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에 있었던 비구니 절…왜 궁궐 가까이 있었을까?

입력 2024. 03. 28   16:36
업데이트 2024. 03. 28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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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보, 그때 그곳 - 정업원, 궁중 여인들이 쓸쓸한 삶을 산 곳 

지금 청룡사 터, 여승들 처소였지만
죄인 취급받던 왕가나 귀족 여성들
머리 깎아 가두는 공간으로 쓰여

태종의 이복 여동생 경순궁주
‘왕자의 난’ 피해 정업원으로 출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
남편 명복 빌던 곳엔 동망정 들어서

 

청룡사 옛 정업원 터. 필자 제공
청룡사 옛 정업원 터. 필자 제공



‘정업원(淨業院)’은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있었던 비구니 절이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청룡사가 들어서 있다. 비구니 절은 1251년 고려 고종 때부터 존재했다. 왕이 “박훤의 집을 정업원으로 만들고, 성 안에 있는 여자 중들을 모여 살게 하고 담을 쌓아 출입을 금하였다. 그전에는 여승들이 여염에 섞여 살므로 추한 소문이 있었다”(『고려사절요』 제17권)라는 기록에서 찾아진다. 

여승들이 스캔들을 일으키자 여승들만의 처소를 따로 만든 것이다. 박훤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과거에 급제한 뒤 무장으로서 왕을 대신하던 최우의 가신이 된 후 말재주로 요직에 올라 권세를 부린 자였다. 형부상서 때 최항을 비난했다가 흑산도로 귀양 갔는데, 최우의 소환으로 개경으로 돌아오던 중 최우가 죽으면서 최항의 자객에게 살해당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 박훤의 집이 수용당하면서 정업원의 효시가 된 것이다. 여승들의 공간이었지만, 죄인 취급을 받은 왕가나 귀족 집안의 여인들을 머리 깎아 가두던 공간이기도 했다. 충숙왕 시절이던 1316년 5월에는 “황주목사 이집의 아내 반씨가 불륜관계이던 호위병 김남준과 짜고 남편을 살해해 극형에 처해질 순간에 세도가이던 친정아버지 반영원의 구명운동으로 목숨을 구했으나 대사헌이 붙잡아 머리를 깎은 채 정업원에 가두었다”는 일화가 기록돼 있다(『고려사절요』 제24권).

고려가 망하자 고려조의 후궁들도 정업원에서 지냈다. 왕조가 바뀜에 따라 기거할 데가 마땅찮았던 까닭이었을 것으로 구보는 이해한다. 공민왕의 후궁이었던 혜비 이씨가 여승이 돼 정업원 주지로 있다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이 부의를 내려 준 기록이 있다(『태종실록』 8년 2월 3일). 조선조의 궁중 여인들도 오갈 데 없게 되면 이곳으로 보내졌다. 조선시대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를 억압했으나 정업원만은 예외로 뒀다. 구보는 이곳에 머물렀던 두 여인 덕이 아닐까 여긴다. 경순궁주(宮主)와 정순왕후였다.

경순궁주는 조선조 들어 최초로 정업원에서 지낸 왕가 여성이었다.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딸이자 태종의 이복 여동생이었으나 태종이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친오빠들인 세자 방석과 방번, 남편 흥안군 이제까지 모두 죽이자 아버지 태조의 권유에 따라 비구니가 돼 정업원으로 출가했다(『정종실록』, 1년 9월 10일). 당일 “경순궁주는 머리를 깎을 때에 임하여 눈물을 뚝뚝 흘렸다”고 실록은 덧붙였다.

 

 

1771년 영조가 세운 정업원 구기. 필자 제공
1771년 영조가 세운 정업원 구기. 필자 제공



남편 이제는 아버지 태조가 종성(宗姓·전주 이씨)의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성주(星州)이던 본관을 전주(全州)로 변경시켜 줬을 만큼 어여삐 여기던 사위였다(『태조실록』, 1년 9월 21일). 경순궁주가 정업원으로 들어간 것은 태종의 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궁주가 정업원에서 지낸 지 9년 만인 1407년에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덕수궁에 빈소를 차리게 하고 조문했다(『태종실록』, 7년 8월 7일). 

정종과 태종은 이복 여동생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며 “육선(肉膳·육고기 요리)을 들지 않았다”(『태종실록』7년 8월 7일)고 한다. 구보는 태종이 이복 여동생에게 불행을 안긴 데 대해 죄의식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한다. 경순궁주는 1872년 고종 때 경순공주로 봉해졌다(『승정원일기』 고종 9년 12월 1일).

정업원에 머문 또 한 명의 왕가 여인은 정순왕후 송씨(1440~1521)로 단종(1441~1457)의 왕비였다. 1454년에 왕비가 됐으나 1년 후 단종이 ‘계유정난’을 당해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기고 상왕이 되자 왕대비가 됐다. 다시 2년 후 성삼문·박팽년 등 사육신이 주도한 단종 복위운동이 발각되면서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돼 영월로 유배됨에 따라 군부인이 돼 궁에서 쫓겨나 숭인동 청룡사 옆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송씨는 생계를 위해 염색 일을 했다.

단종이 오래지 않아 유배지에서 역모죄로 죽임을 당하면서 송씨의 신분은 노비로 떨어졌으나 세조가 ‘신분은 노비지만 노비의 사역은 할 수 없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정업원으로 보냈다. 세조는 이에 앞서 정업원을 다시 지을 것을 명했다. 명분은 ‘양반 출신의 궁박한 과부와 여승들의 구제’였다(『세조실록』, 3년 9월 8일).

구보는 세조가 송씨를 염두에 두고 내린 결정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남편을 여읜 후 송씨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청룡사 뒤쪽 봉우리 바위에 올라가 동쪽 영월을 향해 통곡을 하며 남편의 명복을 빌었다. 그 바위는 ‘동망봉(東望峯)’이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남았다. 영조가 1771년에 ‘東望峯’ 석 자를 바위에 친필로 새기기도 했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서울지명사전』) .

정업원 옛터에 세워진 구기(舊基) 비각의 현판에 “앞산 뒷바위 천만 년을 가오리 신묘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다”라는 영조의 글이 담겨 있다. 일제강점기 때 동망봉 지역에 채석장이 들어서 깎여 나간 탓이었다. 대신 청룡사 옆에 ‘동망정’이라는 정자가 들어섰다.

정업원은 연산군 때 폐사됐다가 명종 때인 1551년 인수궁이 중창되면서 대비 문정왕후의 요청으로 궁내 부속 불당으로 다시 설치됐으나 현종 2년인 1661년 인수궁이 철폐됨에 따라 함께 없어졌다. 인수궁은 원래 태종이 자신의 사후 후궁들을 기거하게 하려고 사저에 지은 궁으로, 그 후에도 의지할 데 없는 궁중 여인들이 노후를 보내던 처소였다(『동국여지승람』). 태종의 사후 후궁들은 일제히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됐다(『세종실록』 4년 5월 20일). 그때부터 왕이 죽으면 후궁들은 여승이 돼 인수궁으로 들어가는 게 관례였다.

숙종 24년에 이르러 “세조의 단종 살해는 측근들에 휘둘린 탓으로 세조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현종 때 송시열과 김수항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단종과 정순왕후는 복위돼 종묘에 배향됐고, 정순왕후가 묻혀 있던 묘는 왕릉의 능호를 받아 ‘사릉(思陵)’으로 정해졌다. 열여섯의 나이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남편을 평생 그리워한 사연이 반영된 이름이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다.

구보는 ‘지은 죄를 정화’한다는 ‘정업(淨業)’이란 단어는 경순궁주와 정순왕후가 아닌 가족을 찢어 개인의 삶을 망가뜨린 가해 권력자들에게 사용해야 타당하다고 여긴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 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 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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