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금각사와 경계해야 할 극단주의

입력 2024. 04. 18   15:16
업데이트 2024. 04. 1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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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섭 전 연합뉴스TV 보도국장
이성섭 전 연합뉴스TV 보도국장




일본 교토에 있는 사찰인 긴카쿠지(金閣寺·금각사)는 3층 건물에 화려하게 금박을 입힌 교토의 상징 중 하나다. 로쿠온지(鹿苑寺·녹원사)가 정식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고도 교토의 문화재’ 중 하나다. 이달 초 교토 여행 중 둘러본 금각사는 연못을 앞에 두고 주변 꽃나무들과 어우러져 운치를 더했다. 특히 멀리서도 또렷하게 시야에 들어오는 금빛 누각은 눈길을 잡아끌었다. 금각사는 한때 방화로 소실됐지만 모범적으로 재건돼 명소로 거듭난 사례로 꼽힌다.

금각사 주변엔 각국에서 온 관광객으로 넘쳐났는데, 다른 교토 내 관광지보다 서양인이 더 많아 보였다. 금각사에 얽힌 문제적 인물과 사연의 특성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엔저 현상에 따른 일본 여행 추세에 편승해 교토로 향했지만, 간 김에 금각사는 꼭 봐야겠다는 계획을 내심 세운 것도 그 사연으로 인해서다.

금각사가 관심을 끄는 배경에는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작가 미시마 유키오(1925~1970)가 있다. 『금각사』를 제목으로 한 그의 장편소설은 1950년 7월 이 사찰에서 일어난 방화사건을 소재로 했다. 한 승려가 절대적 미를 추구하다가 좌절한 나머지 금각사에 불을 지르는 과정의 심리 흐름을 치밀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미시마는 소설가의 삶에 그치지 않고 일본의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빠진 극우주의자의 길을 걸은 끝에 할복으로 삶을 마감해 파장을 일으킨 인물이다.

미시마는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에 들어갔으나 곧 그만두고 소설가로 변신해 전후 최고의 탐미주의 작가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천황파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를 모티브로 한 1960년 소설 『우국(憂國)』을 시작으로 급진적인 민족주의자로 변신했다. 미시마는 급기야 1970년 11월 25일 도쿄 이치가야 육상자위대 동부총감부 총감실에 추종자 4명과 함께 진입해 총감을 인질로 잡았다.

미시마는 자신의 요구로 소집된 자위대원들을 2층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며 전쟁 포기와 국가 교전권 불인정 등을 규정한 전후 일본 평화헌법을 비판하면서 자위대의 궐기를 촉구했다. 건물 밖에서는 TV 방송이 이 광경을 생중계해 소동이 일었다. 그러나 자위대원들이 지지는커녕 야유를 보내자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총감실로 들어가 일본도로 복부를 그었다.

추종자 중 1명이 고통을 줄여 주려고 군도로 미시마의 목을 쳤다가 실패하자 자신도 할복했다. 결국 검을 쓰는 데 능숙한 또 다른 추종자가 이들의 목을 벴다. 사무라이식으로 할복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널리 알리려 했으나 그들의 최후는 의도대로 잘되지 않아 큰 고통을 겪으며 죽어 간 것으로 전해진다.

미시마의 자살 이후 일본 사회에서는 시대착오적인 망동이란 비판이 쏟아졌지만 동정론도 있었다. 그가 전후 일본 보수우익의 구심점 중 하나로 떠오른 배경이기도 하다. 그의 극우주의와 급진적인 민족주의를 이으려는 움직임은 잊힐 만하면 일본에서 고개를 든다. 아베 신조 전 총리 집권 땐 평화헌법 개정 시도 등 일본의 우경화 움직임이 일기도 했다.

평소에도 일본 정부·의회 지도자들은 패전일인 8월 15일에 야스쿠니신사에 공물료를 봉납하거나 참배해 주변국의 우려를 자아낸다. 일본은 협력하며 공동 번영을 모색해야 할 주요 이웃 국가이지만, 과거 침략사에 대한 진지한 반성의 자세가 전제되지 않으면 신뢰와 협력관계가 쉽게 깨질 수 있다. 금각사 방문은, 모든 극단주의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란 경구를 거듭 떠오르게 한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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