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풍경] 아버지와 소래염전

입력 2023. 09. 21   15:42
업데이트 2023. 09. 21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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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녕 시인
이광녕 시인



짭조름한 갯바람이 세월만큼 절어 있다 
소금 창고 지지대엔 스친 흔적 무상한데 
소금밭 뛰어나오시며 반겨 맞는 아버님 

아버님은 한평생을 소금처럼 사시었다
목도질로 휘인 어깨 움푹 패인 삶의 무게 
이마에 소금꽃 피면 더욱 척척 메셨다 

조강지처 잃은 설움 이 아들로 달래시며 
점심밥 내갈 때마다 되먹여서 보내시니 
아버님 사랑을 먹고 정금처럼 살아왔다 

이제 와 반세기 넘어 그때 거기 또 와보니 
소금밭에 비친 하늘, 하늘마당 염전인지 
아버님 파안대소에 눈물범벅 적십니다 


<시 감상>

가을 햇볕에 익어 가는 것은 들판의 곡류나 과실류만은 아니다. 태풍이 지나가고 장마가 그친 하늘은 염천의 습기를 밀어내며 바다로 행차한다. 볕 좋은 가을날 태양은 하늘에서 뜨겁고, 또 하나의 태양이 염전 물속에서 환하게 솟아오른다. “소금밭에 비친 하늘, 하늘마당 염전”에서 두 줄기 햇볕에 바닷물이 하얀 거품처럼 일렁이며 엉겨 붙을 때, 염부들은 ‘소금이 온다’고 ‘귀한 손님이 온다’고 기뻐한다. 하얗게 익어 가는 이 영롱한 결정체에는 “목도질로 휘인 어깨 움푹 패인 삶의 무게”에 절인 땀 냄새가 나고, 인내와 막바지 기력마저 쏟아 낸 “눈물범벅” 삶의 몸짓이 배어 있다. 유년의 자전적 이야기를 시조의 운율에 실어 형상화한 염전의 풍경은 아픈 추억과 애틋한 그리움의 공간이다.

가을이면 결핍의 곡간을 채워 주는 희망으로 들뜨는데, 삶의 기반이 변변치 못한 사람들의 창고는 허전했다. 거둘 것 하나 없는 사람들에게 염전은 절박한 삶의 완충지대이며, 기어코 살아 낼 터전의 이정표이기도 했다. 마땅한 일거리가 부족했던 해방 전후 시대의 사람들, 더하여 3년간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북한에서 내려온 난민들, 그들은 서해 포구에 염전을 개척하고 그곳에 기대 호구와 시름을 견디면서 자녀를 키우고 교육했다. “반세기” 만에 선진국 반열에 서서 지난 시대의 역사와 문화가 숨죽이고 있는 염전을 깊이 들여다보는 일은 우리 현대사의 바닷가에서 살아온 민중의 유전 기록을 들춰 보는 일이기도 하다. 바다가 태양을 만나 뜨겁게 익어 가는 소금의 소리는 “아버님 사랑을 먹고 정금처럼 살아” 온 시인의 맑은 서정의 울림이기도 하며, 질곡의 시대를 이겨 낸 우리 역사와 문화에 유전하는 삶의 전언을 듣는 일이기도 하다. - 차용국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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