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경비대 통위부장 오른 뒤 광복군 출신 중용 힘써

입력 2024. 06. 17   15:27
업데이트 2024. 06. 17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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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군인들 - 49. 대한민국 국군 창군의 초석 유동열

임정 요인들 미군정 군대 창설에 불만
초기 일본군·만주군 출신에 요직 내줘
유동열 지휘권 잡은 뒤 군대 개조 결심
송호성 총사령관 등 잇따라 특별 임관
500여 광복군 중 200명가량 국군 복무
대한제국군부터 이어진 정통성 계승

 

1947년 통위부와 조선경비대 간부들. 앞줄 가운데 사복 차림이 유동열 통위부장, 바로 오른쪽이 송호성 조선경비대 총사령관이다. 출처=국군 50년사 화보집
1947년 통위부와 조선경비대 간부들. 앞줄 가운데 사복 차림이 유동열 통위부장, 바로 오른쪽이 송호성 조선경비대 총사령관이다. 출처=국군 50년사 화보집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했다. 그해 9월 9일, 존 리드 하지 중장이 지휘하는 미 육군 제24군단이 서울에 입성해 3년간의 군정을 시작했다. 당시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미군정청에 불만이 많았다. 광복된 조국의 정권은 당연히 임시정부가 인수해야 한다는 것이 임시정부 주장이었다. 하지만 미군과 소련군이 남북한에서 각각 군정을 실시하는 상황에서 불가능한 주장이었다.

처음에 미군정은 군대를 창설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군대는 향후 선거를 통해 수립될 통일 정부가 창설할 일이고, 그때까지는 경찰만으로 치안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경찰만으로는 치안 유지가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1945년 11월 13일 국방부 전신인 국방사령부를 설치하고, 1946년 1월 15일 육군 전신인 국방경비대를 창설했다.

한편 경비대를 창설하기 40일 전인 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를 설치했다. 광복군·일본군·만주군의 장교로 복무했던 사람들에게 속성으로 영어를 가르쳐 지휘관으로 활용하려 한 것이다.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은 참여했지만, 광복군은 참여하지 않았다. 임시정부가 창군 초창기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였다. 군사영어학교가 배출한 군번 1번부터 110번까지 110명의 장교가 1960년대 말까지 군의 주요 직책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1946년 5월 1일, 군사영어학교가 폐교되고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국방경비사관학교가 창설됐다. 1946년 6월 15일에는 국방사령부 명칭이 통위부(統衛部)로 바뀌었다. 국방경비대와 국방경비사관학교도 조선경비대와 조선경비사관학교로 바뀌었다.

미군정청은 국방부 장관 격인 통위부장을 한국인에게 맡기기로 방침을 정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경비대 지휘권도 한국인에게 이양하기로 했다. 이때 통위부장 후보로 떠오른 사람이 유동열(柳東悅·1879~1950)이었다. 대한제국군 참령(소령) 출신인 유동열은 임시정부 국방부 장관인 군무부장을 세 번(7·15·18대)이나 역임한 인물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67세였다.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시절의 유동열. 출처=독립기념관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시절의 유동열. 출처=독립기념관



군사영어학교와 국방경비대의 설치조차 반대했던 임시정부 요인들은 미군 용병이 될 수 없다며 펄쩍 뛰었다. 하지만 미군정과 우리 군 관계자들이 찾아와 계속 권유하자 유동열의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 이제라도 조선경비대에 되도록 많은 광복군 출신을 심어야 한다고 생각을 바꾼 것이다. 늦었지만 현명한 판단이었다. 

1946년 9월 12일 통위부장에 취임한 유동열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2년여 동안 국군의 초석을 놓았다. 특히 광복군 출신을 많이 입대시켜 조선경비대를 개조하려고 노력했다.

이후 광복군 간부 출신들이 속속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해 장교로 임관했다.

1946년 9월, 송호성과 고시복이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로 입교했다. 광복군 편련처장을 지낸 송호성은 20여 일의 기본 훈련만 받고 소령으로 임관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인 1946년 12월 23일에는 중령 진급과 함께 조선경비대 제2대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즉, 국방부 장관에 이어 육군참모총장까지 광복군 출신이 맡게 된 것이다. 1947년 1월에는 박시창, 박기성, 최덕신이 3기 특별반으로 입교해 특별 임관했다.

특별임관뿐만 아니라 조선경비사관학교 정규과정에 입교해 소위로 임관한 젊은 대원도 많았다. 장철부를 포함한 중국 황포군관학교 20기 출신 세 사람이 대표적인 예다.

장철부는 1944년 1월 일본군 학병으로 강제 징집당해 중국 전선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광복군에 입대했다. 1945년 초, 임시정부가 4명의 청년 대원을 선발해 중국 황포군관학교에 보냈다. 장철부, 강홍모, 김중진, 이건국이 그들이다. 이들 중 3명은 1947년 귀국해 조선경비사관학교 정규과정에 입교했다. 4기 강홍모와 이건국은 1947년 9월, 5기 장철부는 1948년 4월 소위로 임관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수십 명의 광복군 간부 출신이 육군사관학교 제7기 특별반과 제8기 특별반을 거쳐 특별 임관했다. 김홍일의 경우는 육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육군 준장으로 특별임관했다. 민영구는 해군에, 최용덕과 김신 등은 공군에 들어갔다.

광복 당시 순수 광복군 병력은 500명가량이었다. 젊은 대원도 있었지만, 간부급은 항일투쟁에 젊음을 바친 독립군 출신 노장들이었다. 이렇듯 워낙에 소수에다 노장이 많았던 광복군 출신은 국군에서 그다지 큰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창군 주역이 전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초창기 국군정책과 정신교육을 주도한 주역은 분명 광복군 출신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대한민국 정부는 초대 국방부 장관에 광복군 참모장 출신인 이범석을 임명했다. 국방부 차관 또한 광복군 출신 최용덕을 임명했으며, 주요 간부 자리에도 광복군 출신을 중용했다. 국군이 광복군의 정통성을 계승한 군대라는 것을 분명히 천명한 것이다.

광복군 출신으로 육군 장성까지 진급한 사람들을 살펴보자. 김홍일·안춘생·이준식·최덕신 등이 육군 중장, 권준·김관오·김국주·김용관·김영일·박시창·박영준·유해준·이성가·장흥 등이 육군 소장, 고시복·김동수·박기성·박영섭·송호성·오광선·장호강·정희섭·전성호·채원개 등은 육군 준장으로 전역했다.

제2대 공군 참모총장 최용덕과 제6대 공군 참모총장 김신은 공군 중장으로 예편했으며, 민영구 제독은 해군 소장으로 군 생활을 마쳤다.

이들뿐만 아니다. 6·25전쟁 초기인 1950년 8월 청송전투에서 전몰한 장철부 중령 등 젊은 대원들까지 합하면 광복군 출신 500여 명 중 200명가량이 국군에 복무했다. 비율로만 따져 보면 그리 적은 숫자가 아니다. 광복군 출신의 국군 참여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는 실로 크다. 대한민국 국군이 임시정부의 법통과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해산됐다. 하지만 대한제국군의 정통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한제국군은 의병, 독립군, 광복군, 대한민국 국군으로 면면히 이어졌다. 독립군과 광복군 간부 중 많은 사람이 대한제국군 출신이었으며, 대한민국 국군 창군을 주도한 사람도 대한제국군 출신이었다. 그 상징이 바로 유동열이다.

유동열은 1950년 6·25전쟁 중 납북돼 그해 10월 향년 71세에 세상을 떠났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필자 김선덕은 32년간 국방일보 기자, 국군영화 감독, 국방TV PD로 봉직한 군사연구가. 현재 공군 역사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실록 대한민국 국군 70년』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필자 김선덕은 32년간 국방일보 기자, 국군영화 감독, 국방TV PD로 봉직한 군사연구가. 현재 공군 역사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실록 대한민국 국군 70년』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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