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사 영웅, 71년 만에 아들과 재회

입력 2023. 09. 25   17:22
업데이트 2023. 09. 26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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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인사사 무공훈장찾아주기조사단
고 김경용 이등중사 현충원 안장 확인
전역서 전사로 기록 오류도 바로잡아
화랑무공훈장 전도 수여·추모식 거행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고 김경용 이등중사의 아들 김동수(가운데) 씨가 25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6·25무공훈장찾아주기조사단의 무공훈장 전도 수여식에서 신기진(대령·맨 왼쪽) 조사단장으로부터 화랑무공훈장과 훈장증서를 전수받고 있다. 김병문 기자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고 김경용 이등중사의 아들 김동수(가운데) 씨가 25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6·25무공훈장찾아주기조사단의 무공훈장 전도 수여식에서 신기진(대령·맨 왼쪽) 조사단장으로부터 화랑무공훈장과 훈장증서를 전수받고 있다. 김병문 기자



“이렇게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자기 가족처럼 기꺼이 도움을 준 조사단원들의 역할이 컸습니다.”(고 김경용 이등중사 아들 김동수 씨)

같은 땅에 있으면서도 서로를 확인하지 못했던 호국영웅과 아들이 71년 만에 눈물겨운 재회를 했다. 국가는 아들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전수하며 뒤늦게 찾은 호국영웅에 대한 예를 다했다. 이 모든 것의 배경에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선배 전우를 찾아낸 육군의 노력이 있었다.

육군인사사령부 6·25무공훈장찾아주기조사단(조사단)은 25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6·25전쟁 전사자 고(故) 김경용 이등중사를 추모하고 유가족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전도 수여하는 행사를 개최했다. 

김 이등중사는 1950년 9월 17일 32세라는 늦은 나이에 입대해 국군8사단 21연대 소속으로 전장에 뛰어들었다. 이후 각종 전투에서 활약하던 그는 나이 많은 병사를 전역시키는 ‘연로제(年老制)’에 따라 1952년 6월 1일 자로 전역이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김 이등중사는 전역을 이틀 앞둔 1952년 5월 29일 강원도 인제지구전투에서 중상을 입었다. 그는 6월 2일 제36육군병원으로, 같은 달 14일엔 제27육군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 1월 23일 숨을 거뒀다. 유해는 전상(戰傷) 처리된 채 27육군병원 소속으로 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그러나 긴박한 전장 상황에서 그의 죽음은 허공에 떠 버렸다. 사망 기록이 원 소속 부대인 8사단 21연대에 전해지지 않은 것. 결국 그는 ‘전사’가 아닌 ‘전역’으로 기록됐다.

김 이등중사의 가족들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 전역한 그가 돌아오지 않자 지금까지 어디선가 전투를 하다 실종됐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특히 30년 전 서울로 이사 온 아들 김동수(78) 씨는 아버지의 유해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신원을 확인할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고 한다. 행정기관에서 받은 자료와 병무청에서 발급한 병적증명서를 비교한 결과 성명과 주소 기록이 일치하는 것은 확인했지만, 생년월일이 다른 것으로 나타나 혼란은 더 가중됐다.

사실상 포기 상태였던 유가족을 대신해 김 이등중사의 행적을 찾아 나선 것은 다름 아닌 조사단. 조사단은 전쟁 중 사망한 군인에 대한 조치를 기록한 ‘매화장보고서’에서 결정적 실마리를 잡았다.

“김 이등중사님의 매화장보고서를 확인해 보니 27육군병원에서 사망했다는 기록과 사망일자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여기에는 유해가 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는 사실도 적혀 있었죠. 좀 더 일찍 알아내지 못해 송구할 따름입니다.” 김 이등중사와 유가족들의 만남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정찬호(원사) 조사관의 말이다.

유가족들이 현충원에 안장된 김 이등중사의 유해를 찾지 못했던 것은 행정상의 오류 때문이었다. 전역과 전사 시기가 겹치면서 하나의 기록으로는 도저히 확인할 수 없었던 것. 하지만 조사단이 근거로 삼은 매화장보고서에는 이 모든 내용이 명확히 담겨 있었다. 단서를 차근차근 정리한 조사단은 지난 20일 서울현충원을 찾아갔다. 추석이 오기 전에 김 이등중사와 가족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지로 묘역을 확인하는 등 ‘속전속결’로 조사에 나섰다.

확인 결과 71년 전 작성된 매화장보고서에 ‘묘역번호 335’에 김 이등중사가 안장돼 있었다. 비석에는 기록과 일치하는 이름과 전사일자가 각인돼 있었다. 



김경용 이등중사의 아들 김동수 씨가 아버지를 그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김경용 이등중사의 아들 김동수 씨가 아버지를 그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조사단 끈질긴 노력에 현충원서 아버지 유해 찾아

25일 오후 2시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추석을 나흘 앞둔 현충원에는 평일이지만 적지 않은 추모객이 오가고 있었다. 다음 날 예정된 국군의 날 기념행사가 한몫했을까? 현충원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찬 모습이었다.

이날 현충원 22묘역 335번 비석 앞에서는 잊혀졌던 영웅을 기리는 행사가 거행됐다. ‘전역’과 ‘전사’의 갈림길에서 71년 동안 가족을 만나지 못했던 고(故) 김경용 이등중사가 주인공이다.

육군인사사령부 6·25무공훈장찾아주기조사단(조사단)이 마련한 소박한 행사에서 김 이등중사의 장남 김동수(78) 씨를 만나 볼 수 있었다. 여든을 눈앞에 둔 흰머리의 노인은 아버지의 묘 앞에서 마치 철부지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실 어제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 울산에 사는 동생과 함께 현충원을 먼저 방문했어요. 동생도 아버지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곧바로 서울로 왔습니다.”

신기진(대령) 조사단장은 “김 이등중사의 행적이 다른 참전용사분들보다 복잡했다. 하지만 단원 모두가 힘을 합쳐 오늘 이 자리에 영웅을 모실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신 단장의 말처럼 김 이등중사를 찾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지난 7월 그의 행적을 찾아 나선 조사단은 본적이 울산이라는 것을 알고, 울산시청 등 관련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탐문활동을 벌였다. 탐문 결과 김 이등중사와 일치되는 자료를 발견했다.

그리고 정찬호(원사) 조사단 조사관은 국가보훈부의 협조를 받아 김 이등중사의 참전유공자 등록 여부를 확인하고, 유가족에게 연락했다.


이제 유가족도 찾았기에 화랑무공훈장을 전도 수여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 정 원사는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김씨와의 통화에서 “아버지가 6·25전쟁에서 전사한 것 같지만 유해를 찾지 못했다”는 답변을 받은 것. 김 이등중사가 정상적으로 전역했을 것이란 착각 때문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정 원사는 원점으로 돌아가 기록을 다시 뜯어봤다.

김 이등중사의 행정관서 자료를 확인해 본 결과, 그는 1953년 1월 23일 제27육군병원에서 사망했다. 하지만 군 기록에는 나이 많은 병사를 전역시키는 ‘연로제’에 따라 전역했다고 적혀 있었다.

25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22묘역 335번 비석 앞에 놓인 고(故) 김경용 이등중사의 훈장과 훈장증.
25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22묘역 335번 비석 앞에 놓인 고(故) 김경용 이등중사의 훈장과 훈장증.



이에 정 원사는 관련 자료가 더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추가 조사를 시작했다. 결국 그는 제적등본상에 있는 전사일자와 사망장소가 제27육군병원이라는 단서를 토대로 전사자 기록과 6·25전쟁에 참전한 동명이인의 자료 등 군 병적·관련 자료들을 낱낱이 조사했다. 

그러던 중 ‘김경용’이란 이름이 적힌 ‘매화장보고서’를 발견했다. 매화장보고서는 전쟁 중 사망한 군인 관련 문서를 말한다. 보고서에는 그의 사망장소와 일자는 물론 행정관서와 일치한 주소지도 적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먼저 생일이 달랐다. 유가족으로 분류된 김 이등중사 부친의 이름이 ‘김용화’로 기록된 것도 문제. 제적등본에는 부친의 이름이 ‘김영하’였다. 전형적인 수기 문서의 오류였다.

다행히 매화장보고서에 명기된 ‘사망원인’에는 김 이등중사가 군병원에 입원한 날짜와 병원을 옮긴 기록 등이 있었다. 이를 토대로 정 원사는 다시 입원 기록을 조사해 각 병원에 입원한 기록을 찾아냈다. 자료에는 김 이등중사의 군번과 입원일자가 기록돼 있었고, 이는 매화장보고서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했다.

치열한 조사 끝에 조사단은 김 이등중사에게 주어진 자랑스러운 무공훈장을 유가족들에게 돌려줄 수 있었다.

아버지 비석 앞에 선 김씨는 전화로 많은 대화를 나눴던 정 원사에게 거듭 감사인사를 건넸다. 드디어 아버지를 만났다는 감동 때문인지 그는 복받치는 감정을 참지 못했다.

“사실 저도 맹호부대 소속으로 나라를 위해 총을 들었던 사람입니다. 원래 군에 큰 애정을 갖고 있었죠. 그런데 오늘 행사를 하면서 더욱 군에 대한 사랑이 깊어졌습니다. 70여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이 정도로 성대한 행사를 마련해 줄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이제 아버지를 계속 찾아올 수 있겠네요. 이렇게나마 아버지를 확인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합니다.” 글=박상원/사진=김병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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