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상흔을 건너 영원의 길목이 되다

입력 2024. 06. 24   17:49
업데이트 2024. 06. 2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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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특집 - 그날을 기억합니다.
단절과 연결의 기억 - 다리로 보는 6·25전쟁

단절된 것을 연결하는 게 다리의 역할.
그래서 다리는 ‘잇는다’는 뜻을 품고 있다. 의미는 더 확장됐다.
의견이 맞지 않거나 대립하는 상호 관계에 긍정적인 변화를 줄 때 ‘다리를 놓는다’는 말도 생겼다.
반대로 ‘다리가 끊긴다’는 이별과 단절을 뜻한다.
6·25전쟁은 이 다리들을 때로는 방어를 위해, 때로는 공격을 위해 끊기도 하고 잇기도 했다.
그 와중에 안타깝고 슬픈 사연과 역사도 태어났다.
6·25전쟁 발발일을 맞아 이러한 다리의 현재와 옛 모습을 찾아보며 전쟁·분단의 슬픔을 뛰어넘어 교류·협력을 통한 평화·통일의 길을 기원해 본다. 이주형 기자

하늘에서 본 승일교(오른쪽)와 한탄대교. 국가유산청
하늘에서 본 승일교(오른쪽)와 한탄대교. 국가유산청


남과 북이 합작하다
철원 승일교(승일교)
북 시작, 남 마무리…박승일 대령 추모

철원 승일교는 1948년 8월 북한이 착공해 1958년 12월 3일 남한이 완공한 ‘합작 다리’다. 분단과 6·25전쟁이 빚은 독특한 의의가 있다. 북한은 이 지역을 점거할 때 동송읍 장흥리와 철원·김화 지역 주민을 ‘노력공작대’로 동원해 다리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절반 정도 시공했을 무렵 전쟁이 터져 중단됐다. 이후 이 지역을 수복한 국군 5군단이 1958년 12월 3일 콘크리트 교량으로 완공했다. 지금은 승일교를 보행자 전용으로 사용하고, 바로 옆에 한탄대교를 개설해 차량이 통행하고 있다. 2002년 5월 31일 국가등록문화유산(예전 명칭 등록문화재 26호)으로 지정됐다. 이름의 유래도 흥미롭다. 승일교는 설치 당시 군단장이던 이성가 장군이 6·25 때 빛나는 공훈을 세우고 전사한 고 박승일(朴昇日) 대령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이름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승만 대통령의 ‘승’과 김일성의 ‘일’을 각각 따서 ‘승일교(承日橋)’로, 혹은 ‘김일성을 이기자’는 뜻에서 ‘승일교(勝日橋)’라 지었다고 잘못 알아 왔다.


화천 꺼먹다리 부식 방지를 위해 검정 타르를 칠한 것에서 이름 붙여졌다. 국가유산청
화천 꺼먹다리 부식 방지를 위해 검정 타르를 칠한 것에서 이름 붙여졌다. 국가유산청


화천 꺼먹다리
부식 방지로 검정 타르 칠해 이름 붙여

화천읍에는 ‘꺼먹다리’라는 특이한 이름의 다리가 있다. 부식 방지를 목적으로 검정 타르를 칠해 붙여진 이름이다. 꺼먹다리는 화천수력발전소 건설에 맞춰 1945년 일제가 건립을 추진했다. 독립 후 북한이 교각을 세웠고, 정전협정 이후 화천군이 상판을 올려 완공됐다. 폭 4.8m에, 길이는 204m다. 남과 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다리였기 때문에 폭파하지 않고 남겨 뒀다. 그래서 총탄의 흔적은 많지만, 원래 모습이 잘 보존됐다. 인근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데다, 경관이 수려해 1970년대 인기 드라마 ‘전우’를 비롯한 여러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2004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고성 합축교
남북이 건설한 부분 모습 서로 달라

합축교(合築橋)는 고성군 간성읍 상리와 거진읍 대대리를 잇는 길이 214m, 폭 6m, 높이 5m, 교각 17개의 다리로 ‘북천교’라고도 불린다. 1948년 6월 북한의 강원도 인민위원회가 교각을 건설하다 전쟁으로 중단됐다. 이후 1960년 육군1102야공단이 북쪽 교각 8개를 마저 건설해 12년 만에 완공됐다. 다리는 하나로 이어졌지만, 남북이 건설한 부분의 모습은 완연히 다르다.


자유의 다리 포로가 된 1만2773명의 국군과 유엔군이 이 다리를 통해 귀환하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국방일보DB
자유의 다리 포로가 된 1만2773명의 국군과 유엔군이 이 다리를 통해 귀환하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국방일보DB


임진각의 다리들

자유의 다리
냉전 상징하는 대표적 근대 유산


‘자유의 다리’는 북에 두고 온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다 돌아가신 실향민의 넋을 기리고,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설치한 임진각 망배단(望拜壇) 뒤편에 있다. 원래 경의선 철교는 상·하행 2개의 교량이 있었으나, 폭격으로 파괴돼 교각만 남아 있었다. 후에 전쟁 포로 교환을 위해 서쪽 철교를 복구했고, 남쪽 끝에 임시 교량을 가설했다. 처음엔 마을 이름을 따 독개다리라고 불렸으나, 1953년 전쟁 중 포로가 된 1만2773명의 국군과 유엔군이 이 다리를 통해 귀환하면서 현재의 이름이 붙었다. ‘자유로의 귀환’이라는 의미를 담았다는 점에서 냉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근대유산이다.


죽음의 다리
매복한 중공군이 미군 전멸시킨 곳

섬뜩한 이름의 다리도 있다. 옛 장단역 남쪽 300m 지점에 있는 ‘죽음의 다리’다. 장단에서 연천의 고랑포로 나가는 유일한 국도 교량으로 경의선이 개통되면서 생겼다. 철로 위쪽 8m 높이에 있는 길이 7.2m, 폭 5.5m의 작은 다리다. 6·25 때 매복한 중공군이 이곳을 지나던 미군을 전멸시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온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1976년 8월 도끼만행사건 이후 통행이 금지됐다. 국방일보DB
돌아오지 않는 다리 1976년 8월 도끼만행사건 이후 통행이 금지됐다. 국방일보DB


돌아오지 않는 다리
정전협정 포로 교환하면서 명명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Joint Security Area) 내 작은 사천(砂川)에 놓인 다리다. 본래는 마을 이름인 널문리를 따 ‘널문다리’라고 했다. 널문리는 휴전회담 때부터 판문점(板門店)으로 바꾸어 불렸다. 다리 이름도 정전협정과 함께 포로를 교환하면서 ‘북쪽을 택하면 다시는 남쪽으로 돌아올 수 없다’ 해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불리게 됐다. 1976년 8월 도끼만행사건 이후 통행이 금지됐다.



전쟁 영웅 투혼, 마음속에 

근홍교와 영노교
영웅 고 김영노·고근홍 대령 이름 계승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영노교’와 관인면 사정리에 있는 ‘근홍교’는 전쟁 중 적과 싸우다 산화한 전쟁 영웅 고(故) 김영노·고근홍 대령의 이름을 딴 다리다. 두 다리는 본래 1958년 4월과 6월 각각 착공돼 같은 해 12월 3일 동시에 개통됐다. 낡아서 흔적이 없어진 영노교 자리엔 신(新)영노교가 세워졌다. 근홍교는 폭 6.3m, 길이 120m 규모로 1979년 8월 20일 재건립됐다가 한탄강댐 건설로 인한 수몰 등으로 이용이 중단됐고, 현재 자취가 사라지고 있다. 2014년 인근에 새 다리를 세우면서 근홍교라는 이름을 계승했다. 근홍교 옆에는 고근홍 대령의 전송비와 안내판이 있어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백일교
3사단의 국군 최초 38선 돌파 기념

강릉시 연곡면 방내리에는 ‘백일교’가 있다. 6·25 당시 1군단장이었던 김백일 장군의 지시로 3사단의 국군 최초 38선 돌파를 기념하기 위해 1956년 건설한 목제 교량에 장군의 이름을 붙였다. 1972년 현재의 콘크리트 교량으로 교체됐으며, 그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2002년 인근 소공원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타국에서 이름으로 남다

인제 리빙스턴교
리빙스턴 중령 유언 따라 다리 세워



1951년 7월 인제지구에서 작전 중이던 미 10군단 리빙스턴 중령(대대장)의 포병부대는 현재의 합강정 인근에서 적의 기습을 받았다. 당시 폭우로 강물이 불어 부대원들은 빠르게 도강하지 못해 큰 피해를 봤다. 리빙스턴 중령 역시 중상을 입었다. 그는 “다리가 있었더라면 승리하는 것은 물론 부하들의 희생도 없었을 것”이라며 “내가 죽으면 사재를 들여서라도 꼭 다리를 가설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전사했다. 리빙스턴 부인은 휴전 후 한국을 찾았고, 남편과 전우들을 기리기 위해 교량 가설 기금을 내놨다. 마침내 1957년 12월 4일 길이 150m, 너비 3.6m의 다리가 준공됐고 ‘리빙스턴교’라고 명명했다. 이후 다리가 노후화되자 인제군은 교각만 남긴 채 1970년 철근콘크리트로 길이 148m, 폭과 높이 각각 7m의 새 다리를 놨다. 처음에는 ‘인제교’로 명명됐으나, 리빙스턴 부인이 본래의 이름을 붙여 달라고 요청해 ‘리빙스턴교’를 되찾았다는 말이 있다.


리비교 대전지역에서 무훈을 세우고 명예훈장을 받은 리비 중사의 이름을 딴 리비교. 국방일보DB
리비교 대전지역에서 무훈을 세우고 명예훈장을 받은 리비 중사의 이름을 딴 리비교. 국방일보DB


파주 리비교
대전에서 무훈 세운 리비 중사 기려

전진교 인근에 있어 북진교라고도 불린다. 가설할 때 카투사 김호덕 상병 등 2명이 순직해 이들의 이름을 사용하려고 했으나 1950년 7월 20일 대전지역에서 무훈을 세우고 명예훈장을 받은 3전투공병대대 소속의 조지 리비 중사의 이름으로 명명됐다. 2023년 11월 전면 재가설 공사를 통해 새롭게 탄생했다.


연천 화이트교
지금은 철거되어 이름 흔적만 남아

경기도 연천군 전곡에서 미산면·왕징면 방향으로 가는 왕복 4차선에 ‘임진대교’가 생기기 전에는 철제 H빔이 들쑥날쑥 솟아 다소 흉물스러운 다리를 건너야 했다. 이 다리는 마을 이름을 따 ‘무등교’라고 했지만, 이곳에서 오래 생활한 사람들은 ‘화이트교’ 또는 ‘북진의 다리’라고 불렀다. 1951년 중공군의 1·2차 춘계공세를 막아내고 북진할 때 미군 공병대대가 통나무로 교각을 구축하고, 나무판자를 깐 후 가설자 이름을 붙여 ‘화이트교’라고 명명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철거됐고, 그 이름의 흔적은 인근 ‘화이트다방’에서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완도대교 한강철교의 구조물을 가져다 세운 완도대교. 완도신문
완도대교 한강철교의 구조물을 가져다 세운 완도대교. 완도신문


기타 다리들
대동강철교·완도대교·안동교·안동철교
전쟁 아픔 안고 역사 속으로…

이외에도 1950년 12월 4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전략상 폭파한 대동강철교, 한강철교 복구작업에서 철거된 트러스 구조물을 가져와 건설했던 구(舊) 완도대교(현재 철거),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1950년 8월 1일 폭파한 안동교와 안동철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다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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