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병영] 베토벤 바이러스

입력 2024. 05. 02   15:24
업데이트 2024. 05. 02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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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병영


이송희 시인
이송희 시인

 



빗길에 미끄러진 소식들만 담을 넘고
굵고 질긴 빗줄기가 야윈 목을 감는 저녁 
두 귀를 걸어 잠근 채 
등 돌리고 걷는 사람들 


빗속에 귀가 잘리고 
말들도 토막 나고 
한숨도 울음소리도 네게로 되돌아가고 
오래된 금성라디오처럼 
자기 말만 틀어댄다 


귀 없는 섬들이 둥둥 도시를 떠다닌다 
서로의 귀를 향해 입을 여는 귀들이 
한때는 귀가 있었노라고 
귀걸이를 매단다 


<시 감상> 

일상(日常)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사회적이다. 일상은 생활의 바탕이 되면서 구속의 굴레가 되기도 한다. 일상의 풍경은 개별성과 사회성이 부자연스럽게 얽매여 일렁이는 물결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인은 생활인과 시인으로 살아가면서 일상의 균형추를 오르내리는 균열과 조화의 동선을 살피며 시를 짓는다. 2008년 MBC에서 방송한 인기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영상이 문득 떠오르는, 같은 제목의 이 시는 “두 귀를 걸어 잠근 채/등 돌리고 걷는 사람들”처럼 씁쓸한 일상의 풍경을 풍자(諷刺)한다.

우리는 상상하기도 버거운 축적된 지식과 유용한 대화의 도구를 손에 쥐고 디지털 시대를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이 더 나은 소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쌍방향 소통을 기대했던 SNS조차 오히려 일상의 대화를 자르고 토막 내는 잡음의 대열에 끼어들어 티격태격한다. 시인은 이런 부조리한 세태를 “오래된 금성라디오처럼/자기 말만 틀어대는” 일방성이 작동하는 일상에 비유한다. 말이 길을 잃고 말이 SNS의 총알이 되어 날아다니는 일상의 잠재된 불안과 위험을 짚어 보는 것이다.

소통을 잘하려면 경청이 중요하다고 너도나도 말은 잘하지만, 참으로 귀를 여는 이는 드물다. 듣기를 상실한 귀는 더 이상 귀가 아닐 것이다. 시인은 “귀 없는 섬들이 둥둥 도시를 떠다닌다”고 말한다. 더하여 그 귀들이 “서로의 귀를 향해” “한때는 귀가 있었노라고/귀걸이를 매단다”며 말을 맺는다. 소통 부재와 관계의 실상에 대한 드라마틱한 비유와 재치가 번뜩인다. - 차용국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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