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 테너가 바랐던 작고 완벽한 세상이란…

입력 2024. 04. 22   15:37
업데이트 2024. 04. 22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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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뮤·클 이야기 - 뮤지컬 ‘일 테노레’ 

한국 오페라의 선구자
이인선의 삶 다룬 창작뮤지컬
주인공에 홍광호·박은태·서경수
국보급 가창력 배우들 캐스팅
항일운동 소재로 스토리 힘 싣고
보석 같은 반전 엔딩 여운 남아

 

뮤지컬 ‘일 테노레’.
뮤지컬 ‘일 테노레’.



“야, 테너 한 명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냐. 바리톤하고는 비교도 안 된다고!”

고등학교 시절, 인문계에서 음대 진학을 준비하던 친구 말에 든 생각은 ‘과연 테너는 바리톤보다 우월하구나’라기보다는 ‘테너란 사람들은 자부심이 대단하구나’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성악을 전공한 뮤지컬 배우들 중에도 바리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 같다. 당장 생각나는 대로 꼽아본다면 최재림, 양준모, 윤영석, 카이, 김주택, 손준호, 전동석 등이 있다. 반면 테너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고음영역이 뛰어나 테너인 줄 알았던 인물들이 의외로 바리톤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경우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는 류정한과 카이가 그랬다. 이처럼 테너인지 바리톤인지 헷갈리는 경우는 바리톤 중 테너 음색에 가까운 하이바리톤이라고 보면 대충 맞다.

오늘 소개할 뮤지컬은 테너와 관련된 작품이다. ‘일 테노레(IL TENORE)’라는 제목부터가 이탈리아 말로 ‘테너’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이탈리아 뮤지컬은 아니고 ‘맨 오브 라만차’ ‘지킬앤하이드’ ‘드라큘라’ 등을 제작한 오디컴퍼니의 순수 창작 뮤지컬이다.

조선 최초의 오페라 테너가 주인공으로 작가와 작곡가는 한국 오페라의 선구자 이인선(1907~1960)의 삶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확실히 극의 주인공은 이인선과 닮은 데가 많다. ‘윤이선’이라는 극중 이름부터 이인선의 오마주처럼 느껴진다.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연세대 의대의 전신)를 다녔고, 미국인 선교사에게 성악을 배웠으며, 경성 부민관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설정은 이인선의 실제 삶과 같다.

물론 이 작품은 테너 이인선의 위인전이 아니므로 여기에 일제강점기 당시 젊은 대학생들의 항일운동 스토리가 더해진다. 항일운동 모임인 문학회 멤버들은 점점 강력해지는 총독부의 검열을 피할 방법을 모색하던 중 검열의 사각지대인 ‘오페라’를 공연하기로 한다. 처음에는 조선인의 항일의식을 일깨우는 문화활동으로 오페라 공연을 기획하지만, 총독부의 거물이 오페라를 보러 온다는 정보를 접한 핵심 멤버들은 오페라의 주인공 윤이선 몰래 암살을 노리게 된다.


뮤지컬 ‘일 테노레’.
뮤지컬 ‘일 테노레’.



‘윤이선’ 캐스팅을 보며 이 작품의 성격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윤이선’ 역을 맡은 홍광호, 박은태, 서경수는 대표적인 한국 뮤지컬계의 ‘노래귀신’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세 사람 모두 ‘테너’는커녕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홍광호와 서경수는 연기를 전공했고, 박은태는 심지어 경영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좀 더 껍질을 까보면 다른 사실들이 얼굴을 내민다. 여기까지는 봐 줘야 이들의 후덜덜한 가창력에 대해 ‘그럼 그렇지’ 하고 수긍할 수 있다.

홍광호는 대학에선 연기(중앙대 연극영화과)를 공부했지만 고등학교는 예고(계원예고)를 다녔고, 누나의 영향으로 뮤지컬 배우의 꿈을 일찌감치 갖게 됐다고 한다. 뮤지컬 꿈나무였던 셈이다.

한양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박은태는 2001년 강변가요제 동상 수상자 출신이다. 뮤지컬계 ‘고음대장’ 중 한 명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노래를 하면서 점점 소리가 뚫렸다고. 여기에 성악 레슨을 받는 등 본인의 땀이 더해져 현재의 박은태 사운드가 완성됐다.

서경수도 흥미롭다. 공식적으로는 경희대 연극영화과 휴학 중으로 되어 있는데, 국악고(한국국악예술학교)를 다녔다. 수시로 대학에 합격한 서경수는 성악과 선생님의 추천으로 지저스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추가 앙상블 모집 오디션을 보게 됐고, 여기에 덜컥 붙는 바람에 프로무대에 서게 됐으니 불과 19세의 나이였다.

홍광호의 ‘윤이선’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그가 파워 레버를 밀어 올릴 때마다 객석에선 허벅지에 전기가 찌릿하고 흘렀다. 마지막 장면의 여운도 이제는 ‘세계적’이 되어 버린 ‘한국적’ 감성으로 충만하다. 끝날 때가 되어서야 찾을 수 있도록 보석 같은 반전을 감추어 두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작가가 이런 엔딩을 처음부터 확고하게 정해두었을 것이라 믿고 싶다.

가장 좋았던 넘버는 ‘작고 완벽한 세상’. 윤이선에게 성악을 가르친 베커 여사가 윤이선에게 한 대사가 참 좋았는데, 아마도 “너의 마음, 노래로 다 들렸어”였을 것이다.

참, 서두에 등장했던 친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음대에 입학을 했고, 해외 유학을 거쳐 현재 모 음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아직까지도 테너부심을 부리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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