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그들이 온다
러시아 ‘일리걸’ 스파이에게 무슨 일이?
미, 러시아 정보요원 체르카소프 기소
출생·가족·친척 모든 신분 조작
국제형사재판소 침투 시도 중 체포
우크라전 이후 치열해진 정보전
최근 각국서 다수 신분 노출 이례적
노르웨이·그리스서도 적발 잇달아
국내에도 위장 신분 침투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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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4일 미국 법무부는 러시아 정보요원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체르카소프를 외국을 위한 스파이 행위, 허위 비자신청, 은행사기 혐의 등으로 기소했다고 발표했다. 미국연방수사국(FBI)의 방첩부서와 워싱턴 지부 및 외국 정보기관들의 긴밀한 협조가 있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앞서 지난해 6월 네덜란드 보안정보국(AIVD)은 브라질 국적으로 위장해 헤이그 소재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침투하려던 러시아 군사정보총국(GRU) 소속 체르카소프를 체포했다. ICC는 집단학살,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개인을 처벌하기 위한 상설 재판소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전쟁범죄 조사에 착수해 지난 3월 17일 체포영장을 발부한 기관이다.
FBI와 AIVD 등 관련국 방첩당국이 체르카소프의 과거 행적을 추적한 결과는 놀라웠다. 그는 25세였던 2010년 브라질에 입국했는데 이미 1년 전인 2009년에 러시아 GRU가 브라질에서 ‘빅터 뮬러 페레이라’의 가짜 출생증명서(1993년 자녀 없이 사망한 브라질 여성을 어머니로 신고)를 발급받아 이를 기반으로 운전면허증을 만드는 등 위장 신분을 준비해둔 후였다.
그는 현지 여행사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미국 워싱턴 진출을 목적으로 먼저 아일랜드로 가서 공립대학인 트리니티칼리지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2018년 미국 워싱턴에 있는 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대학원에 합격했고, 2020년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브라질 출신 미국 명문 대학원생이라는 안전한 신분과 네트워킹 덕분에 워싱턴에서 수시로 열리는 각종 싱크탱크 토론회 등에 참석해 인맥을 쌓았다.
이를 통해 수집한 정보를 러시아에 넘겼는데,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 측근인 한 싱크탱크 고문을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조 바이든 행정부의 입장’을 파악하기도 했다. 러시아 출신인 유진 핀켈 존스홉킨스대 교수도 “억양은 이상했지만 아일랜드계 브라질인이라는 설명에 다들 납득했고, 러시아인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며 “똑똑하고 유능했던 청년”이라고 그를 기억했다.
그가 2022년 ICC에 인턴으로 지원해 합격통지를 받고 네덜란드로 입국하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및 FBI와 공조한 네덜란드 보안정보국(AIVD)에 의해 적발된 것이다. AIVD에 따르면 체르카소프는 ICC에 인턴으로 입사 후 정규직으로 전환해 내부동향 파악 및 형사정책 관여 등을 계획했다고 한다. 만약 침투에 성공했다면 장기간 ICC 내부에 암약하며 관련 정보수집뿐 아니라 러시아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는 공작활동도 수행했을 것이다.
그는 위장 신분에 걸맞은 가족, 친척, 유년 시절 등의 이야기를 담은 시나리오도 철저히 준비했다. 그의 노트북에 저장돼 있던 A4용지 4장 분량의 위장 시나리오에는 “아일랜드계 브라질인으로 이국적인 외모와 억양 때문에 외국인이라 놀림을 받았고 친구가 없었음. 어릴 때 살던 리우데자네이루 다리 근처는 생선 냄새가 심해 싫었음”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그는 이 문서를 10년 동안 보관하며 수없이 읽고 외웠다고 한다.
브라질로 추방된 체르카소프는 출생증명서와 여권 등 서류 위조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아 상파울루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데 재미난 것은 러시아가 그의 인도를 요청했다는 사실이다. 체르카소프가 스파이가 아니라 “처벌을 피해 해외로 도피한 헤로인(마약류) 밀매업자”라고 주장하며 브라질에 범죄인 인도를 요청했고, 그도 러시아행에 동의했다고 한다.
진짜 헤로인 밀매업자라면 러시아에서 더 무거운 형에 처하게 될 것인데도 그가 러시아행을 원했다는 것 자체가 스파이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브라질 정부는 체포 당시 압수한 그의 휴대전화(갤럭시노트20) 포렌식을 통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라온 러시아 군 동료들과 찍은 사진, 미국 시민권 취득을 위한 치밀한 계획 등을 입수한 상태여서 그가 스파이 혐의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각국에서 러시아 ‘일리걸’ 다수 적발
최근 러시아 정보기관의 ‘일리걸(Illegal·외교관 등 공직 가장이 아닌 위장 국적의 장기체류 공작원)’ 스파이들이 각국에서 신분이 노출돼 체포되거나 도망하는 사례들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노르웨이 경찰청 보안국(PST)은 지난해 10월 위장 신분을 사용, 러시아를 위한 스파이 활동을 한 혐의로 트롬쇠시 소재 북극대학교 연구원 미하일 발레리비치 미쿠신을 체포했다. 그는 2006년 브라질로 입국, 호세 아시스 지암마리아(37)라는 위장 신분을 취득했다. 이후 캐나다로 이주해 2015년 칼튼대에서 정치학 학사, 2018년 캘거리대에서 국제전략연구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2019년경부터는 캐나다의 북극권 정책에 관한 글을 학술지에 기고하는 등 북극 분야에 관심을 보이다가 이를 배경으로 2021년 노르웨이 북극대 연구원이 됐다. 이후 북극 안보 전문가로서 러시아 국익과 직결되는 북극권 회색지대 분쟁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었다.
슬로베니아 정보보안국(SOVA)도 지난해 12월 유럽연합(EU), 나토와 협력해 러시아 GRU 요원으로 의심되는 외국 스파이 2명을 적발했다. 체포된 러시아 부부(38세 동갑내기)는 아르헨티나 국적으로 신분을 위장했고, 슬로베니아 수도 류블랴나 중심부 사무실에서 부동산, 골동품 매매 사업을 하며 슬로베니아 및 주변국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그리스 국가정보원(NIS)도 올 3월 16일 자국민으로 위장한 러시아 여성 스파이 이리나 알렉산드로바 스미레바가 지난 1월 러시아로 도주했다고 발표했다. 그녀는 2018년 멕시코에서 위조여권으로 그리스로 입국했다. 그리고 출생 직후 사망(1991.12)한 자국인 마리아 찰라의 출생증명서를 도용해 아테네 중심부 파그라티 지역에 아파트를 마련하고 의류매장을 운영하며 생활하다 올 1월 소지품도 챙기지 않고 서둘러 러시아로 출국했다. 가짜 신분을 활용해 EU 내부를 자유로이 왕래하며 스파이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의 러시아인 남편도 대니얼 캄포스라는 가짜 신분으로 브라질에 거주하다가 올 1월 같은 시기에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
요컨대 국적을 위장하고 오랫동안 암약해온 다수의 러시아 스파이들이 최근 1년 이내에 각국에서 신분이 노출돼 검거되거나 도망다니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정보기관에게는 큰 변고가 아닐 수 없다. 이들 한 명 한 명은 중요한 정보 자산이며 새로운 국적과 가장 신분을 만들고 목표 지역에 침투해 정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이 들기 때문이다.
국적 위장 장기체류 스파이에 대비해야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정교한 휴민트(HUMINT·인간정보활동) 공작에 능하다. 특히 ‘일리걸(Illegal)’로 불리는 국적위장 장기체류 공작원을 활용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좀처럼 찾아내기 힘든 이들이 최근 각국에서 다수 적발되는 것은 종종 발생되는 외교관 위장 스파이들의 경고성 추방이나 이에 대한 보복성 맞추방 등과 달리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각국에서 러시아와의 정보전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러시아 정보기관의 ‘일리걸’ 관련 내부 정보가 어떠한 형태로든 유출됐고, 관련국 방첩기관들의 정보공유와 협력도 그 어느 때보다 신속하게 이뤄지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한편, 우리나라에도 국적을 위장해 침투한 스파이 사례는 많다. 대표적 사례로는 필리핀에서 위장 국적을 취득, 입국해 대학교수 신분으로 12년간 암약하다 1996년 검거된 북한 간첩 무하마드 깐수(본명 정수일), 일본에서 재일교포로 위장 신분을 취득 후 국내로 침투해 12년간 암약하다 1990년 9월 북한으로 복귀한 거물 여간첩 이선실, 태국인과 필리핀인으로 위장해 국내를 수시로 드나들다 2006년 검거된 간첩 정경학 등이 있다.
그렇다면 북한 이외 외국 정보기관이 보낸 ‘일리걸’들이 우리나라에 침투해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우리나라가 이미 국제 정치와 경제의 중요한 행위자로서 각국의 주요 정보목표로 부상한 현실과 주변 강대국들의 힘이 충돌하는 지정학적 위치 등을 고려할 때 당연히 “Yes”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필자 배정석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 겸임교수는 국가정보원에서 방첩업무를 담당했으며 현재 국제정보사학회와 한국국가정보학회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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