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탄_윤성근 대표]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입력 2023. 03. 14   15:31
업데이트 2023. 03. 14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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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자주 보는 게시물 중에 ‘세 보이는 이름 짓기’라는 게 있다. 말 그대로 이름만 들어도 저절로 거리감이 생기게 만드는 식으로 이름을 짓는 거다. 왜 이런 이름을 짓는가 하면 흔히 혼자 사는 분들이 택배를 주문할 때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범죄에 대비하기 위해 주문서에 이름을 그런 식으로 지어서 쓴다는 얘기다. 

그러면 세 보이는 이름이란 무엇인가? 커뮤니티에서 예를 든 이름을 빌려와 소개해보면, ‘마원춘’ ‘왕두팔’ ‘곽팔춘’ 이런 식이다. 어떤가? 이름만 들어도 이런 이름을 쓰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어떤 느낌일지 떠올라서 등골이 오싹할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과 만날 일은 많지 않기에 어쩌면 재밌는 농담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게 실제라면 그때부터는 농담이 아닌 공포영화가 된다.

나는 헌책방에서 일하지만,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어서 때때로 도서관이나 지자체에서 강연 요청을 받는다. 연락은 주로 이메일로 주고받는다. 담당자를 실제로 만나는 건 행사 당일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얼마 전 무서운 연락을 하나 받았다. 내용은 도서관 강연 요청으로 평범한 것이었는데 이메일을 보낸 담당자 이름이 ‘엄○창’이었다. 상당히 세 보이는 이름이다.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이메일 내용이 협박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영화배우 마동석 같은 사람이 노트북 앞에 앉아 한껏 인상을 쓰며 이메일을 작성하고 있는 장면을 떠올렸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메일 내용 마지막 부분을 보니 자세한 내용을 안내해드릴 테니 편한 시간에 연락해달라며 전화번호가 쓰여있었다. 과연 엄○창 씨와 편한 마음으로 통화할 수 있을 만한 시간이 나에게 올 것인가? 실제로 나는 며칠 동안 전화기만 만지작거리면서 혼자 끙끙대고 있었다.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다. 수화기 너머에서 목소리마저 터프한 엄○창 사서가 이렇게 말하는 건 아닐까? “작가 선생, 너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어. 내가 원하는 날에 여기로 와서 강연하면 되는 거야. 살려서 보내주는 것으로 강연료를 대신하도록 하지. 질문 있나?” 당연히 질문 따위는 있을 수 없다.

나는 심지어 어느 날에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악몽까지 꾸었다. 어쩔 수 없이 그날 세 보이는 이름의 사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정말이지 1초 만에 나의 바보 같은 행동을 반성하게 됐다. 엄○창 사서는 목소리가 너무나도 편안한 여성분이었고 친절하게 행사 안내를 해주었다.

강연하러 도서관에 갔을 때 실제로 만난 엄○창 사서에게 나는 이름 때문에 전화하기를 망설였다고 털어놨다. 그 역시 이름이 억센 느낌이라 평소에 자주 오해를 산다고 했다. 하지만 개명할 생각은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실제 모습 때문에 사람들에게 작은 해프닝을 선물하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라면서 가볍게 웃었다. 그 미소야 말로 이름이 엄○창이든 곽두칠이든 관계없이 모든 억센 분위기를 녹여낼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세상엔 겪어보지 않고 짐작만으로 겁을 먹는 일이 많다. 이름과 얼굴이 같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데 왜 나는 센 이름에 주눅이 들어서 전화를 못 했단 말인가. 짐작만으로 겁먹을 일이라면 당당하게 부딪히고 겪어보는 게 이롭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걱정한다면 오늘이란 시간은 소모적인 하루다. 이제 나는 다짐한다. 내일은 내일을 위해 남겨두고 거뜬하게 오늘을 겪어내는 삶을 살아보는 거다. 오늘을 겪을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오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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