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를 보았다

입력 2024. 04. 24   16:01
업데이트 2024. 04. 24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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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현의 페르소나 - 수사반장으로 돌아온 이제훈

홍길동 같은 의적
돈키호테 같은 이상주의자
전설의 박반장


동안에
무해함 느껴지는
눈빛과 미소
서툴러도 우직한
청년의 모습
그 순수함
잃지 마…
물들지 마…
변하지 마…

‘수사반장 1958’ 포스터. 사진=MBC
‘수사반장 1958’ 포스터. 사진=MBC



“파하~.” 이제훈이 그렇게 웃는 모습에 최불암의 모습이 겹쳐진다. MBC ‘수사반장 1958’의 한 장면이다. 1971년부터 1989년까지 방영된 레전드 드라마 ‘수사반장’. ‘수사반장 1958’은 그 리메이크작으로 극 중 최불암이 연기한 박영한 반장 역할을 이제훈이 맡았다. 당시 ‘수사반장’에 첫 출연한 최불암의 나이는 삼십대 초반이었지만, 박반장이라는 지위에 걸맞게 극 중 연령이 좀 더 많은 40세로 설정돼 있었다. 원작을 그대로 배경으로 가져왔다고 하면 이제훈이 맡아 연기하기에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는 배역의 연령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시간을 과거로 더 되돌렸다. 1958년. 박영한 반장의 이십대 시절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 이 인물이 반장이 됐는가 하는 걸 다루는 프리퀄이다.

그런데 1958년으로 굳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건, 이제훈에 걸맞은 이미지의 연령대를 찾기 위함만은 아니다. 그 시대상과 그것 때문에 도드라지는 이제훈의 돈키호테 같은 순수한 아웃사이더 이미지가 그 자체로 주는 메시지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모든 이가 불의에 굴복하거나 방관하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시대라면, 순수함이란 그 자체로 ‘반항’의 의미가 되기도 하지 않던가. 6·25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1958년은 대혼돈의 정치적 상황과 더불어 범죄와 불의가 일상인 치안 부재의 시대나 마찬가지였다. 상권을 폭력으로 접수해 돈을 뜯어가는 깡패들이 심지어 공권력과도 결탁해 돈과 권력을 구가하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전국에서 소도둑을 가장 많이 때려잡은 형사로 알려진 황천시의 촌놈 형사 박영한이 서장마저 깡패의 눈치를 보는 서울 종남경찰서의 꼴통 형사로 떠오르게 되는 건 그저 형사로서의 본분을 지키려 하는 것 때문이다.

최불암의 젊은 시절 모습이 좀체 연상되지 않지만 이제훈에게서 훗날 인간적인 수사반장의 씨앗을 느끼게 되는 지점이 있다. 그건 이 배우가 가진 순수한 청년 같은 이미지다. 이제훈은 ‘파수꾼’이라는 영화로 그 누구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등장함으로써 ‘충무로의 신데렐라’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여기서도 특유의 표현이 서투르고 그래서 반항기 가득한 아웃사이더 같은 청년 역할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제훈의 순수한 이미지가 대중적으로 확고해진 건 영화 ‘건축학개론’이다. 이 작품으로 상대 역할을 한 수지가 ‘첫사랑 아이콘’으로 떠오른 것처럼 이제훈 역시 순수한 청춘의 아이콘이 됐다. 그 특유의 동안에 무해함이 느껴지는 눈빛과 미소는 수지보다 10살이나 많았지만 이제훈을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동갑내기 대학생으로 믿게 만들었다.


‘수사반장 1958’ 포스터. 사진=MBC
‘수사반장 1958’ 포스터. 사진=MBC

 

‘수사반장 1958’ 포스터. 사진=MBC
‘수사반장 1958’ 포스터. 사진=MBC

 


하지만 이제훈은 그 후에도 ‘파파로티’ 같은 영화나 ‘비밀의 문’ 같은 드라마로 새로운 영역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 과정을 거쳐 김은희 작가의 ‘시그널’로 또다시 주목받았다. 미제전담팀의 프로파일러 역할로, 과거와 미래를 잇는 무전기라는 판타지 설정 자체를 믿게 만들어주는 진지하고 묵직한 연기를 선보였다. 여기서도 이제훈 특유의 순수한 이미지는 미제사건을 어떻게든 해결하려는 형사라는 배역과 맞물려 효과를 발휘했다. 이 캐릭터가 가진 간절함을 보다 절절하게 시청자들이 느끼게 해준 것이다.

이러한 간절함은 영화 ‘박열’ ‘아이 캔 스피크’에서 불의의 시대에 목소리를 내는 모습으로 펼쳐졌다. 이제훈의 순수한 청년 이미지는 이제 불의한 시대에 저항하는 이미지로 확장됐다. “내 육체는 자네들 마음대로 죽일 수 있겠지만 내 정신은 어찌 할 수 있겠는가”라며 일제 앞에서 일갈하는 박열이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옥분 할머니에게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던 민재를 통해 이제훈은 시대에 저항하고 싸워나가는 청년 이미지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이 이미지의 확장은 ‘모범택시’의 김도기라는 인물과 만남으로써 부정한 정의가 심판하지 않는 이들을 처단하는 서민영웅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모범택시’가 특히 이제훈에게 새겨넣은 정의의 페르소나가 강렬할 수 있었던 건, 그 판타지적 캐릭터의 밑그림으로 제공된 실제 현실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사건들이 있어서였다. 신안염전 노예사건, 위디스크에서 벌어진 엽기적 사건들, 김명철 실종사건, 유영철 연쇄살인사건 등 실제 신문 사회면에 나왔던 사건들이 드라마의 소재로 등장했다. 현실에서 공분을 일으킨 사건들이 등장했기 때문에 이를 사적 보복이라는 판타지로 처리하는 김도기란 인물에 대한 열광이 생겨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이제훈은 저 ‘건축학개론’의 그 풋풋하기만 했던 청년이 아니라, 불의한 세상에 분노하는 서민 영웅 이미지를 갖게 됐다.

그가 연기해온 역할들을 이처럼 하나씩 꿰어 들여다보면 ‘수사반장 1958’의 박영한 형사 같은 레전드 캐릭터에 왜 그가 캐스팅됐는가가 이해된다. 당대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박영한 형사는 마치 의적 홍길동 같은 서민 영웅에, 돈키호테 같은 타협 없는 이상주의자, 게다가 형사 본연의 임무를 잊지 않고 지켜나가는 우직한 순수함을 지닌 인물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이미지가 이제훈이 그간 해왔던 필모 안에서 발견된다. ‘모범택시’의 김도기가 가진 서민 영웅적 면모에, ‘박열’의 주인공 같은 이상주의자가 더해지고 ‘시그널’의 순수한 열정을 지닌 어떤 이미지의 결합체랄까.

이 모든 이제훈이 가진 페르소나의 가장 밑그림으로 놓여진 것은 결국 ‘순수한 청년’의 모습이다. 조금 서툴러도 올바르다고 믿는 것을 순수하고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청년의 모습. 어쩌면 이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다 자칫 잊어버리기 쉬운 우리 본연의 모습이 아닐까. 누구나 첫걸음은 다 그 청년의 모습이었을 게다. 세파에 흘러가다 보니 조금씩 변하게 됐을 뿐. 어느 날 문득 너무 멀리 왔다 느껴질 때 순간 얼굴을 보여주는 저마다의 청년들이 있을 것이다. 때론 그 순수한 청년의 목소리를 귀담아듣는 것도 복잡한 세상을 뚫고 나가는 길이라고 이제훈의 페르소나는 말해주는 듯하다.


필자 정덕현은 대중문화평론가로 기고·방송·강연을 통해 대중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MBC·JTBC 시청자위원을 역임했고 백상예술대상·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필자 정덕현은 대중문화평론가로 기고·방송·강연을 통해 대중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MBC·JTBC 시청자위원을 역임했고 백상예술대상·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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