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년이 흘러도 퇴색하지 않을 메시지

입력 2024. 04. 18   15:38
업데이트 2024. 04. 18   15:52
0 댓글

우리 곁에, 예술
거리에서 만나는 예술, 공공조각-사월학생혁명기념탑, 조각가 김경승

7개 화강석 기둥 아래 청동상 6인
덤덤하면서도 결연한 혁명의 주체
민중을 반추상적 조각으로 형상화
탑 감싼 화강암 벽면의 ‘군상 부조’
민주주의 향해 나아간 ‘군중’ 표현
작가 친일 전력, 의미 퇴색 비판도

 

사월학생혁명기념탑. 출처=대한민국역사박물관
사월학생혁명기념탑. 출처=대한민국역사박물관



지난 4월 10일 제22대 국회의원선거가 치러졌다. 18세 이상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투표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선거는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선거는 공정하고 투명하게 치러져야 하고, 어떤 외압이나 부정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한국의 현대사를 살펴보면 그것이 쉽게 이뤄낸 결과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64년 전인 1960년 4월에는 많은 시민과 학생이 전국 각지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12년에 이르는 긴 기간을 장기 집권하던 자유당 정권 아래 치러진 3월 15일 선거에서 득표수 조작, 투표함 바꿔치기 등의 부정선거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같은 날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이에 정부는 총격과 폭력으로 강제 진압에 나서며 많은 시민과 학생이 다치거나 끌려가 고문당했다.

4월 11일, 마산시위 당시 실종된 고등학생 김주열이 시신으로 발견됨에 따라 분노한 시민들의 2차 시위가 일어났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학교에서 3000명의 학생이 선언문을 낭독하며 국회의사당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소위 정치깡패로 불리는 괴한의 습격으로 학생들이 큰 부상을 입거나 사망하는 사건이 또다시 발생했다. 4월 19일 분노한 시민과 학생들이 전국에서 투쟁에 참여했다.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며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지만 국민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이어졌다.

짧은 문장으로 4·19혁명을 설명했지만, 사실 혁명을 겪지 않은 세대가 이러한 서술로 당시 상황을 공감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어떤 사건의 의미를 마음에 새기고 공감하기 위해서는 때로 하나의 시각적 이미지가 더 유용할 수 있다. 시각적 이미지로 혁명을 기억하고 역사에 참여한 사람을 기리기 위해 상징적으로 조성된 것이 기념조형물이다. 기념조형물은 특히 공공장소에 건립돼 대중이 쉽게 마주칠 수 있어 더욱 효과적으로 그 의미와 상징을 전달한다.

4·19혁명은 그 중요성과 파급력이 적지 않은 역사적 사건이다. 이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2·28 대구학생 의거, 3·15 마산 의거 등 혁명의 과정이 이뤄진 장소에 기념조형물, 기념관 등이 건립됐고, 매년 4·19혁명 기념식이 개최되고 있다. 특히 기념식이 열리는 장소인 국립4·19민주묘지는 1963년 준공된 이래 4·19혁명의 역사를 알리고 당시 희생된 의인들을 추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4·19혁명의 배경과 내용 등을 전시한 기념관과 혁명정신을 기리는 ‘사월학생혁명기념탑’이 설치돼 있다. 1963년 건립된 ‘사월학생혁명기념탑’은 연설하는 사람들의 배경으로 언론을 통해 여러 차례 노출됐다. 묘지를 방문해 참배하는 사람들이 바라보며 묵념하는 참배단 앞에 놓여 있어 대중에게 꽤 낯익은 작품일 것이다.

이 기념탑은 1960년대 동상, 기념물 등의 제작에 활발히 참여한 조각가 김경승(金景承·1915~1992)의 작품이다. 약 21m에 이르는 우뚝 선 7개의 화강석 기둥 아래 6명의 사람이 서로 어깨를 기대고 몸을 맞대며 서 있다. 기념탑 주위에는 탑을 감싸며 병풍처럼 펼쳐진 화강석 벽면에 부조로 조각된 군상 조각이 있고, 양쪽 전방에는 ‘정의와 자유를 수호하는 형상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남녀 한 쌍의 수호자상이 배치돼 있다.



좌우로 길게 펼쳐진 벽면의 군상부조는 좌측부터 ‘암울했던 시대 상황과 자유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다. 우측으로 가면 ‘혁명 이후 민주화에 대한 희망을 묘사’했다. 이 중에서도 특히 화강석으로 제작된 기둥과 부조 조각 사이로 흑백의 대비를 이루며 서 있는 탑 하단의 청동 인물상(군상환조)은 기념탑의 주요 이미지로 언론에 많이 노출돼 왔다. 인체를 반추상 형태로 제작해 혁명에 참여한 민중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손을 모은 채 덤덤하면서도 결연한 자세로 역사의 증인이 된 사람들을 형상화하고 있다.

작품 설명에 의하면 청동 인물상은 ‘4·19혁명 당시 민중의 형상을 반추상적으로, 그날의 현장을 지켜보며 후세에 이를 증거하는 묵시적 형상을 표현’한 것이다. 사실 동상이나 기념비의 인물 조각이 대부분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는 것을 생각하면 반추상의 인물 표현은 다소 낯선 형태로 느껴진다. 이것은 4·19혁명 당시 익명의 군중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손을 잡고 나아갔으며, 특정 누군가가 아닌 ‘군중’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추모비, 탑, 기념관 등 기념물을 통해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기억하고 전달하기 위해서는 조형물의 표현 방식이나 형태 또한 매우 중요한 고려 대상이다. 여기에서 작가적인 판단이 드러나기도 한다. 천편일률적인 위인 동상 사이에서 새로운 조형을 시도한 ‘군상환조’는 작품이 드러내는 의미를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2009년 공개된 친일인명사전에 김경승이 등재되면서 그가 제작한 여러 위인상은 줄곧 철거 논란에 휩싸였고, 실제로 전북 정읍에서는 2021년 김경승이 제작한 ‘전봉준 장군 동상’을 철거하기도 했다. ‘사월학생혁명기념탑’ 또한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투사들의 묘역 앞에 설치돼 4·19혁명의 상징성과 의미를 퇴색시킨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미 제작된 기념물을 철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기념물은 그 자체보다 기념하고자 하는 목적이 중요한 만큼 그 의미와 상징성을 세심하게 고려해 판단해야 할 것이다.

4·19혁명은 낡은 것을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을 열어줬다는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대구 두류공원의 2·28 민주의거 기념탑, 대전 둔지미 공원의 3·8민주의거 기념탑, 경남 창원 3·15의거 기념탑, 마산 김주열 열사 동상, 광주 4월 혁명 발상 기념탑, 충주 4·19혁명 기념탑, 제주도 4·19혁명 기념탑, 인천 4·19혁명 기념조형물 등 전국에는 4·19혁명과 그 도화선이 된 사건들을 기념하기 위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주변에서 기념조형물을 찾아보며 올해 64주년을 맞이한 4·19혁명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필자 김유진은 공공미술에 대한 논문을 썼고, 문화라는 전체적 맥락 안에서 소통하고 공감하는 예술을 연구한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이다.
필자 김유진은 공공미술에 대한 논문을 썼고, 문화라는 전체적 맥락 안에서 소통하고 공감하는 예술을 연구한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이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