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을 찾는 시간 모아 아버지의 시간 되살리다

입력 2024. 06. 24   18:08
업데이트 2024. 06. 24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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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특집 - 그날을 기억합니다.
기억을 찾은 사람

6·25 참전 아버지 기억 좇는 아들 김부광 씨

‘아버지를 좋아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의 추억.
그것도 어머니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일 뿐, 사진조차 남아 있지 않아 안개처럼 희미한 얘기다.
너무 어렸기에 기억할 수도, 그렇다고 사진이나 초상화가 남아 있지도 않아 추측조차 할 수 없다.
어린 김부광 씨가 할 수 있던 일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뿐이었다.
김씨에게 아버지는 74년 전 발발한 6·25전쟁에 머물러 있었다.
‘해병대로 입대한 아버지 고(故) 김형욱 일병은 전쟁이 멈추고도 7년이 지나서야 지금의 국립서울현충원인국군묘지에 안장돼 있다는 소식과 함께 돌아왔다.
‘기억을 찾은 사람’, 김부광(77) 씨의 사연을 소개한다. 
글=임채무/사진=양동욱 기자

김부광 씨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아버지 고(故) 김형욱 일병의 비석을 어루만지고 있다.
김부광 씨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아버지 고(故) 김형욱 일병의 비석을 어루만지고 있다.


멈춰 선 기억 
사진조차 안 남기고 입대한 父 
그리울 때마다 찾아온 현충원
아버지 품이자 놀이터 같은 곳
이어 진 인연 
군번 실마리로 군 기록 오류 수정 
해병대 7기 전우회와도 연락 닿아
도솔산전투 이야기로 그리움 달래


당시 13살 어린 소년에 불과하던 그는 아버지를 잊기보다는 어떻게든 기억하려고 했다. 그렇게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김씨의 긴 여정이 이어졌다.

기록의 오류와 단절은 아버지의 길을 좇는 데 큰 제약이었다. 많은 시간과 노력 끝에 올해 초 아버지의 동기들을 만나게 되면서 용맹한 해병대원이던 아버지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74년 전에 멈춰 있던 아버지와의 시간이 제자리를 찾아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의 얼굴조차 몰랐어요. 당시 제가 너무 어렸어요. 사진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얼마나 컸는지…. 혹시나 군대 기록에 남아 있을까 싶어 해병대사령부에 여러 차례 문의했죠. 하지만 기록이 상실됐다는 답변을 듣게 됐어요. 답답하더군요. 현충원에 묻힌 아버지를 찾아뵐 때마다 ‘아버지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다’며 제발 도와달라고 기도했어요.”

6·25전쟁은 김씨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놨다. 당시 평안남도 진남포(현 남포시)에 살던 그의 가족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고초를 당했다. 특히 그의 외가 친지는 대부분은 북한군에 학살당했고,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본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아 말수가 극히 줄어들었다. 이에 김씨 아버지는 1951년 1·4후퇴 전후로 해병대로 입대하기 위해 가족의 곁을 떠났고, 그의 어머니 또한 보복이 두려워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피난을 왔다. 그 과정에서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린 여동생은 목숨을 잃었다.

 

 



“미군 상륙함을 타고 군산으로 피난을 왔어요. 이때부터는 기억이 좀 있는데, 군산에 군인 가족 수용시설이 있어 그곳에서 생활했어요. 그곳에서의 삶은 정말 어렵고 힘들었어요. 어머니께서는 난리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살림살이나 재산을 장독대 같은 곳에 숨겨두시고 급히 오셨다고 하더군요. 맨몸으로 피난 생활을 시작해야 했던 거죠. 겨우 어머니가 근처 일을 구하셨는데 그마저도 얼마 안 가 몸을 다치셔서 이집 저집을 돌며 밥을 얻어먹어야만 했어요.”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김씨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아버지만 살아오신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환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1960년 지금의 국립서울현충원인 국군묘지에 안장돼 있다는 소식과 함께 돌아왔다.

“그때부터 1년에 두세 번은 현충원에 왔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그립고 살기 힘들면 특히 더 왔어요. 현충원은 제게 아버지의 품이자 놀이터 같은 곳이 됐죠. 그래서 현충원을 올 때마다 어떻게든 아버지의 흔적을 찾겠다고 생각했어요.”

김씨는 그야말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혹시라도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남북한 이산가족 찾기에 참여하는가 하면 대북 경수로 공급사업 합동시공단의 일원으로 지원해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어요. 당시 미국에 있었는데, 혹시라도 아버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고향에 한번 가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합동시공단에 참가했죠. 당시 숙소가 평양 대동강 일대에 있는 양강호텔이라는 곳이었어요. 그곳에서 우연히 제 고향 ‘진남포’를 가리키는 이정표를 보게 됐죠. 조금만 더 가면 아버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속으로 아쉬움을 삼켰습니다. 그런데 제 신원을 미리 확인했는지, 북한 사람이 저를 보더니만 ‘아, 선생님이 그 반동분자 자식이구만요’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왜 그러냐고 반문하니 ‘부모가 모두 나라를 팔아먹었으니 반동분자가 아니고 뭐냐’고 합디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살게 됐는데, 기가 막혀서 참. 많은 원망이 들었습니다.”

성과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김씨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가며 국가유공자증, 전몰장병통지서 등을 하나하나 찾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들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대신하는 소중한 보물이 됐다. 특히 해병대사령부에 아버지의 기록을 여러 차례 문의하면서 전투 중 아버지의 활약상을 알게 된 소중한 자료였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온 여정을 설명하는 김씨.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온 여정을 설명하는 김씨.

 

김씨(왼쪽 셋째)와 해병대전우회 관계자들이 고인을 기리며 경례를 하고 있다.
김씨(왼쪽 셋째)와 해병대전우회 관계자들이 고인을 기리며 경례를 하고 있다.



“해병대사령부에 군 경력, 전공 등 아버지가 어떤 분이라는 걸 조금이라도 더 알 수 있게 확인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아버지는 1951년 4월 1일 해병대 제1전투단 1연대 3대대 소속으로 강원도 양구 도솔산지구전투에서 도솔산 24개 목표를 완전히 점령하는 데 기여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또 차기 작전인 대우산 공격작전에 대비해 도솔산 일대의 강력한 방어진지 구축과 적 반격을 미연에 저지하기 위한 적정탐지 중 소규모 전투에서 심각한 전상을 입고 진해로 후송됐지만 얼마 안돼 전사하셨다는 내용도 확인했습니다. 아버지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게 된 것이죠. 그저 도솔산지구전투에 참전하셨다는 것만 알았는데, 자세히 알게 되니 감회가 새롭더군요. 특히 이런 과정에서 아버지에 대한 기록 중 이름이 잘못 적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이를 수정하면서 아버지에게 한 걸음씩 가까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다. 김씨 노력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아버지의 진한 흔적을 찾을 수 있게 됐다. 바로 ‘해병대전우회’가 그 주인공이었다. 올 초 김씨의 소식을 접한 해병대전우회가 아버지의 전우를 발 벗고 찾기 시작한 것. 처음에는 어려움도 있었다. 해병대전우회가 가지고 있던 기록도 다른 기록들처럼 잘못된 이름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해병대전우회가 ‘해병대 DNA 찾기’ 운동의 하나로 서울현충원에 안장된 해병대 선배 전우의 묘역 현황을 정리하고 있었고, 해당 담당자가 직접 통화를 하면서 해결됐다.

“전우회 정택경 전승관리실장님으로부터 기록 확인을 위한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제가 아버지 이름을 알려주면서 아버지를 기억하거나, 혹시 아버지의 사진을 찾을 수 있냐고 물어봤죠. 그 과정에서 아버지 이름이 잘못 기록돼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군번이 해결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해병대 7기셨더라고요. 전우회에서는 바로 7기 김영호 회장님과 연결해줬어요. 알고 보니 김 회장님도 북한에서 넘어오셨는데, 저희랑 같은 고향인 거예요. 정말 반가웠습니다. 비록 아버지를 기억하고 계시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버지와 같이 훈련받고, 같은 전투에서 싸운 분을 찾았다는 생각에 꼭 살아 있는 아버지를 만난 기분이 들었습니다.”

김씨의 딱한 사정을 들은 전우회는 지난 15일 도솔산지구전투 전승 추모식에 김씨를 초청했다.

특히 행사 하루 전 7기 회원들과 만남을 주선하고 같은 숙소에 묵도록 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게 했다.

“너무 감격스러웠죠. 아버지 동기분들과 하룻밤을 같이 지내며 궁금한 것들을 많이 묻고 또 물었습니다. 특히 다음 달 전승 추모식에서 함께 헌화할 때는 상상 속 그리던 아버지와 함께하는 것 같아서 왈칵 눈물이 나올 뻔했어요. 고맙게도 제가 그 자리에서 감사 인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어요. 준비한 편지를 낭독한 뒤 해병대전우회 회원들에게 큰절을 올렸습니다.”

김씨의 여정은 이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것을 대신해 망백(望百)을 훌쩍 넘긴 아버지의 해병대 동기들과 인연을 이어가기로 한 것이다.

“전우회 얘기를 들어보니 이제 10분 정도만 남으셨다고 해요. 제가 찾아뵙고 인사드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거죠. 한 번씩 찾아뵙고 안부를 여쭤보려고 합니다. 특히 아버지가 그리울 때면 연락을 드릴 생각입니다. 나중에 아버지를 만나게 될 그날이 오면 아버지께서 칭찬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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