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피랍…연이은 위기에 더욱 견고해진 한미동맹

입력 2023. 07. 21   16:49
업데이트 2023. 07. 2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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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편찬연구소와 함께하는한미동맹 70년 여정
12. 북한의 재래식 위협과 한미 대응

한반도 평화체제·한미동맹 균열 목적
1970년대까지 재래식 위협 대남도발 시도
국방각료회담 계기…한미안보협의회의로 발전
판문점 도끼만행은 작전통제권 논의 촉진

1·21사태가 발생한 지 불과 이틀 뒤 피랍된 미군 정보함 푸에블로호.군사편찬연구소 제공
1·21사태가 발생한 지 불과 이틀 뒤 피랍된 미군 정보함 푸에블로호.군사편찬연구소 제공

 

피랍된 푸에블로호 승무원들.군사편찬연구소 제공
피랍된 푸에블로호 승무원들.군사편찬연구소 제공

 

1976년 8월 21일 전개된 폴 버니언 작전 모습.군사편찬연구소 제공
1976년 8월 21일 전개된 폴 버니언 작전 모습.군사편찬연구소 제공

 

1976년 8월 18일 발생한 판문점 도끼만행사건.군사편찬연구소 제공
1976년 8월 18일 발생한 판문점 도끼만행사건.군사편찬연구소 제공

 

1968년 4월 17일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린든 존슨 미 대통령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군사편찬연구소 제공
1968년 4월 17일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린든 존슨 미 대통령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군사편찬연구소 제공

 

 



북한은 지난 19일 단거리탄도미사일(SRBM)을 쏘아 올리는 도발을 자행했다. 최근 북한의 도발은 재래식 위협보다는 핵·미사일 위협에 치중하고 있다. 그러나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1970년대까지 북한은 재래식 위협 위주의 대남도발을 시도했다. 1960년대 중반 대남전략을 ‘폭력적 혁명전략’으로 전환한 뒤 1968년 1월 21일 대한민국 심장부를 노린 ‘1·21사태’, 1월 23일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을 연이어 일으켰다. 한반도의 평화체제와 한미동맹을 균열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한미동맹은 이를 계기로 더욱 강력해졌고, 한반도 평화를 굳건히 지켜 왔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와 함께하는 한미동맹 70년 여정, 오늘은 북한의 재래식 위협과 한미 대응을 소개한다. 임채무 기자


1·21사태 당시 미군 큰 역할

북한은 대한민국의 무력통일을 목표로 ‘1970년대 통일’을 주장하면서 전쟁을 준비했다. 이 같은 무력통일 노선에 입각해 북한은 1965년에 들어서면서 소극적이었던 대남공작을 적극화했다. 1967년 4월 민족보위성 정찰국 직속으로 제124군부대라는 유격전 전문부대를 창설했다. 제124군부대 공작조 31명은 청와대를 습격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1968년 1월 17일 남방한계선 철책을 넘어 임진강 방면으로 침투했다. 이들은 4일에 걸쳐 산악지역으로 이동해 1월 21일 밤 10시경 서울 종로구 청운동 자하문 인근까지 진출했으나 경찰의 임시검문에 발각됐다.

무장간첩 침투 사실이 확인되자 군·경은 차단·포위·소탕작전에 돌입했다. 작전은 1월 21일부터 2월 3일까지 14일 동안 진행됐다. 작전에는 육군1·8·25·26·30·33사단, 육군본부 직할 수도경비사령부, 1공수특전단 등 총 16개 부대 1만9186명이 투입됐다. 소탕작전 결과 무장간첩 중 28명이 사살됐고, 1명(김신조)이 생포됐으며, 2명은 은신 중 사망하거나 도주한 것으로 마무리됐다.

주한미군도 작전에 참여해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주한미군은 한국의 군·경과 공동으로 작전을 수행했다. 미 8군은 미 2사단 지역에 봉쇄진지를 구축하고 수색작전을 펼쳤다. 지상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소형 헬기를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대기시켜 국군이 요청하면 즉각 띄울 수 있도록 했다. 미 2사단 포병부대는 1월 24일 오후 6시20분, 당시 경기도 파주군 문산읍 이천리 북방에서 무장간첩 1명을 사살한 데 이어 같은 날 오후 8시30분 파주군 법원읍 금곡리에서 1명을 더 사살하는 전공을 거뒀다.

이틀 뒤인 1월 26일 오전 8시30분 미 2사단 병력이 경기도 파주군 파평산 남방 2.5㎞ 지점인 법원읍 금곡리에서 매복작전 중 무장간첩의 기습사격을 받아 1명이 전사했다. 오전 9시5분 파주군 진동면 갈산동에서 무장간첩 1명을 사살한 뒤 추가 수색 중 갈산동 북방에서 간첩 시체 1구를 발견했다.

미국은 소탕작전에 주한미군을 투입함과 동시에 1월 22일 로버트 매클로스키 국무부 공보관 명의로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은 성명에서 북한이 ‘정전협정’을 빈번히 위반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서울 근교에 무장간첩을 침투시킨 사건은 1953년 이래 가장 중대한 정전협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유엔군사령부(유엔사)는 청와대 기습 미수사건을 논의하기 위해 1월 22일 오전 9시 북한에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를 23일 개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1월 22일 낮 12시20분 북한 측 대표 박중국 중장이 23일이 아닌 24일에 열자고 회신했다. 이에 따라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가 1월 24일 오전 11시에 판문점에서 진행됐다.

유엔사는 이 회의에서 생포된 무장간첩 김신조의 기자회견 녹음과 증언 영상을 증거물로 제시하고, 무장간첩을 침투시킨 사실을 항의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들 무장간첩이 남파된 게 아니라 한국 내에서 ‘반미투쟁’을 위해 궐기한 사람들이라는 억지 주장을 펼쳤다. 양측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본회의는 아무런 합의사항 없이 종료됐다.


1·21사태 이틀 만에 푸에블로호 피랍

1·21사태가 발생하기 10일 전인 1968년 1월 11일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일본 사세보항을 출발해 대한해협을 거쳐 북한 연안으로 향했다. 푸에블로호의 임무는 북한 연안에서 북한 해군 활동과 활동 범위, 소련 해군의 정찰·출현 이유 등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1월 16~17일 북한 청진항·성진항 인근에서 정찰 활동을 마치고 남하한 푸에블로호는 1월 23일 북한 원산항 입구에 있는 웅도 인근에서 북한 해군의 대잠함 및 어뢰정과 조우했다.

푸에블로호에서 미국 깃발을 게양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대잠함은 “정지하지 않으면 사격하겠다”고 위협했다. 당시 푸에블로호는 가장 가까운 북한 영토로부터 15.8마일(약 25.3㎞) 떨어진 공해상에 있었다. 그러나 북한 대잠함과 어뢰정은 1월 23일 오후 1시경부터 푸에블로호를 향해 함포·기관총을 발사했다. 결국 푸에블로호와 승무원들은 6척의 북한 함정에 포위된 끝에 원산항으로 끌려갔다.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이 발생한 것은 1·21사태가 발생한 지 불과 이틀 뒤였다.

1968년 1월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자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는 공동대응에 나섰다. 미국은 최초에 북한의 주요 항구를 봉쇄하고, 북한을 공습하는 군사적 대응을 검토했다. 그러나 소련·중국과 충돌할 위험성, 북한의 강력한 저항 가능성, 베트남전쟁이 진행 중인 국내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외교적 협상을 시작했다. 미국과 북한은 1968년 12월 23일 승무원 석방에 최종 합의했으며, 같은 날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미 지원으로 한국군 전력 증강

한국 정부는 초기에 미국과 북한의 직접 협상을 반대하고, 한미 양국의 연합작전으로 북한을 공격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등 미국 측에 대북 강경책을 요청했다. 또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이 한국의 방위태세를 위협하는 북한의 도발행위임을 강조하고, 북한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베트남에 파병 중인 병력을 철수할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사건 해결책에 대한 입장 차이가 드러나자 한미 양국은 1968년 2월 6일 서울에서 고위급회담을 열어 쌍방의 입장을 확인·조율했다. 뒤이어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2월 11일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을 대통령특사로 한국에 파견했다. 밴스 장관은 2월 12일과 15일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을 했으며, 한미는 3가지 합의사항을 도출하게 됐다. ‘첫째, 한미 양국은 북한의 도발이 계속될 경우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양국이 취해야 할 조치를 신속히 결정한다. 둘째, 양국은 안보·방위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매년 양국 국방각료회담을 개최한다. 셋째, 양국은 한국군 현대화를 위해 1억 달러 규모의 특별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예비군 전투력을 증강하기 위해 한국군에 M16 소총을 지급한다’였다.

1968년 4월 17일 박 대통령은 존슨 대통령의 초청으로 하와이에서 3번째로 한미 정상회담을 했다. 이 회담에서 양국은 북한의 적대적이고 침략적인 행위를 아시아 평화·안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 같은 중대 사태가 발생할 경우 ‘한미상호방위조약’ 정신에 따라 즉각적으로 조치를 결정할 것을 합의했다. 이와 함께 미국의 대한(對韓) 추가 군사원조의 계속 제공, 국군 장비 현대화와 향토예비군의 무장, 대간첩작전용 장비 도입, 자주국방을 위한 군수산업 육성 방안 등의 보장도 확인했다.

7월 8일 존슨 행정부는 이러한 합의사항을 미국 의회에 요청했고 공식 승인됐다. 그 결과 한국은 5800만 달러 상당의 F-4D 전폭기 대대와 헬기중대, 4척의 고속경비정, 8인치 자주포, 예비군용 소총, 비행장 개선, 1만 정의 신형 M16 소총 등의 군사지원을 받게 됐다.

또 한미 국방각료회담이 1968년 5월 27~28일 처음으로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됐다. 한미 국방각료회담은 1971년 7월 12~13일 제4차 회담에서 그 명칭이 ‘한미안보협의회의(SCM)’로 변경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북한 도발 계속…한미연합 진화 계기

북한은 1960년대 말에 일으킨 2차례의 군사도발이 실패했음에도 무력통일 노선을 철회하지 않았다. 특히 1970년대 초부터 ‘김정일 후계체제’를 본격적으로 구축하면서 당 간부 숙청을 통해 내부 통제와 결집을 강화했다. 이와 동시에 ‘중공업 우선주의 노선’을 채택해 증강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반도에서 군사적 위기를 만듦으로써 20년 넘게 지속돼 온 정전체제를 근본부터 뒤흔들고, 국제적 이슈로 부각시키려고 계획했다.

1970년대 북한이 군사적 도발을 일으킨 대표적인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전협정을 상징하는 ‘판문점’이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은 북한군과 유엔군이 공동으로 경비했기 때문에 양측 경비초소 사이에 별다른 경계선이 없었다. 1976년 8월 18일 유엔사는 북한 측 경비초소를 관측하는 데 장애가 되는 미루나무 가지를 치기 위해 경비병력 10명과 노무자 5명으로 구성된 작업반을 공동경비구역에 투입했다. 이날 오전 11시경 유엔사 작업반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중 북한군 장교가 갑자기 작업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유엔군 장교가 이에 응하지 않자 곧바로 30여 명의 북한군이 도끼, 곡괭이, 도끼자루를 들고 기습해 유엔사 작업반과 경비병력을 공격했다. 이 사건으로 미군 아서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 배럿 중위가 사망했고 한국군 장교 1명과 병사 4명, 미군 병사 4명 등 9명이 부상당했다.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발생한 다음 날인 19일 오전 10~11시 조지프 스틸웰 유엔군사령관은 주한미군과 한국군에 ‘데프콘(DEFCON)-3’를 발령했다. 이에 따라 한국군 1군사령부와 한미 1군단의 작전통제를 받는 부대들은 20일 밤 전투진지를 점령했다. 미 국방부는 북한의 추가 도발에 대비해 미국 본토와 일본 오키나와에서 2개 전투비행대대를 한국에 급파했다. 스틸웰 유엔군사령관은 사건 직후 문제가 된 미루나무를 절단하기로 결정하고 ‘폴 버니언(Paul Bunyan) 작전’을 수립했다. 작전이 수립되자 스틸웰 사령관은 20일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미루나무 절단작전을 보고했다. 이를 통해 한미는 작전을 공동 진행하기로 합의하고, 한국군을 제1선에 투입하기로 했다.

미국은 폴 버니언 작전에 비에라(Viera) 특수임무부대 428명과 미 2사단 9연대 2대대 385명을, 한국은 1공수특전여단 장병 64명과 육군1사단 수색중대 169명을 투입했다. 폴 버니언 작전은 21일 오전 7시에 시작됐다. 공병들이 미루나무를 절단하는 동안 미군과 한국군이 공동경비구역에서 북한군 기습에 대비했다. 1공수특전여단 장병들은 비에라 특수임무부대를 지원할 수 있는 위치를 점령하고, 교차로를 확보했다. 육군1사단 수색중대는 북한 측 8초소 인근에서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폴 버니언 작전은 참가한 모든 병력이 오전 8시26분 공동경비구역을 모두 이탈함으로써 종료됐다.

한미 양국은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을 계기로 미군 장교만으로 편성된 유엔사의 작전통제권 행사에 문제가 있음을 공감했다. 특히 양국은 적의 대규모 도발로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한국군이 지상작전을 담당하게 될 때 발생할 문제점을 논의했다. 이 같은 문제점은 한국 국방부 장관에게도 보고됐다. 논의의 핵심은 한반도 내 모든 작전의 지휘가 어떤 형태로든 한미연합체제로 진행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유엔사와 한국군은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을 계기로 당시 공동 연구 중이던 유엔사의 작전통제권 개선책 논의를 더욱 촉진시켜 완성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이 같은 한미 협의는 향후 작전통제권 전환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김선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국방사부 선임연구원
김선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국방사부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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