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수립 후 황제 직속 군령기관 ‘원수부’ 창설

입력 2024. 02. 05   16:51
업데이트 2024. 02. 05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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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군인들 - 30. 대한제국 수립과 원수부 설치 

고종, 아관파천 이후 친러 내각 구성
러시아 군사교관단 중심 군제 개편
입헌군주제 요구 독립협회 강제 해산
황권 강화 위해 군사제도 개편 나서
중앙·지방 부대 직접 지휘한 원수부
무관만으로 선임…최대 2만8000명
황제와 황태자에게 모든 권한 집중
황실 호위에만 주력 국방에는 소홀

대한제국 중앙군이 훈련하는 모습. 필자 제공
대한제국 중앙군이 훈련하는 모습. 필자 제공



1896년 2월, 고종과 왕세자가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관파천’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러시아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이범진, 이완용 등 친러파를 기용해 친러시아 내각을 구성했다.

이어 ‘을미사적’으로 불리는 총리대신 김홍집, 내부대신 유길준,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군부대신 조희연과 법부대신 장박의 처형을 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민 왕후 시해에 가담한 혐의가 있는 권형진, 이두황, 우범선, 이진호, 이범래 등 군부와 경찰의 전·현직 고위직도 참수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 결과 김홍집과 정병하, 탁지부대신 어윤중 등이 붙잡혀 살해됐다. 하지만 유길준을 비롯한 나머지는 일본으로 도주해 화를 면했다.

고종은 친위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러시아 군사교관단을 초빙했다. 1896년 10월 푸챠타(Putiata) 대령 등 러시아 군사교관단이 입국했다. 러시아 군사교관단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러시아식 군대 편제와 훈련체계가 도입됐고, 이후 군대와 정계에 친러시아적 성향의 군인들이 등장한다.

1894~1896년은 정치적 혼란기였다. 청일전쟁, 갑오개혁, 을미사변, 을미의병 봉기, 그리고 그로 인해 이어지는 아관파천. 이런 엄청난 정치적 변혁은 조선의 군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큰 변화는 일본식 군제에서 러시아식 군제로 교체된 것이다.

고종이 1년여 동안이나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해 있자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하는 지식인층이 환궁할 것을 호소했다. 독립협회는 미국에서 환국한 서재필과 국내 지식인층이 1896년 7월에 결성한 최초의 근대적 사회정치단체였다.

1897년 2월, 고종이 결국 러시아공사관과 가장 가까운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12일 황제에 즉위했다. 10월 13일엔 1392년 이래 사용해 왔던 ‘조선’이라는 국호를 ‘대한’으로 개정·반포했다. 대한제국이 수립된 것이다.

이후 정부와 독립협회 간 나라 정체(政體)에 관한 의견 대립이 계속됐다. 친러파가 장악하고 있는 정부는 전제군주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독립협회는 의회 중심의 입헌군주제를 내세웠다.

독립협회는 친러수구파의 퇴진과 의회 설립을 요구했다. 독립협회는 왕은 상징적으로 존재하고, 실질적인 국정은 의회가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고종의 구상은 달랐다. 개화는 하되 황실을 중심으로 천천히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1898년 3월, 고종이 러시아 재정고문과 군사교관단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고종이 러시아에 각종 이권을 건네주자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반러감정이 고조됐기 때문이다. 의외로 러시아가 순순히 물러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러시아 정부의 극동정책이 만주에 집중하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일본에 이어 러시아까지 한반도에서 물러남으로써 고종에게 황권을 강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1898년 12월, 고종이 독립협회를 강제로 해산했다. 이어 군사제도를 개혁해 황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군제 개혁의 목적은 황제 중심의 군대 육성이었다. 독립협회 같은 재야 정치단체가 황제의 권한을 견제하는 시도를 원천 봉쇄하고자 한 것이다.


대한제국군 대원수인 고종(왼쪽) 황제와 원수 황태자 이척(순종). 문화재청 제공
대한제국군 대원수인 고종(왼쪽) 황제와 원수 황태자 이척(순종). 문화재청 제공



1899년 6월 22일, ‘원수부규칙(元帥府規則)’을 제정하고 황제 직속의 군령기관인 원수부를 황궁(경운궁) 안에 창설했다. 대원수인 황제가 친히 모든 군대를 관리하고 원수인 황태자가 통솔하는 제도였다.

이로써 황제가 국방·용병·군사에 관한 모든 사항을 장악할 뿐 아니라 중앙과 지방의 각 부대까지 직접 지휘하게 됐다. 한마디로 군권 전부를 황제가 갖게 된 것이다. 이로써 황제의 칙령이나 조칙이 없으면 그 누구도 군대에 명령을 내릴 수 없게 됐다.

황제가 대한제국의 모든 군대를 통솔하게 됨에 따라 군부(軍部)가 갖고 있던 권한이 대폭 축소됐다. 군부대신에게는 일반사무 행정권한만이 주어졌다. 모든 권한은 원수부에 집중됐다. 원수부에 국방 및 작전계획, 군대 편성, 군대 교육, 부대 검열, 군인 상벌, 회계 등 광범위한 권한이 부여됐다.

문관도 복무할 수 있는 군부와 달리 원수부의 관원은 무관만 선임할 수 있다고 법으로 정했다. 원수부에는 군무국(軍務局), 검사국(檢査局), 회계국(會計局), 기록국(記錄局) 등 4국이 설치됐다. 국장은 장성급을 임명했다. 1900년 3월에는 4국 국장의 명칭이 총장으로 격상됐다.

이들 국장(총장)은 황제의 칙령을 받아 각 부 대신에게 지령할 수 있었다. 원수부는 정부를 거치지 않는 독자적인 집행구조였다. 지방관에 대한 명령 지휘계통도 원수부-군부-관찰사-군수 순서로 이뤄지게 됐다. 황제의 친위세력인 원수부의 위상은 정부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대한제국군의 계급체계도 이때 완성됐다. 계급체계는 1894년 12월에 제정된 ‘육군장관직제(陸軍將官職制)’에 이어 1899년 6월, 원수부를 설치하며 완성됐다. 대원수는 황제가 겸임했으며 원수는 황태자의 자리였다. 장성은 대장(大將), 부장(副將), 참장(參將)의 세 계급이 있었다. 대장은 지금의 대장, 부장은 중장, 참장은 소장에 해당한다. 현재와 같은 준장 제도는 없었다. 참고로 대한제국군에서 부장까지 올라간 사람은 있어도 대장까지 진급한 사람은 없었다.

군제 개편에 따라 중앙군과 지방군도 다시 편성했다. 한성의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양대 중앙군인 시위대와 친위대를 연대 규모로 증강했다. 포병대대, 공병중대, 치중병대, 군악대까지 갖춰 임시 혼성여단 편성도 가능하게 했다. 황제의 호위를 전담하는 호위대(扈衛隊)도 새로 창설했다.

1902년부터 1905년 초까지 대한제국군의 병력은 중앙에 4개 연대, 지방에 18개 대대로 확장됐다. 중앙군은 시위대가 보병 2개 연대와 포병 1개 대대, 기병 1개 대대를 합친 5000여 명, 친위대가 2개 연대 4000여 명으로 총 9000여 명이었다. 지방군인 진위대(鎭衛隊)는 18개 대대 1만8000명에 달했다. 여기에 황제를 호위하는 호위대 730여 명과 헌병대 등을 포함해 총 2만8000여 명이었다.

고종은 대한제국 시기 군사력을 증강하고자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지만, 효율적이지는 못했다. 중앙군인 시위대와 친위대의 임무는 오직 황실을 지키는 것이었고, 지방군인 진위대의 주 임무는 치안 유지였다. 정작 국방이라는 가장 큰 임무엔 소홀했다. 나라를 지키는 군대가 아니라 황제를 지키는 군대였던 것이다.

필자 김선덕은 32년간 국방일보 기자, 국군영화 감독, 국방TV PD로 봉직한 군사연구가. 현재 공군 역사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실록 대한민국 국군 70년』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필자 김선덕은 32년간 국방일보 기자, 국군영화 감독, 국방TV PD로 봉직한 군사연구가. 현재 공군 역사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실록 대한민국 국군 70년』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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