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 펼쳐졌다

입력 2023. 03. 15   15:54
업데이트 2023. 03. 15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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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영화 - 햄버거 힐(1987)
감독: 존 어빈 
출연진: 앤서니 바릴, 마이클 보트먼, 돈 치들, 마이클 돌런

햄버거 힐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북베트남군의 거점 '937고지'
미, 물량전 끝에 가까스로 점령했지만
상처뿐인 승리에 반전 여론 확산
전투 이겼지만 완벽한 패배 당한 셈

 

“베트남의 보응우옌잡 장군은 ‘방어·교착·공세’라는 마오의 3단계 이론을 받아들였지만 마오의 이론을 조금 변형했다. 베트남은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였고, 전략에서의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전선은 고정돼 있지 않았고 ‘적이 발견되는 곳’은 어디나 전선이었다. 아군이 ‘조금씩 작은 승리를 쌓아감에 따라서’ 적은 피로해지고 소진될 것이라고 보았다. 보응우옌잡이 정리한 게릴라전 개념은 20세기 중반 아시아에서 있었던 공산주의 투쟁에서 최고의 교범이 됐다.” 

(『전략의 역사1』 중, 로렌스 프리드먼 지음, 비즈니스북스 펴냄)


보응우옌잡 장군의 ‘3불 전략’ 

디엔비엔푸전투에서 프랑스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준 보응우옌잡 장군의 전략은 미군과의 전쟁에서도 위력을 발휘했다. 그 유명한 ‘3불(不) 전략’이었다. 그는 훗날 강대국과 싸워 이길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세 가지를 하지 않았다. 적들이 원하는 시간, 싸우고 싶어 하는 장소, 그들이 예상한 방법으로 싸우지 않았다.”

보응우옌잡은 훌륭한 병참 전문가이기도 했다. 어쩌면 20세기 가장 뛰어난 인공물일 수 있는 ‘호치민 루트(트레일)’도 그가 초석을 다진 것이었다.

1968년 1월 30일, 보응우옌잡은 전쟁의 승패를 가를 승부수를 던졌다. 북베트남군은 국경도시 케산에 2만 명의 병력을 투입해 미군의 관심을 돌린 뒤 최대 명절인 구정(舊正)에 맞춰 남베트남 주요 도시를 공격한 것. 미군도, 남베트남군도 방심하다 허를 찔렸다.

북베트남으로서는 개전 이후 유리했던 전황이 묘하게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1967년 미군은 베트콩을 상대로 공세를 펼쳐 상황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해 9월에는 남베트남에서 선거가 이뤄져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응우옌반티에우 장군이 대통령이 됐다. 사이공 정부는 오랜만에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베트콩의 입지가 약해졌다.

이에 보응우옌잡은 대규모 공세를 펼쳐 전세를 회복하고자 했다. 도박이었다. 대규모 공격을 가하면 남베트남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서 사이공 정부가 무너질 것으로 기대했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북베트남군은 되레 3만5000명이 사망하는 큰 손실을 보았다. 기대했던 인민봉기도 발생하지 않았다. 군사적으로 볼 때 구정 대공세는 북베트남의 패배였다.

하지만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 여론이 전쟁 반대로 돌아선 것. 1월 31일 심야에 베트콩 특공대가 사이공 한복판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공격했다. 대사관을 지키던 해병대원들과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고, 미 해병 5명이 사망한 끝에 진압할 수 있었다. TV로 미 대사관이 일시 점령당하는 것을 보자 미국 국민은 생각이 달라졌다. 언론도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구정 공세는 북베트남의 군사적 패배인 동시에 정치적 승리였다.


지옥 같은 참상, 햄버거 힐 전투 

영화는 미국 여론이 악화일로로 치닫던 1969년 벌어진 햄버거 힐 전투가 배경이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유명한 미군 101공수사단 187연대 3대대가 북베트남군 29연대가 차지하고 있던 937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치렀던 전투다. 북베트남군보다 막강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던 미군은 이 작은 고지 하나를 점령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과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적의 기습으로 부대원을 잃은 분대장 프란츠는 견딜 수 없는 절망감을 술과 여자로 달랜다. 휴가 후 프란츠와 분대원들은 937고지 탈환 작전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받는데….

937고지는 라오스와 인접한 국경 지역에 있는 북베트남군의 거점. 미군으로서는 구정 공세 이후 팽배해진 반전 여론을 무마하고, 북베트남군의 보급선인 ‘호치민 루트’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1969년 5월 10일 시작된 햄버거 힐 전투는 미군이 엄청난 물량전을 벌인 끝에 5월 20일, 가까스로 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단 10일 동안 미군 600명 중 72명이 전사하고, 372명이 다친 결과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승리로 기뻐하지 않고, 살아남은 병사 몇 명이 폐허가 된 고지에 서서 허탈해한다. 지옥 같은 참상 속에서 누군가 비웃듯 쓴 “햄버거 힐에 온 것을 환영한다(WELCOME TO HAMBURGER HILL)”란 글귀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미군은 이 고지를 점령하자마자 아이러니하게도 곧바로 철수했다. 전투에 이겨 북베트남군을 물리쳤으므로 더 이상 고지를 점령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내 여론은 달랐다. 반전 여론을 확산시키는 원인이 됐다. 미군은 전투에선 승리했지만, 결론적으로 완벽한 패배를 당한 셈이었다.


베트남 운명 바꾼 ‘호치민 루트’…병사 200만 명 오가며 군수품 운송

전체 길이 3343㎞…남하 6개월 걸려
미 대규모 공습에도 막을 수 없던 길
1975년 '호치민 작전'서도 중요 역할


베트남은 남북으로 길게 S자 형태로 이어져 있다. 남북 최장 거리는 1650㎞이며, 동서 폭이 50㎞에 불과한 곳도 있다. 북베트남이 전쟁 당시 베트콩에게 무기와 병력을 보급하는 주요 보급로는 비무장지대(DMZ) 인근 산악지역에서 시작해 라오스 국경을 따라 남하하는 호치민 루트(트레일)였다.

주 도로는 2667㎞이며, 전체 길이는 3343㎞이다. 작은 소로를 합하면 1만㎞가 넘는다. 지하 터널인 ‘구찌’는 전쟁 당시 20년에 걸쳐 작은 호미로 파면서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지하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북에서 호치민 루트를 통해서 남하하는데 평균 6개월에서 7개월 걸렸다. 사람이 다니기 힘든 쯩선 산맥과 강들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베트남인들에게 호찌민 루트는 베트남 전쟁사에서 ‘전설의 길’이었다. 다른 어떠한 기념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통일의 상징이기도 했다. 전쟁 동안 이 길 위에서 수많은 젊은 생명들이 스러져 갔다. 북에서 출발한 인원의 30%도 채 안 되는 사람만이 남에 도착했다. 70%는 호치민 루트에서 죽었다. 첫째는 굶주림, 둘째는 미군의 폭격, 셋째는 열대병으로 죽었다.

호치민 루트의 전모는 전쟁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구간을 나눠, 담당 구간만 이동하는 안내원을 따로 뒀기 때문이었다. 호치민 루트의 실체를 알아내기 힘들어지자 미군은 대규모 공습을 감행했다. 강력한 폭격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가 크지 않았다.

미군은 정글 말살 계획을 세웠다. 정글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수송로를 노출시키는 계획이었다. 강력한 휘발성 폭탄인 네이팜탄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 또한 효과가 제한적이자 미군은 고엽제를 대량 살포했다.

1960년 전후로 시작된 호치민 루트의 개척은 전쟁이 끝나는 1975년까지 계속됐다. 이 기간에 약 200만 명의 병사가 남북을 왕래하며 군수품을 운송했다. 전쟁을 결정지은 1975년 봄 ‘호치민 작전’도 이 길을 몰래 남하한 기동부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필자 김인기 국장은 전자신문인터넷 미디어전략연구소장, 테크플러스 대표를 역임했으며, 현재 전자신문인터넷 온라인편집국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영화 속 IT 교과서』가 있다.
필자 김인기 국장은 전자신문인터넷 미디어전략연구소장, 테크플러스 대표를 역임했으며, 현재 전자신문인터넷 온라인편집국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영화 속 IT 교과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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