쪽 귀퉁이에 ‘유엔군 전몰’ 글귀가 선명하다. 사진 제공=김화선 금정중학교장

 


가슴 아픈 현대사 한복판서 선배 전우들 희생 기려

지난 24일 오전, 부산여단 장병 30여 명이 부산을 대표하는 고찰, 범어사(梵魚寺)에 모였다. 해인사·통도사와 함께 ‘영남 3대 사찰’로 꼽히며 대웅전(보물 434호)과 3층 석탑(보물 250호), 일주문, 석등 등 눈여겨볼 유적이 많은 관광지이기도 한 범어사에 장병들이 모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범어사 연수국장 담산스님은 장병들을 대웅전 맞은편 보제루로 이끌었다. 지금은 예불과 법요식이 열리는, 일종의 강당 역할을 하는 보제루에 70여 년 전 유엔군과 국군의 시신이 가득했다는 설명을 듣는 장병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담산스님은 “6·25전쟁 초기 낙동강 전투에서 희생된 국군·유엔군 장병들이 범어사로 보내져 화장됐다”며 “지금이야 평화롭지만 범어사는 가슴 아픈 현대사를 품고 있는 절”이라고 설명했다.

범어사 경내 곳곳에 서린 국군·유엔군 장병들의 흔적을 더듬은 장병들은 인근 선문화관 대강당으로 향했다. 문화해설사를 자임한 김화선 금정중학교장은 공들여 확보한 각종 사진 자료들을 보이며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전했다. 1952년 6월 6일 이승만 대통령,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사령관, 각국 외교사절 등이 참석한 가운데 대웅전 앞에서 열린 ‘전국 군경 합동위령제’, 훗날 조계종 종정을 지낸 동산스님이 전사자를 위로하는 재를 올리는 사진 귀퉁이에 선명한 ‘유엔군 전몰’ 글귀, 6·25전쟁 중 범어사를 찾은 미군 2명이 동산 스님 옆에서 식사하는 모습은 장병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기복(대위) 여단 정훈과장은 “정전협정 체결 71주년을 맞아 장병들과 함께 국군과 유엔군의 구국정신이 서린 범어사를 방문한 것이 장병들의 정신전력 향상에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6·25전쟁 중 범어사를 방문한 미군 2명이 동산스님(가운데)과 국수를 먹는 모습. 사진 제공=김화선 금정중학교장
6·25전쟁 중 범어사를 방문한 미군 2명이 동산스님(가운데)과 국수를 먹는 모습. 사진 제공=김화선 금정중학교장

 

1952년 4월 6일 부산 범어사에서 열린 ‘제1회 경남 출신 전몰장병 합동추도식’ 모습. 사진 제공=김화선 금정중학교장
1952년 4월 6일 부산 범어사에서 열린 ‘제1회 경남 출신 전몰장병 합동추도식’ 모습. 사진 제공=김화선 금정중학교장

 


범어사, 밴플리트 장군 아들 등 유엔군 위패 모셔 

범어사는 6·25전쟁 당시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민을 위한 구호소이면서 국군·유엔군 장병 야전병원 역할을 했다. 범어사 스님들은 전선에서 밀려드는 시신을 화장 후 안장하는 일도 도맡았다.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과 부산 유엔기념공원이 건립되기 전까지는 전쟁 때 숨진 국군·유엔군 유해와 위패를 모시고 그 넋을 위로했다.

당시 미 8군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의 외아들 밴플리트 주니어 대위가 대표적이다. B-26 폭격기 조종사로 전쟁에 참전한 밴플리트 주니어는 북한 순천 인근을 비행하던 중 실종됐다. 실종자 수색이 길어질 조짐이 보이자 밴플리트 장군이 ‘내 아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다른 장병들을 적지에 투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중단을 명령했고, 밴플리트 주니어 대위의 위패는 다른 유엔군 장병 전사자들과 함께 범어사에 모셔졌다. 밴플리트 장군이 6·25 중에,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범어사를 찾은 이유다.

범어사에 얽힌 국군·유엔군 선배 전우들의 사연을 들은 장병들의 마음가짐도 이전과 달라진 듯했다. 윤여원 상병은 “교육을 듣고 나니 절의 크기만큼이나 이야기가 많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놀라웠다”며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국군·유엔군 선배 전우들의 헌신을 기리는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김현우 상병도 “부대 책임구역에 있는 범어사의 역사를 들으며, 보다 진중한 마음으로 남은 군 생활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덧붙였다.

장병들의 교육을 지켜본 고태호(소령·법사) 사단 군종참모도 “현장 체험형 정신전력교육을 통해 70여 년 전 국군·유엔군의 희생을 체감함으로써 장병들이 사생관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육군53보병사단 부산여단 장병들이 24일 범어사에서 열린 현장 체험형 정신전력교육 중 김화선 금정중학교장으로부터 범어사와 6·25전쟁에 얽힌 역사를 듣고 있다. 사진 = 부대제공
육군53보병사단 부산여단 장병들이 24일 범어사에서 열린 현장 체험형 정신전력교육 중 김화선 금정중학교장으로부터 범어사와 6·25전쟁에 얽힌 역사를 듣고 있다. 사진 = 부대제공

 

범어사 연수국장 담산스님으로부터 6·25전쟁 당시 국군·유엔군 장병들과 얽힌 범어사의 사연을 듣고 있는 장병들. 사진 = 부대제공
범어사 연수국장 담산스님으로부터 6·25전쟁 당시 국군·유엔군 장병들과 얽힌 범어사의 사연을 듣고 있는 장병들. 사진 = 부대제공

 


현장 체험형 정신교육 활성화 방침

여단의 움직임은 최근 육군의 전투형 강군 육성을 위한 ‘일행다득 정신전력 교육’과도 연관된다. 여단은 올해 초부터 상급부대 지침에 따라 ‘스스로 학습해 느낀 감성적 체험을 토대로 실천하는’ 지(知·깨우침)·정(情·신념화)·의(意·행동화) 개념 적용 정신전력교육을 하고 있다. 범어사 외에 인근 전·사적지를 활용한 현장 체험형 교육도 시도하는 중이다. 이 과정에서 장병들이 지키는 지역의 문화를 이해함으로써 ‘역사 문화 지킴이’ 역할도 함께 수행하자는 세부 목표도 세웠다.

박형철(대령) 여단장은 “앞으로도 부산지역 역사와 안보가 살아 숨 쉬는 호국 성지를 적극 발굴해 장병들이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체험형 정신교육을 활성화하겠다”고 전했다.




인터뷰 
‘국가현충시설’ 범어사 주지 정오 스님

올바른 역사관 심기 위해 추모관 건립 필요 그것이 후손의 도리요 의무


“6·25전쟁 당시 범어사 스님들이 매일 (전사한 국군·유엔군 장병을 위로하는) 목탁을 치고, 화장하느라 바빴다는 말을 들었다. 가슴 아픈 역사지만, 조국을 지킨 선열들의 넋을 지금 세대가 기리고 기억해야 한다.”

범어사 주지 정오스님은 “시간이 지나면서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목숨 바쳐 지키려 했던 대한민국의 소중함, 장병들의 용기를 점점 잊고 있다”며 여단 장병들의 범어사 방문 현장 체험형 정신전력교육이 지닌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가보훈부는 지난해 범어사를 국가현충시설로 지정했다. 범어사가 6·25전쟁 중 국군·유엔군 전사자 추모 위령제를 봉행하고, 순국 전몰장병 영현 안치소를 운영하는 등 국립현충원의 시원(始原·시작되는 처음) 역할을 한 것을 늦게나마 인정받은 것이다. 정오스님은 “현충시설 지정을 계기로 각종 행사 때 조국을 지키다 전사한 군인들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며 “국가의 소중함은 장병들뿐만 아니라 모두가 계속해서 자각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부산 지역에는 유엔기념공원 외에 별다른 6·25전쟁 추모시설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오스님은 범어사 인근에 추모관을 건립할 필요성도 내비쳤다. 범어사가 지닌 역사성과 국군·유엔군의 헌신을 부산시민들과 공유하는 한편 미래 세대에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추모관이 세워진다면 여단 장병들이 지금보다 나은 정신전력교육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도 들었다.

그전까지 정오스님은 여단 장병들의 정신전력교육을 할 수 있는 선에서 적극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것이 지금 시대를 사는 사람의 의무라는 말에 힘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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