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YS]아빠를 데려간 에카트강에 갔었어, 이제 슬픔보다 감사한 마음이 들어…

입력 2024. 05. 08   17:05
업데이트 2024. 05. 08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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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고 민병조 중령의 딸 민소영 씨 ‘사부곡’-“군인의 딸이라서 행복합니다”

2003년 3월 6일 여느 때와 같은 날,
아빠가 실종됐다는 연락을 받았어
돌아오겠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지…

아빠가 떠난 후 19년 만에 동티모르에 다녀왔어
내가 받은 따뜻한 환대는 상록수부대 덕분임을 알아

반딧불이가 반짝이던 저녁 산책길
군부대 옆 산에 올라 밤알 줍던 기억…
군인의 딸이라 남길 수 있던 추억들 감사해


8일은 어버이날입니다. 가까이 있든, 멀리 떨어져 있든 늘 그리운 부모님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그런 부모님을 더는 볼 수 없다면,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위험한 작전과 훈련 상황을 겪어야 하는 군인과 군인 가족에게 이러한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상록수부대 소속으로 동티모르 평화를 위해 힘쓰다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고(故) 민병조 중령(추서 계급)의 딸 민소영(KBS제주 기자) 씨가 아버지를 떠올리며 글을 보냈습니다.
정리=배지열 기자/사진=민소영 씨 제공 

 

2003년 1월 25일 파병 100일을 맞아 결의문을 읽는 상록수부대 7진 지원대장 고 민병조 중령.
2003년 1월 25일 파병 100일을 맞아 결의문을 읽는 상록수부대 7진 지원대장 고 민병조 중령.



해외파병 간 아버지의 실종 소식

매년 3월이면 하는 가족 연례행사가 있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다녀오는 것입니다. 20년 넘게 경부고속도로를 왕복하는 동안,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이였던 저도 어느새 사회인이 됐습니다. 마치 시간여행을 하듯 세월이 흘러, 그때 그 시절 아빠와 엄마의 나이가 됐습니다.

2003년 3월 6일은 여느 때와 같은 평범한 날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반년간 해외 파병을 나가 있는 동안 잠시 부산 외가에서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날은 입학식 후 첫 등교를 하고 온 날이었습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은 뒤 이모와 여동생이 함께 피아노를 치며 부른 찬송가 소리가 거실을 메운 평화로운 저녁, 누군가로부터 걸려 온 갑작스러운 전화 한 통에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아버지가 실종됐다는 군 관계자의 연락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간 나라는 동티모르였습니다. 인도네시아 유명 휴양지 발리와 호주 사이에 있는 작은 섬나라. 우리나라의 강원도 면적만 한 영토에 인구 100만여 명이 사는 이 나라는 당시 인도네시아로부터 갓 독립했지만, 한동안 유혈사태가 이어지는 등 혼란을 겪었습니다. 대한민국 상록수부대는 1999년 10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동티모르에서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했습니다. 5년간 3000여 명이 파병돼 동티모르 라우템주(州) 로스팔로스와 오에쿠시주에서 지역 재건 지원과 치안 회복, 교육·계몽·의료와 같은 각종 인도적 지원 임무를 펼쳤습니다.

아버지는 상록수부대 7진 지원대장으로 2002년 10월 동티모르로 떠났습니다. 월드컵 4강 열기가 아직 식지 않았던 가을이었습니다.

열악한 현지 상황 속에 아버지와 소통하는 길은 전화와 이메일이었습니다. 느리다 못해 몇 글자 입력조차 하기 힘든 열악한 현지 인터넷 사정 탓에 아빠의 이메일은 대체로 짧고 간결했지만 끝맺음은 늘 ‘사랑합니다, 안녕’이라는 인사말이었습니다.

2003년 3월 4일 마지막으로 받은 아버지의 이메일에는 “귀국까지 55일 남았다”며 보고 싶어도 조금만 참고 힘내라는 메시지가 담겼습니다. 아버지는 실종 연락을 받고 이틀 뒤 다른 장병들과 함께 숨진 채로 발견됐습니다. 4월 말에 돌아오겠다던 아빠의 말은 지키지 못한 약속이 돼 버렸습니다.

2022년 8월 4일 동티모르 오에쿠시주 시내에 있는 상록수부대 순직 장병 추모탑 앞에서 고 김정중 병장의 어머니 장홍여 여사가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2022년 8월 4일 동티모르 오에쿠시주 시내에 있는 상록수부대 순직 장병 추모탑 앞에서 고 김정중 병장의 어머니 장홍여 여사가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2003년 건립돼 2020년 재정비를 거친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순직 장병 추모비에 새겨진 고 민병조 중령에 관한 글.
2003년 건립돼 2020년 재정비를 거친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순직 장병 추모비에 새겨진 고 민병조 중령에 관한 글.

 


급류 휩쓸려 순직한 5명의 장병 

1진부터 7진에 이르기까지 상록수부대 장병은 내전과 갈등으로 상처 입은 동티모르 주민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헌신적인 치안 유지 활동과 봉사를 펼쳤습니다. 현지인들은 한국군의 정성에 마음을 열었습니다. 사고가 난 그날도 평소와 같이 임무 수행에 충실한 어느 하루였습니다. 

국방부의 당시 사고 조사 기록 등을 보면 2003년 3월 6일 오후 4시쯤, 상록수부대원 5명은 동티모르 오에쿠시 본부에서 60~80㎞ 떨어진 동·서티모르 국경지대인 빠사베에 배치된 파견대로부터 “발전기가 고장 났다”는 연락을 받고 이를 교체하러 현장으로 향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열악한 환경 탓에 발전기가 고장 나면 식료품을 보관하는 냉장고를 가동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초적인 업무에 필요한 전화를 주고받거나 무전기 배터리 충전조차 할 수 없던 상황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았을 터입니다.

발전기를 고치러 가려면 폭이 넓은 에카트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우기였던 이날은 기상 악화로 헬기를 이용한 운반이 어려웠습니다. 아버지와 장병들은 지프 2대에 나눠 타고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려 목적지로 향했습니다.

에카트강은 평소 물이 흐르지 않는 너른 건천이지만 상류에 많은 비가 내릴 땐 순식간에 강물이 차올라 빠르게 흐르는 곳입니다. 에카트강을 건너던 중 선행 차량 1대가 강 중간쯤에서 원인 모를 고장으로 멈춰 섰습니다. 5명이 차량을 견인하기 위해 체인 연결을 하는 사이 상류에 집중된 호우로 불어난 강물에 박진규 중령, 김정중 병장, 최희 병장이 순식간에 급류에 휩쓸렸습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현지 주민은 급류에 떠내려간 전우들을 찾는 아버지와 백종훈 병장을 향해 “물 밖으로 나오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백 병장은 “신고해 달라”는 뜻으로 전화하는 손짓을 남기고 휩쓸린 전우들을 구하러 강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결국 5명 모두 희생돼 이 가운데 4명의 시신이 강 하류 일대에서 차례로 수습됐고, 김정중 병장은 사고 발생 이후 수개월간 수색 작전을 펼쳤으나 2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실종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한국군이 숨지는 사고가 벌어진 후 지역 주민 수천 명이 강가로 나와 밤낮으로 실종자 수색에 자발적으로 나서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2022년 8월 4일 동티모르를 찾은 상록수부대 순직 장병 유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에카트강 추모공원 준공식 현장.
2022년 8월 4일 동티모르를 찾은 상록수부대 순직 장병 유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에카트강 추모공원 준공식 현장.



동티모르에서 느낀 군을 향한 감사 

2년 전 주동티모르 한국대사관 초청으로 다른 유족과 함께 동티모르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상록수부대가 주둔한 부지와 사고가 난 지역도 대사관 측 도움을 받아 둘러보고 올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실종된 에카트강은 생각보다 더 넓고 큰 강이었고, 아버지 일행이 발전기 수리를 위해 지나던 길은 지금도 지나갈 때마다 모래 먼지가 뿌옇게 이는, 울퉁불퉁한 바위와 흙길이었습니다. 대사관은 에카트강 인근 둔덕에 최근 추모공원을 건립했습니다. 

상록수부대가 동티모르를 떠난 지 20여 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오에쿠시 시내를 비롯해 차로 수시간 떨어진 외곽지역 어디를 가도 “안녕하세요” “꼬레아?”라면서 반갑게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한국과 상록수부대의 인연을 언급하는 현지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었습니다. 오에쿠시 어딜 가나 받을 수 있던 따뜻한 환대는 상록수부대 장병들이 동티모르인과 함께 흘린 땀과 눈물 덕분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숨을 거둔 땅에서 슬픔보다 감사하는 마음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아버지와 장병들은 대전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었습니다. 누구나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며 가족과 작별하는 때가 우리 가정에는 조금 일찍 찾아온 것일 뿐입니다. 바래질 때까지 입었던 군복, 바지 끝에 고무링을 차서 말아 올리고 끈을 죄어 신던 크고 딱딱한 아버지의 군화, 품에 파고들면 맡을 수 있던 옷에 밴 군인 특유의 향(?)과 담배 냄새는 서른 살이 한참 넘어서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반딧불이가 지천으로 깔려 노랗게 반짝이던 저녁 산책길, 군 관사 일대에서 쑥을 캐고 다슬기를 잡아 끓인 된장국, 군부대 옆 야트막한 산에 올라 줍던 밤알,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함께 놀아주고 네잎클로버를 붙인 작별 편지를 써준 군종병 아저씨,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사귄 친구들과 동사무소에 가면 꼭 ‘두 장 이상’ 받는 주민등록등본까지. 모두 군인의 딸이었기에 겪을 수 있던 일이자 어머니의 뒷받침과 희생으로 만든 소중한 추억이었음을 되새겨 봅니다.

다만 앞으로도 평생 아쉬워할 일이 있다면 사진관에서 찍는 그 흔한 가족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것입니다. 대신 아름다운 추억과 군 가족이라는 자부심은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사회인이 돼서도 어딜 가나 “아버지가 군인이에요”라는 자기소개를 빠뜨리지 않습니다.

오늘 어버이날, 아버지가 곁에 계신다면 빨간 카네이션 꽃바구니와 함께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군인의 딸이라서, 아빠 엄마의 딸이라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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