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형 기자의 ‘펜 들고 세계 속으로'] 생도·교민 등과 이민 100주년 기념 퍼레이드 참여

입력 2024. 06. 23   16:18
업데이트 2024. 06. 23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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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기자의 ‘펜 들고 세계 속으로’ ⑪ 2002 해군순항훈련 -미국 하와이

한국계 미스 유니버스 리셉션서 만나
애국지사 기리는 독립기념관 개관
추모비 제막식·펀치볼 국립묘지 참배
항해 중 보디빌딩 경연 심사위원도

하와이 이민 100주년을 기념해 펼쳐진 퍼레이드에서 해사 생도들이 행진하는 모습.
하와이 이민 100주년을 기념해 펼쳐진 퍼레이드에서 해사 생도들이 행진하는 모습.


로스앤젤레스(LA)에서 다음 목적지 하와이까지는 열흘이 걸렸다. 타히티에서 칠레까지의 여정에 이은 두 번째 장거리 항해였다. 긴 항해에 지친 해군사관학교(해사) 생도와 승조원들. 이럴 땐 피로에 지친 심신을 풀고, 모두가 단합할 수 있는 행사를 마련한다. 타히티~칠레 항해에서는 가요제를, 이때는 보디빌딩 경연대회를 열었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심사를 위해 지휘부 외에 나도 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 생전 처음이다. 기준을 어떻게 정해서 점수를 줄까? 잘하면 90점, 중간이면 85점, 못하면 80점을 주기로 했다. 그런데 내 눈에는 다 잘하는 것 같다. 점수는 90점으로 쏠림 현상이 발생했다. 변별력 제로다. 다른 심사위원들은 나름대로 평가에 집중했다. “에라 모르겠다. 모조리 똑같으면 공평하니까 잘 된 거지.” 최면을 걸어 스스로를 위안했다. 결과적으로 심사 종합에서 내 점수는 빠졌다고 한다. 그 후 나를 심사위원에 위촉하는 일은 없었다. 요청해도 사양했겠지만.

하와이 진주만에 입항하면서 미주리함과 애리조나함 기념관을 지나쳤다. 이 두 곳은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끝을 상징한다. 애리조나함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 때 침몰했고, 미주리함 선상에서는 일본의 항복문서가 조인됐기 때문이다.

스노클링의 성지로 불리는 하나우마 베이.
스노클링의 성지로 불리는 하나우마 베이.


간단한 입항 행사 후 둘러본 하와이는 태평양의 낙원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았다. 야자수가 가득한 해변, 아름다운 알로하(Aloha)의 노랫소리. 서핑을 비롯해 다양한 액티비티 프로그램이 있는 곳. 환상적인 뷰는 누구나 가고픈 곳임을 실감시켜 줬다. 

짧은 일주를 마치고 다음 날 시내에 있는 한의원에 들렀다. 중국계 현지인이 운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곳을 찾은 것은 전날 하와이 이곳저곳을 다녔던 장병들의 이야기를 취합해 듣게 된 정보 때문이다. 무료로 건강 체크도 해주고, 스노클링 성지인 하나우마 베이(Hanauma Bay) 자연보호구역까지 데려다준다는.

실제로 한의원에서 문진을 통해 건강 상태를 봐준 것은 고마웠다. 자신의 자동차로 하나우마 베이까지 태워준 것도 마찬가지. 그런데 한참 뒤에 알았다. 처방전을 받고 사인한 것이 다른 용도로 쓰였다는 것을. 당시는 비아그라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의사의 처방전이 없으면 살 수 없기에 가짜 처방전이 횡행했다. 그렇게 사용됐다니, 나도 모르게 일종의 범법행위에 일조한 셈이다.

당시 하와이에서는 한국과 관련된 큰 행사가 진행됐다. 바로 하와이 이민 100주년 기념행사다. KBS 열린음악회도 현지에서 열렸다. 가수 등 연예인들이 많이 왔다. 가수 송대관을 우연찮게 거리에서 만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순항훈련함대는 성공적인 행사 개최에 단단히 한몫했다. 해사 생도와 승조원들은 1월 12일 이민 100주년을 기념해 펼쳐진 퍼레이드에 교민, 하와이 6·25 참전용사, 각종 단체 인사들과 참여해 행사의 의미를 더했다.

행사 덕분에 세계가 인정한 미인 ‘미스 유니버스’를 만나보기도 했다. 100주년 기념 리셉션 때다. 참석자 중 한 명이 1997년도 미스 USA였던 브룩 리(Brook Antoinette Mahealani Lee·한국명 이시내)다. 한국계 최초 미스 유니버스 우승자인 브룩 리의 할아버지는 1950년대 대한민국에서 하와이로 이주한 이민 1세다. 그로 인해 브룩 리가 참석했는데, 나와는 눈높이가 맞지 않았다. 의도하지 않게 자꾸 고개를 들어 우러러봐야 했다. 신장은 170㎝로 나보다 작지만, 하이힐을 신은 까닭이다.

펀치볼 국립묘지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하와이 참전용사와 해사 생도들.
펀치볼 국립묘지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하와이 참전용사와 해사 생도들.


14일에는 또 다른 주요 행사가 열렸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다 돌아가신 애국지사들을 기리는 독립기념관이 개관한 것. 추모비 제막식도 이뤄졌다. 

행사를 마친 뒤 해사 생도들과 함께 펀치볼 국립묘지를 참배했다. 하와이 참전용사들과 기념사진도 찍었다. 그런데 촬영한 사진을 보니 참전용사들과 여생도뿐이다. 동행한 남생도는 하나도 없다. 문득 셰익스피어의 연극 대사 한 구절이 생각났다. “불쌍한 자여, 그대 이름은 남자”(원문은 햄릿의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

이주형 기자는 1995년 국방일보에 입사해 10여 회에 걸쳐 해외파병부대를 취재하며 세계 곳곳을 누비는 국군의 활약상을 보도했다. 현재는 대통령실 출입기자로 있다.
이주형 기자는 1995년 국방일보에 입사해 10여 회에 걸쳐 해외파병부대를 취재하며 세계 곳곳을 누비는 국군의 활약상을 보도했다. 현재는 대통령실 출입기자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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