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미움도 한 줄 대사일 뿐… 죽음, 막이 내린 무대 뒤의 침묵 

입력 2024. 06. 24   16:39
업데이트 2024. 06. 24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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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뮤·클 이야기 - 연극 ‘햄릿’

연출 손진책 “연극=인간학, 햄릿=죽음학”
영혼들의 햄릿 공연 참여 후 돌아오는 설정
원 안에 앉은 배우들 시작과 끝 같은 모습
삶-죽음 경계 허물며 인생을 연극에 비유
전무송·박정자·손숙…‘레전드’ 한 무대에

 

연극 ‘햄릿’의 한 장면. 사진=신시컴퍼니
연극 ‘햄릿’의 한 장면. 사진=신시컴퍼니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Vanity, thy name is woman).”

세계 연극사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인 ‘햄릿’은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와 닮은 데가 있다. 모르는 사람은 없는데, 정작 ‘완독’한 이는 드물다. “‘햄릿’을 봤다”는 사람도 사실은 연극이 아니라 영화, 드라마, 만화 등에서 접한 경우가 많다.

여하튼 ‘햄릿’을 본 적이 없다고 해도 저 유명한 대사만큼은 기억하고 있을 터. 굳이 공연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햄릿’은 죽기 전에 봐야 할 연극 10편에 무조건 들어가는 작품이니 꼭 시간(3시간 정도는 필요하다)을 내 보시길 권한다.

마음의 결단을 내린 분이라면 요즘 홍익대대학로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신시컴퍼니의 ‘햄릿’이 최고의 선택일 것이다. ‘맘마미아’ ‘시카고’ ‘아이다’ 등의 흥행작으로 짱짱한 수익을 내고 있는 회사지만 연극에도 진심인 곳이다. 그 ‘진심’은 이번 시즌 ‘햄릿’의 캐스팅만 봐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연극 간판스타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았다. 이쯤 되면 캐스팅 자체가 ‘전설급’이다. 지난 시즌에 참여했던 전무송, 박정자, 손숙, 정동환, 김성녀, 손봉숙, 길해연, 강필석, 김명기, 이호철에 더해 이호재, 김재건, 길용우, 남명렬, 박지일, 정경순, 전수경, 박윤희, 이항나, 이승주, 양승리, 이충주, 정환, 루나가 합류했다. 전 연령대에 걸쳐 어떻게 이런 거물들을 모았나 싶었는데, 공연수익이 차범석연극재단과 한국연극인복지재단에 기부된다고 한다. 기부한 수익금은 창작희곡 발굴과 연극인들이 본업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 개선에 사용된다고 하니 우리나라 연극계 선배들의 ‘연극 일병 구하기’ 같은 느낌이다. 연극인들을 위한 80일간의 대축제라고 봐도 되겠다.

 

연극 ‘햄릿’의 한 장면. 사진=신시컴퍼니
연극 ‘햄릿’의 한 장면. 사진=신시컴퍼니



연출은 명장 손진책이 맡았다. 그는 “연극이 인간학이라면 ‘햄릿‘은 죽음학”이라는 멋진 말을 했다. 이번 ‘햄릿’에서도 그의 ‘햄릿’ 철학은 어김없이 빛을 내고 있다. 손진책의 ‘햄릿’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무는 철학자로까지 보인다.

‘햄릿’은 비극이다. 등장인물이 다 죽어 나가는 ‘올킬’ 작품의 원조라고 해도 될 정도. 왕의 자리가 탐나 형을 죽이고, 실수로 엉뚱한 사람을 죽이고, 속여서 죽이고, 미쳐서 죽고, 복수를 위해 죽인다.

신시컴퍼니의 ‘햄릿’은 이번이 3번째 시즌이다. 2016년, 2022년에도 공연됐는데 흥미로운 건 매 시즌 다른 해석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연출가 손진책은 “2016년 ‘햄릿’이 출연배우들에 대한 오마주였다면, 2022년 ‘햄릿’은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원작을 재해석했다”고 말했다. 이번 시즌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극이 시작되면 모든 등장인물이 고요함 속에서 느릿느릿 움직인다. 무대 바닥에 그려진 거대한 빛의 원 안으로 들어선 인물들은 각자 같은 모양의 의자를 들고 있다. 이들이 의자에 앉아 알 수 없는 움직임을 보이는 동안 유랑극단 배우 역의 4인이 이들 사이를 오가며 역시 알 수 없이 조각조각 난 대사를 내뱉는다.

이 전위적인 장면은 극의 마지막에 다시 행해져 수미상관의 구조를 이룬다. 물론 이는 셰익스피어 희곡에는 없는 것으로, 연출과 작가(배삼식)의 주제의식이 강렬하게 드러나 있지만 해석은 쉽지 않다. 연출가 손진책은 “유랑극단 역 배우들이 이승에서 죽음의 강을 건너 사령(死靈)들이 공연하는 ‘햄릿’에 참여했다가 다시 이승으로 건너온다는 설정”이라고 설명했다.

다르게 읽을 수도 있겠다. ‘햄릿’의 끝부분 대사 중 이런 것이 있다. “이것은 나의 무대, 나의 연극.” “대사는 모두 끝났다. 모든 것이 지나갔다. 남은 것은 침묵뿐.”

셰익스피어는 인생을 한 편의 연극에 비유했다. 그렇게 보면 살아간다는 건 제각기 주어진 의자에 잠자코 앉아 자기 배역을 충실히 연기하는 것. 모든 대사가 한 줄도 남김 없이 소모되고 무대 위 조명이 꺼지고 난 자리에는 사랑도 미움도 친구도 원수도 없다. 그저 삶과 죽음의 경계 어딘가 즈음에 놓인 똑같은 크기의 의자에 앉아 한숨 같은 휘파람을 불고 있을 뿐이다.

마지막 조명이 꺼지기 전 ‘햄릿’은 분명히, 그리고 확고히 내게 말하고 있었다.

사진=신시컴퍼니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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