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을 말하다] (20) 끝 - ‘흥남철수작전 산증인’ 이경필 수의사

입력 2023. 12. 01   17:06
업데이트 2023. 12. 03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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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속 희망의 상징 “내 이름은 ‘김치 파이브’입니다”

흥남 피란선에서 출생
73년전 크리스마스 기적이었던 김치로 불린 다섯 아이 중 하나
미군·빅토리호 선원의 용기 장진호전투의 희생
그 덕분에 우리가 살 수 있어

한미동맹은 목숨 구해준 존재
‘평화·은혜·나눔’ 되새겨
기념공원 조성이 내 마지막 꿈


이옹이 태어난 메러디스 빅토리호. 출처=거제시 ‘장승포 옛 사진·옛 물품 기증 자료집’
이옹이 태어난 메러디스 빅토리호. 출처=거제시 ‘장승포 옛 사진·옛 물품 기증 자료집’


탄생의 순간부터 기적이었다. 경남 거제도 장승포에서 가축병원을 운영하는 이경필(73) 수의사의 이야기다. 73년 전인 1950년 12월 25일 흥남철수작전 현장, 피란민 1만4000여 명이 탄 미국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철수 중이던 이날 하루 동안에만 5명의 아이가 빅토리호에서 세상을 만났다. 갓난아이를 감쌀 모포 하나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다행히 모두 건강했다. 선원들은 기적처럼 태어난 아이들에게 한국을 상징하는 ‘김치(kimchi)’라는 애칭을 붙였다. 이옹의 또 다른 이름은 ‘김치 파이브’다. 빅토리호에서 다섯 번째로 태어난 아이라는 뜻이다. 그는 미군과 선원들의 용기·희생 덕분에 자신이 세상 밖에 나올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국방일보 연중 기획 ‘한미동맹을 말하다’ 마지막 주인공인 그에게 한미동맹은 ‘생명을 구해준 소중한 존재’다.


어린 시절 찍은 가족사진. 가운데 작은 아이가 이옹. 본인 제공
어린 시절 찍은 가족사진. 가운데 작은 아이가 이옹. 본인 제공


73년 전 그날의 이야기

“장승포가 거제도에서 가장 큰 항구였어요. 육지와 이어지기 전엔 부산을 오가는 여객선도 이곳에서 출발했죠. 피란민을 가득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도 그래서 장승포로 왔겠죠. 장승포 앞에 지심도란 작은 섬이 있는데, 이 섬을 가릴 정도로 화물선이 거대했다고 합니다.”

거제 앞바다에서 태어난 이옹은 73년이 지난 지금도 장승포에 거주하고 있다. 항구에서 도보 3분 거리 장승포가축병원 건물이 그의 자택이자 집무 공간이다. 인터뷰는 지난달 28일 그의 병원에서 진행됐다.

배에서 태어난 이옹은 그날 수송선을 타고 육지를 밟았다. 부모님 품에 안긴 채였다. 거제 주민들은 부두로 나와 북에서 온 피란민을 마중했다. 주민들은 거제 특산물인 멸치를 넣은 주먹밥도 만들어왔다.

“갓 태어난 아이가 있어 우리 가족이 가장 먼저 수송선을 탔다고 합니다. 육지에 도착한 피란민들은 장승포초등학교로 모여 일종의 주민신고를 했어요. 그리고 장승포를 포함한 거제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졌죠. 주민들은 피란민을 위해 방을 나눠주거나, 밭에 움막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부모님과 형, 저까지 네 가족이 작은 단칸방에서 살았죠.”

북에서 사진관을 운영했던 이옹의 아버지는 피란길에 챙겨온 카메라 2대로 ‘평화사진관’을 열었다. 당시 거제도에서 카메라를 보유한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마을 경조사가 있을 때면 카메라를 들었고, 집에 돌아올 땐 맛있는 음식을 들고 왔다. 이옹의 기억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 장면들이다.


흥남철수작전 중 미국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태어난 ‘김치 파이브’ 이경필 옹이 장승포항 방파제를 가리키고 있다. 1950년 12월 25일 거제도에 도착한 피란민은 이 방파제를 따라 육지로 이동했다고 한다.
흥남철수작전 중 미국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태어난 ‘김치 파이브’ 이경필 옹이 장승포항 방파제를 가리키고 있다. 1950년 12월 25일 거제도에 도착한 피란민은 이 방파제를 따라 육지로 이동했다고 한다.


장병·피란민과 함께한 흥남철수작전

다시 1950년 12월로 돌아가, 빅토리호가 피란민을 태운 곳은 함경남도 흥남항이었다. 압록강·두만강 인근까지 진격했던 유엔군과 국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후퇴를 결정했다. 흥남항에서만 병력 10만 명이 철수했고, 이보다 2배 많은 피란민이 흥남항으로 몰렸다. 그중에는 이옹의 가족도 있었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흥남철수작전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지만, 많은 수의 피란민이 항구를 떠나지 못했다. 그때 폭 19m, 길이 138m의 화물선 빅토리호가 흥남항에 들어왔다. 선원들은 최대한 많은 피란민을 배에 태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빅토리호 레너드 라루 선장은 사무장에게 ‘1만 명까지 세라’고 했어요. 그런데 1만 명이 넘어서도 계속 승선하니 나중엔 세는 것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1만4000명보다 더 탔을 수도 있던 거죠. 화물칸뿐만 아니라 갑판까지 피란민으로 가득 찼죠.”

빅토리호는 12월 23일 출항해 다음 날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하지만 부산항은 군수물자와 몰려든 피란민으로 포화 상태였다. 결국 빅토리호는 12월 25일 뱃머리를 돌려 거제 장승포로 향했다. 그리고 이날 항해 중 이옹을 비롯한 다섯 아이가 탄생했다. 빅토리호는 가장 많은 인명을 구조한 배로 2004년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피란길 지킨 장진호전투 

이옹은 흥남철수작전과 더불어 장진호전투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장진호전투는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미 해병1사단을 비롯한 유엔군이 개마고원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던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에 도착하기까지 2주간 전개한 철수작전이다. 대규모의 중공군을 저지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 피란민 등 20만여 명이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장진호전투에서 미 해병대뿐만 아니라 많은 장병이 전사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덕분에 동부전선이 수일간 지켜질 수 있었고, 많은 피란민이 북을 떠나 자유의 품에 안길 수 있었습니다. 흥남철수작전 성공 뒤에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옹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10년 전 미국을 방문했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미동맹 60주년을 기념해 미 10군단 부참모장으로 흥남철수작전을 지원했던 에드워니 포니 대령 가족과 미 재향군인회에 감사패를 전달한 적이 있습니다. 포니 대령은 피란민 철수를 적극 주장했던 인물이었죠. 현지에서 장진호전투 참전용사도 만났는데, 저를 보더니 눈물을 참지 못하더라고요. 돌아가시기 전 부모님도, 저도 늘 장진호에서 중공군을 막은 미군 덕분에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평화·은혜·나눔’, 그리고 흥남철수기념공원

이옹의 명함엔 ‘kimch 5’라는 영어 이름과 함께 ‘평화·은혜·나눔’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평화’는 6·25전쟁 같은 비극이 반복돼선 안 된다는 의미에서, ‘은혜’는 자신과 가족을 살린 미군과 빅토리호 선원에게 보답하는 마음에서, ‘나눔’은 낯선 피란민을 보듬어준 거제 주민에게 감사한 마음이 담겼다고 이옹은 부연했다.

그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수의사 업무를 계속하고 있다. 거제도엔 소 2000마리가 있는데, 가축을 전문으로 하는 수의사는 섬에서 이옹이 유일하다고 한다. 그는 “내가 일을 그만두면 소들은 다 어떡하냐?”며 웃음을 보였다.

이옹은 대학과 군 복무를 제외하곤 70년 가까이 거제에서 살았다. 수의학과를 졸업한 그는 육군 ROTC 11기로 임관해 철원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1975년 전역한 뒤 가축이 많은 충남 서산에 자리를 잡으려 했지만, ‘거제도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곤 장승포로 향했다. 병원도 같은 해 장승포에 개업했다.

그의 첫째 아들은 군인이다. 공군공중기동정찰사령부에 근무하는 이정영 대령(진)이다. 명절이나 돼야 아들 얼굴을 본다고 이옹은 말했다.

그의 마지막 꿈은 장승포에 흥남철수기념공원을 조성하는 것이다. 경상남도·거제시와 협력해 여객선 터미널 일대에 1만평 부지도 마련된 상태다. 터미널 건물을 리모델링해 기념관을 만들고, 맞은편 부두에 빅토리호의 ‘쌍둥이 화물선’을 정박해 놓겠다는 구상이다.

“흥남철수작전 주역인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고철로 팔려 없기 때문에, 비슷한 레인 빅토리호를 인수할 계획입니다. 레인 빅토리호도 6·25전쟁 때 피란민을 실은 화물선이죠. 미국에서 인수해야 하는데, 100억 원이 넘게 들 것으로 예상합니다. 비용을 떠나 흥남철수작전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선 반드시 배를 가져와야 합니다. 기념관에는 장진호전투 전시관도 꾸릴려고 합니다.”

이옹은 한미동맹 기념행사나 흥남철수작전 관련 행사에 꾸준히 참석하고 있다. 자신을 살린 미군에 감사한 마음을 담아서다. 지난달 11일에도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을 맞아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찾았다.

흥남철수작전에 투입된 미 화물선에서 태어난 그에게 ‘한미동맹은 어떤 의미’일까? 이옹은 ‘우리 생명을 구해준 존재’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장진호전투 희생 덕분에, 1만4000명을 구출한 용기 있는 결정 덕분에 우리가 살았습니다. 저에게 한미동맹은 목숨을 구해준 존재입니다. 북에서 온 피란민이 2대, 3대, 4대까지 이어지며 1000만 인구라고 합니다. 1950년 12월, 미군과 빅토리호 선원은 1000만 명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글=이원준/사진=이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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