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뮤·클 이야기 - 첼리스트 허정인
속이 꽉 찬 특유의 울림으로 절제·시원함 조화된 선율로…
첼로 소나타 5곡 전곡 음반 출시
독주회서 더 짙고 선명한 연주 선사
통상적 베토벤의 음악적 형상 벗어나
끝 모를 숲길 걷는 듯 환상적 공연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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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베토벤 씨 아니십니까.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이런 데서 혼자 차를….”
“용케 나를 알아보셨구먼. 가끔 이곳에서 술 대신 차를 마시곤 한다오. 방해받지 않고 혼자 음악을 들을 수 있거든.”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린 첼리스트 허정인(34)의 독주회를 다녀왔다. 베토벤이 남긴 5곡의 첼로 소나타 전곡 음반을 최근 출시한 허정인은 이날 독주회에서 음반에 수록된 소나타 전곡을 연주했다.
라이브와 음반의 연주는 즐기는 ‘맛’이 다르다. 맛이 다른 만큼 재미도 다르다. 음반은 여러 번 반복해 듣기에 부담이 없도록 녹음한다. 감정의 과잉은 어느 정도 자제하는 것이 불문율. 한 번 들을 때는 좋지만 여러 번 듣기에는 느끼해 쉽게 물려 버린다. 반면 라이브는 단 한 번, 순간의 예술이므로 감정의 고양이 어느 정도 허용된다. 더 짙고 선명하다. 깎고 다듬는 보정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에 날것의 식감이 생생하다.
음반에서 담백한 연주를 들려줬던 허정인은 라이브에서 80%쯤만 내밀었던 발톱을 120% 꺼내 들었다. 그동안 치열하게 파고들었던 베토벤. 그의 음표들이 무대와 객석에 가득 뿌려져 사금처럼 반짝였다.
무대 위에서 첼로를 끼고 앉은 허정인은 속이 꽉 찬 특유의 소리를 앞세워 베토벤의 거대한 심연으로 성큼성큼 내려갔다. 그야말로 일직선의 쾌주. 뼈대가 고스란히 드러난 조감도와 같아 시원시원하다.
분명 절제돼 있으나 답답함이 없다. 일리야 라슈콥스키의 피아노는 드럼에 딱 붙은 베이스처럼 허정인의 첼로와 공진한다. 때때로 두 악기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묘하게 배합돼 마치 제3의 악기와 같이 울렸다.
음반도 마찬가지. 확실히 베토벤을 연주할 때는 다른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할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통상적인 베토벤의 음악적 형상을 벗어나 있는데, 조금도 이질감이 없다. 선입견이 만들어 낸 베토벤이 확장돼 있다. 종종 브람스의 걸음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특히 느린 악장에 진득하게 배어 있는 감성의 색감이 너무나 아름다워 신음이 나올 정도다.
어릴 때 좋아했던 파블로 카살스의 음반 속 베토벤이 질퍽한 농토를 밟는 것 같았다면, 허정인의 베토벤은 숲길을 상큼상큼 걷는다. 카살스의 흙냄새는 덜하지만 대신 향긋한 나무향을 곳곳에서 뿜어댄다.
라슈콥스키의 반주도 늘 그렇듯 음악적 센스가 좋다. 허정인의 스타일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허정인은 예원학교, 서울예고, 서울대 음대를 나왔으며 독일 라이프치히 국립음대, 뷔르츠부르크 국립음대와 프랑스 리옹 국립고등음악원에서 유학했다.
그는 현재 국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연주 활동을 하는 첼리스트 중 한 명이다. 놀라운 것은 2021년 롯데콘서트홀 공연이 그의 첫 공식 국내 활동으로 기록돼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클래식 팬들의 머릿속에 ‘첼리스트 허정인’이 각인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2년이 되지 않았다는 얘기로, 심지어 이 기간 중 상당 부분은 코로나19 팬데믹과 겹친다.
이 짧은 기간에 허정인은 독주, 초청 연주, 실내악 등 다수의 연주 활동은 물론 자신의 이름을 내건 3장의 음반을 냈다. 이쯤 되면 음악적 괴력에 가깝다.
사실 그는 한 차례 귀국을 한 적이 있다. 5년간의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이른바 ‘귀국독주회’까지 열었던 그가 다시 프랑스로 떠난 이유는 딱 하나. 세계적인 첼리스트 안 가스티넬에게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부모님은 첼로를 공부하는 딸을 위해 음악적 조언을 해 줄 순 없었지만, 대신 음반을 잔뜩 사다 줬다고 한다. 어느 날 레코드숍에 갔다가 흘러나오는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가 너무 아름다워 “지금 나오는 연주자의 음반으로 달라”고 해 딸에게 줬는데, 이후 이 연주자는 허정인 표현으로 “요즘으로 치면 방탄소년단(BTS) 같은 존재”가 돼 버렸다.
허정인은 이 연주자의 음반을 듣고 또 들었다. 그의 내한공연 때는 사인회까지 찾아가 그동안 모은 음반을 왕창 내밀었단다. 연주자는 “이 오래된 음반을 갖고 있네?”라고 신기해하며 한 장 한 장 사인을 해 줬다고 한다.
이 음반의 연주자가 바로 훗날 허정인의 스승이 된 첼리스트 가스티넬이었다. “스승과 제자로 만났을 때 사인받은 얘기를 했느냐”고 물으니 허정인은 “워낙 쿨한 분이셔서 안 했다”며 웃었다.
TMI 하나. 허정인은 본격적으로 첼로를 시작하기 전, 초등학교 시절엔 쇼트트랙 선수였다. 청원초등학교 대표로 전국대회 왕중왕전까지 진출한 적도 있다. 어린 시절의 선수 경험은 첼리스트로 살아가는 데 든든한 ‘비빌 언덕’이 됐다. 특히 무대 연주자에게 요구되는 체력과 지구력이 그렇다.
베토벤 전곡 연주회가 끝난 후 객석에 있던 옛 스승이 “정인이 너 보니 우리 애들 보고 스케이트 타라고 해야겠다”고 했단다. 또 다른 지인은 “오늘 2시간 반을 연주했는데, 한 번 더 하라면 할 거 같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이날 독주회는 다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는 4번 소나타 1악장에서 들려준, 끝 모를 숲길을 혼자 걷는 듯한 환상적인 연주가 무척 좋았다. 2번의 1악장 역시 조금은 다른 사색의 질감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에 진하게 이염돼 버렸다.
베토벤은 어쩐지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고, 다변이었다. 말을 섞는 소통보다 조금은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는 게 나을 때가 있다. 마치 혼자 차를 마시고 있는 베토벤을 몰래 발견한 것처럼. 이날 허정인의 베토벤이 조금은, 그랬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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