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둔자·봉오동서 연패한 일제, 간도 침공 계략 수립

입력 2024. 07. 16   15:40
업데이트 2024. 07. 1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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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 이범석 다시알기
항일무장투쟁의 백미 ‘청산리전역’ 배경

중국영토 진입 명분 만들려 자작극
마적단 시켜 영사관 습격 부녀자 살해
자국민 보호 구실로 대병력 만주 출격
한인독립군부대, 백두산 일대로 피신
조직 편성·무장 미비한 채 청산리로
북로군정서, 다행히 체코군단 만나
다량의 무기·탄약 사들여 전투력 보강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이던 20대 청년 시절의 철기 이범석. 필자 제공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이던 20대 청년 시절의 철기 이범석. 필자 제공



상해임시정부, 1920년을 항일독립투쟁 원년으로 선포하다

청산리전역이란 1920년 10월 21~26일 6일간 간도 청산리 일대에서, 주로 북로군정서가 일제 ‘간도침공부대’와 벌인 10여 차례의 전투를 묶은 것을 말한다. 1920년대 들어서면서 일제는 한반도 강제 병탄 후 만주와 몽골 지역으로 소위 그들의 ‘생명적 이익권’ 확장을 위해 혈안이 됐다. 당시 중국 동삼성 실력자였던 장쭤린은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 비밀리에 일제와의 야합을 모색하고 있었다. 한편 3·1운동 발발과 상해임시정부 출범 이듬해인 1920년, 임시정부는 이 해를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했다. 만주 일대 한인독립군부대를 임시정부 지도하에 재편하는 등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해에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신한촌 사건 등 한인독립군과 관련된 굵직한 일제 만행이 연이어 발생하며 한인독립군과 일본군의 한판 승부라는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발점은 ‘삼둔자전투’였다. 1920년 6월 4일 일본군의 두만강변 남양수비대 1개 중대가 두만강 건너 중국령 삼둔자 부근에서 대한신민단 소속 독립군에 기습당해 패퇴했다. 삼둔자 패전 소식을 접한 함경북도 주둔 일본군 19사단은 즉각 증강된 2개 중대 규모의 ‘월강추격대’를 편성해 간도로 진입했다. 하지만 6월 7일 봉오동 골짜기에서 홍범도·최진동·안무의 북로독군부와 대한신민단 연합부대에 기습당해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했다. 이것이 ‘봉오동전투’다. 일제는 만주지역 한인독립군을 본격적으로 토벌하기 위한 때가 왔다고 판단하고 대규모 간도 침공을 본격적으로 계획한다.

 

한인독립군 중 서로군정서는 백두산 서측 안도현으로,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연합부대는 백두산 동측 청산리 일대로 이동했다. 한편 일제 조선군사령관은 만주와 연해주지역에 있던 부대들로 외곽을 차단하고, 19사단 예하 3개 여단급을 간도지역으로 진입시켜 한인독립군을 포위 격멸하려 했다. 필자 제공
한인독립군 중 서로군정서는 백두산 서측 안도현으로,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연합부대는 백두산 동측 청산리 일대로 이동했다. 한편 일제 조선군사령관은 만주와 연해주지역에 있던 부대들로 외곽을 차단하고, 19사단 예하 3개 여단급을 간도지역으로 진입시켜 한인독립군을 포위 격멸하려 했다. 필자 제공




간도지역 한인독립군을 초토화하기 위한 일제의 흉계

10월 9일, 일본군 참모총장은 기존에 준비했던 작전명령을 조선군 사령부 등 관련 부대에 하달했다. 조선군 사령관 주도하에 훈춘과 간도 일대 한인독립군들을 초토화하며, 랴오둥반도 관동군 사령부와 블라디보스토크 파견군 사령부, 북만주 철도경비대, 항공기 등도 이를 지원하라는 내용이었다. 조선군 사령관 오바 지로 중장은 즉각 한반도 북부 나남의 19사단장 다카시마 도모타케 중장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19사단장은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작성, 예하 여단장과 연대장들에게 하달했다. 일제 19사단장은 현지 행정구역을 고려해 작전지역을 3개로 구분했다. 전체적으로 동서남북 외곽에서 간도를 포위한 후 포위망 내부로 강력한 3개의 혼성여단급 초토부대를 각각 ‘갑’ ‘을’ ‘병’ 지역으로 나눠 투입, 해당 지역 내 독립군을 격멸하려 한 것이다.

전체 작전에 동원된 병력은 19사단 약 9000명, 20사단 약 2000명, 11사단 약 1000명, 안서지대 약 1000명, 관동군 약 1200명 등 총 1만8000명에서 2만여 명이 동원됐다. 여기에 비행기까지 동원했다. 그중 초토부대 주력은 한인독립군 대부분이 있던 용정현과 화룡현 일대 ‘병’ 지역을 담당하는 히가시(東)지대로, 37여단장 히가시 소장이 지대장이었다. 히가시 지대는 보병 73연대(-1), 보병 74연대(-2), 기병 27연대(-), 포병 2개 중대, 공병 1개 중대, 헌병으로 편성됐다. 준비를 완료한 일제는 중국령 간도로 진입하기 위한 책략을 세웠다. 소위 ‘훈춘사건’이다. 1920년 10월 2일 새벽 4시, 일본군 사주를 받은 중국인 장강호 마적단이 훈춘의 일본영사관 분관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인 부녀자 9명 등을 살해하자 일제는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미리 대기시켜 놓은 대병력을 즉각 만주로 출병시켰다. 10월 15일, 보병 37여단장 히가시 소장은 작전구역 ‘병’의 중심 도시인 용정촌에 도착해 히가시지대를 편성하고, 지대 내 한인독립군부대를 포위 격멸하기 위해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북로군정서는 체코군단으로부터 소총 1200여 정, 기관총 2정, 박격포 2문, 탄약 80만여 발, 다량의 수류탄과 권총을 구입했다. 이로써 북로군정서는 소총당 평균 600~700발 정도의 탄약을 할당할 수 있게 됐다. 가히 연대급 수준의 무장이다. 행운과 한인 독지가들의 헌신 덕분이다. 출처=독립기념관
북로군정서는 체코군단으로부터 소총 1200여 정, 기관총 2정, 박격포 2문, 탄약 80만여 발, 다량의 수류탄과 권총을 구입했다. 이로써 북로군정서는 소총당 평균 600~700발 정도의 탄약을 할당할 수 있게 됐다. 가히 연대급 수준의 무장이다. 행운과 한인 독지가들의 헌신 덕분이다. 출처=독립기념관



한인독립군 불의의 부대 이동, 그리고 체코군단으로부터 행운의 무기 구입

봉오동에서 일격을 당한 일제가 우선 그 지역 중국군을 압박하자, 간도 일대에 있던 한인독립군부대들은 상해임시정부 지도 아래 백두산 일대 울창한 삼림지대로 피하기로 했다. 1920년 8월 하순부터 홍범도연합부대가 먼저 움직였다. 이 부대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300여 명 외에 안무의 국민회군, 한민회군, 광복단군, 의군부군, 신민단, 의민단 등 1400~1500여 명으로 이뤄진 연합부대로, 무장은 주로 장총 중심 부대였다.

한편 당시 북로군정서는 김좌진 장군이 사령관으로 부임한 이후 철기를 신흥무관학교로부터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으로 영입하는 등 대대적인 전력 강화를 꾀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대조직 편성이 채 완료되기도 전에 봉오동전투 여파로 불의의 부대 이동을 하게 됐다. 12월로 예정된 사관연성소 제1기 졸업식을 부랴부랴 9월 9일로 앞당겨 시행하고, 9월 17일 부대 이동을 시작했다.

여기서 군사적 관점의 교훈 하나를 볼 수 있다. 일제는 6월 초순 봉오동전투 이후 4개월의 준비 끝에 10월 하순 간도로 침공했다.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기 전인 11월 10일 이전에 작전을 종결하도록 했다. 당시 서로군정서는 무장을 준비하지 못해 목총만 들고 백두산 서측으로 은거, 청산리전투에 가담조차 하지 못했다. 북로군정서는 1기 사관양성 과정을 절반이나 단축시키고 부랴부랴 청산리로 이동했다.

상해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군 단체 간 소통도 있었고, 봉오동에서 일제 월강추격대는 국경 넘어 간도 깊숙이 들어갈 수 없는 한계가 있어 봉오동전투는 회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전체 한인독립군은 제대로 전투력을 갖추고 1921년부터 본격적인 항쟁에 나설 수 있었을 텐데 당시 봉오동지역 독립군 지도자들의 전략적 안목이 아쉽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바로 그때 북로군정서 전투력을 획기적으로 보강할 절호의 기회가 나타났다. 당시 러시아 측 독소전선에서 이탈해 서유럽 전선으로 가기 위해 시베리아를 횡단, 동쪽으로 온 체코군단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대기하고 있었다. 북로군정서는 그들로부터 다량의 무기와 탄약을 사들일 수 있었다. 이제 우리 민족 핏속에 면면히 흘러온 무인정신의 기개와 실력을 보여줄 때가 왔다. 

 

필자 박남수는 현 철기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장으로 육군사관학교장과 서경대학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저서 『군인 이범석을 말한다』를 통해 장군의 리더십과 군인정신을 알리고 있다.
필자 박남수는 현 철기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장으로 육군사관학교장과 서경대학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저서 『군인 이범석을 말한다』를 통해 장군의 리더십과 군인정신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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