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타인을 우리 마음속에 살포시 내려놓는 ‘박보검 매직’

입력 2024. 06. 26   15:35
업데이트 2024. 06. 26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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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현의 페르소나 - ‘My name is 가브리엘’로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간 박보검 

해외에 덩그러니 떨어져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살기
당혹감도 설렘·감동으로 바꿔버리는 감수성 돋보여
그가 가진 열린 자세·적극성…감정 전달 ‘강력한 힘’

 

사진=JTBC
사진=JTBC



누구나 낯선 세계에 첫발을 내딛던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 느껴지는 두 가지 감정,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던 순간을 말이다. 특히 처음 보는 타인들과 마주할 때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어 긴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 긴장의 경계를 넘어 대화를 하면서 조금씩 그 사람을 알아갈 때 두려움은 설렘으로 바뀌기도 한다. 아마도 JTBC ‘My name is 가브리엘’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박보검의 마음이 그렇지 않았을까.

‘My name is 가브리엘’은 한마디로 타인의 삶을 대신 살아 보는 콘셉트의 예능 프로그램이다. 박보검이 살아 볼 타인의 삶은 아일랜드 더블린에 사는 루리라는 인물이다. 나라도 도시도 낯선 그곳에 뚝 떨어진 박보검은 루리가 사는 집을 주소 하나 달랑 들고 찾아가고, 루리의 방에 있는 물건들이나 해야 할 일을 적어 놓은 체크리스트 같은 걸로 그가 누구인지 유추한다. 체크리스트에 있던 약속된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루리가 더블린에서 꽤 큰 규모의 합창단 단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가 이끄는 합창단이 며칠 후 길거리에서 합창 버스킹을 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인지한다. 합창단 지휘라는 걸 말도 낯선 더블린이라는 곳에서 해야 하는 상황. 만일 그런 일을 내가 해야 한다면 어땠을까. 머리가 하얘지지 않았을까.

이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 앞에 선 박보검을 안심시키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루리의 친구들이다. 20대부터 40대까지 포진해 있는 그 친구들은 하나같이 프로그램 콘셉트에 맞춰 박보검을 오랜 친구인 루리처럼 대한다. 친구들 이름조차 몰라 “기억을 잃었다”는 핑계를 유머로 꺼내 놓으며 애써 이름을 묻고 기억하는 박보검에게 친절하게 자기소개를 하나씩 하고, 또 루리가 그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친구였는지 알려 준다. 낯선 상황의 당혹감에 머리를 쥐어뜯던 박보검은 차츰 편안해지며 그 상황에 적응해 간다.

하지만 이 친구들과 수십 명의 합창단원을 만나러 가고, 거기서 바로 이뤄진 연습 과정은 박보검으로선 또 다른 ‘멘붕’의 연속이다. 박보검은 과거 군 시절 군악대를 했던 경험을 살려 단원들의 합창에 나름의 코멘트를 하고 아이디어를 낸다. 거기에 단원들이 “너무나 좋은 코멘트”라는 리액션을 해 주면서 그의 긴장감은 풀려 나간다. 자신의 솔로 파트에 단원들이 백코러스로 화음을 넣어 주는 ‘폴링 슬로우리(Falling Slowly)’를 부르다가 결국 박보검은 울컥하며 눈물을 보인다. 그는 그 감동을 이렇게 표현했다. “잘하고 있고 잘해 낼 수 있다고 저를 다독이는 것만 같았어요.”

‘My name is 가브리엘’에서 박보검이 보여 준 이 감동적인 장면은 먼저 이 배우가 가진 특별한 몇 가지를 끄집어낸다. 첫 번째는 익숙지 않은 상황에서 낯선 이들과 만나는 데도 늘 열린 자세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프로그램 콘셉트가 그래서일 수도 있지만, 사실 보통 사람이라면 도망치고 싶었을 상황에서도 그는 루리의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인다. 또 합창단을 지휘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처음엔 망설이고 어려워했지만 금세 마음을 다잡고 해내야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설혹 틀린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아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이건 어쩌면 박보검이라는 배우가 지금껏 여러 역할을 하며 가졌던 자세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2011년부터 영화·드라마에서 다양한 조연·단역을 거친 박보검이 드디어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건 2015년 방영됐던 ‘응답하라 1988’의 바둑기사 최택 역할을 연기하면서다. 어남류(어차피 남편은 류준열), 어남택(어차피 남편은 최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화제가 됐던 박보검은 그 후 ‘구르미 그린 달빛’ ‘남자친구’를 거쳐 ‘청춘기록’으로 확실한 청춘의 초상으로 떠올랐다. 웃는 얼굴에도 우수가 가득한 눈빛을 가진 이 배우는 밝은 청춘들에 깃든 현실적인 어려움을 표상하는 듯한 연기로 호평받았다. 또한 영화 ‘서복’과 ‘원더랜드’에서는 심지어 로봇이나 인공지능(AI) 역할 때도 특유의 감수성이 빛나는 눈빛으로 한층 깊어진 연기세계를 보여 주기도 했다.

박보검을 여러 작품에서 마주할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건 바로 ‘감수성’이다. 이 인물은 아주 작고 소박한 일에도 금방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감수성의 폭발을 보여 준다. 최근 상영된 ‘원더랜드’에서 오랜 시간 식물인간으로 있다가 깨어난 태주의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박보검은 특유의 감수성이 묻어나는, 희비극이 교차하는 눈빛의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물론 다른 역할에 몰입해야 하는 배우들의 경우 감수성은 누구에게나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박보검이 드러내는 감수성은 특유의 세상에 대한 열린 자세와 적극성까지 더해져 더 깊이 있게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는 힘이 있다.

‘My name is 가브리엘’에서 박보검이 루리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 때 보여 준 힘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루리가 어떤 사람인지 친구와 동료들을 통해 보다 깊이 이해하려 했고, 어느 순간 루리가 합창단을 이끌며 느꼈을 감정을 자신도 공유하게 됐다. 박보검의 이 사례는 우리가 낯선 상황에 처했을 때 두려움을 설렘으로 바꿔 줄 수 있는 하나의 단서를 제시한다. 그건 타인이 어떻게 느낄 것인지를 미리 알아차리는 특유의 감수성이 전제돼야 한다. 동시에 타인을 신뢰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My name is 가브리엘’에서 박보검이 애쓰는 모습에 합창단원들은 하나같이 ‘환대’하며 호응해 준다. 그것은 열린 마음으로 다가오는 사람에 대한 인지상정이다. 그러니 낯선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미리 두려워하고 그것을 모면하려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타인도 느끼고 있을 똑같은 낯섦을 공감하고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일 때 두려움이 설렘으로 바뀔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사진=JTBC


필자 정덕현은 대중문화평론가로 기고·방송·강연을 통해 대중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MBC·JTBC 시청자위원을 역임했고 백상예술대상·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필자 정덕현은 대중문화평론가로 기고·방송·강연을 통해 대중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MBC·JTBC 시청자위원을 역임했고 백상예술대상·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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