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니토 무솔리니의 집권과 몰락 참전경력 바탕 전쟁영웅화하고
사회주의서 돌아서 민족주의 독재 옹호
경기 침체·정치 환멸 국민에게 호응
전후 불만세력 규합 ‘전투 파쇼’ 창설
로마진군으로 총리 올라 20년간 집권
히틀러와 동맹 2차 세계대전 일으켜
스위스 도주 중 의용군에 체포돼 사형
1915년 이탈리아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맺은 삼국 동맹을 깨고 연합군에 합류했다. 이탈리아는 영국과 프랑스가 담당한 서부 전선에 집중된 추축국의 군사력을 분산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의 공세에 밀린 이탈리아군은 북부 산악지역에 갇혀 고전을 거듭했다. 카포레토 전투 등에서 이탈리아는 엄청난 사상자를 냈고 결정적인 활약을 하지 못한 채 종전을 맞이했다. 전후 이탈리아는 승전국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소외되었다. 이탈리아가 얻은 것은 이스트리아 반도를 비롯한 극소수 식민지에 불과했다. 전쟁에서 입은 피해에 견주면 초라한 보상이었다. 이탈리아 국민들의 자긍심은 바닥에 떨어졌다. 게다가 대공황이 시작되자 물가가 치솟고 실업이 폭증하면서 이탈리아 정부는 통제력을 상실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인물이 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다.
이탈리아 프레다피오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무솔리니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청년 시절부터 사회주의에 심취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무솔리니는 1902년 입대 영장이 나오자 병역을 회피하려고 스위스로 도주했다. 그는 2년 후 붙잡혔으나 운 좋게도 탈영병 사면령 덕분에 징역을 살지 않고 입대할 수 있었다. 제대 후 이탈리아 사회당에서 활동하면서 무솔리니는 잠재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회당 기관지 ‘Avanti(전진)’의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그는 뛰어난 글재주와 연설 능력을 인정받았다. 폭력적인 선동과 지성이 기이하게 뒤섞인 무솔리니의 글은 사람을 흔드는 힘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무솔리니는 사회주의 사상에 등을 돌리고 이탈리아의 참전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글을 발표했다. 전쟁을 계기로 군부가 사회를 장악하자 무솔리니는 편집장을 그만두고 예비군으로 입대하여 이탈리아 육군 최정예부대 ‘베르살리에리 연대’에서 복무했다. 무솔리니는 종전 후 참전경력을 바탕으로 자신을 전쟁영웅으로 미화했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그의 변절을 비판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반발에 직면했고, 전후 이탈리아에서 군인의 위상은 이미 바닥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그러자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인민신문을 창간하여 사회주의, 민주주의, 의회주의를 거부하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동물 세계의 약육강식과 폭력적인 지배가 인간들 사이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하는 글을 발표했다.
여기서 무솔리니는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내세운 독재체제를 옹호했다. 전쟁 후 경기 침체와 정치적 환멸이 만연한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의 단순하고 과격한 주장은 큰 호응을 얻었다. 사회주의 확산을 경계하던 영국 정부는 정보부 자금을 제공하면서 은밀하게 무솔리니의 활동을 도왔다.
1919년, 무솔리니는 전후 사회에 불만을 지닌 세력들을 규합하여 ‘전투 파쇼’라는 집단을 창설했다. 이 집단은 2년 후 ‘국가 파시스트당’으로 성장했다. 파시스트 당원들은 이탈리아 베르살리에리 연대의 군복과 흡사한 검은 셔츠를 착용하고 사회주의자들을 테러했다. 플라톤의 사상과 니체의 초인이론을 뒤섞은 자신의 사상을 저술한 무솔리니의 책은 엄청나게 팔렸다. 좌절감에 빠진 이탈리아 국민은 이탈리아의 빛나는 미래를 약속하는 그의 말에 열광했다. 이탈리아가 전후 논공행상에서 소외된 것에 분노한 극우파와 실업자들, 참전 장병, 범죄자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무솔리니는 그것을 기회로 활용했다.
1922년 10월 27일, 무솔리니는 ‘검은 셔츠단’과 함께 ‘로마진군’을 시작했다. 마침내 무솔리니는 로마를 장악하고 39세의 나이에 총리에 올랐다. 겁에 질린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의 정치적 입지를 인정하고 타협했다. ‘로마 진군’ 이후 무솔리니와 파쇼당은 무려 20년 넘게 이탈리아를 지배했다.
1934년,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방관했다. 영국은 해로를 개방하고, 프랑스는 이탈리아군이 자국 식민지를 통과하는 것을 허용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에서 군사력을 소진하길 원했다. 이는 큰 실수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방관은 이탈리아와 독일이 훗날 더 위험한 도발을 감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솔리니의 행보에 가장 큰 영감을 받은 인물은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였다. 무솔리니는 히틀러에게 아주 적절한 모델이 되었다. 육군 상병으로 참전한 경력이 전부였던 청년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권력 장악 과정을 흥미롭게 주시했다. 히틀러는 나치당 내부에 ‘검은 셔츠단’과 흡사한 ‘갈색 셔츠단’을 만들어 반대파 테러에 이용했다. 그리고 팔을 앞으로 뻗는 파쇼당의 경례를 도입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전쟁 패배 이후 열패감에 시달리던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의 극단적인 인종주의와 전체주의 사상에 열광했다.
무솔리니와 마찬가지로 히틀러 역시 테러와 선동으로 여론을 장악하면서 집권의 토대를 닦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에는 완장을 차고 ‘하일 히틀러’를 외치며 팔을 드는 경례를 하는 사람들이 폭증했다. 이탈리아 국민이 ‘두체(Duce·영도자)’를 외치며 무솔리니에게 열광하는 장면과 너무도 흡사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은 군사동맹을 맺었고, 몇 년 후 인류는 다시 전쟁에 휘말렸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의 한계는 곧 드러났다. 무력 시위와 허세에 익숙한 이탈리아군은 모든 전선에서 패퇴했다. 1943년 7월,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자 전쟁에 염증을 느낀 이탈리아 국민은 무솔리니에 급속히 등을 돌렸다. 의회에서 탄핵당한 무솔리니는 산장에 구금되었다. 그러자 히틀러는 특수부대를 파견하여 무솔리니를 구출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에서 새로운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전혀 호응을 얻지 못했다. 전쟁 막바지에 무솔리니는 스위스로 도주하던 중 무장 의용군에게 체포되었다.
1945년 4월 28일 밀라노에서 무솔리니는 애인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사형당했다. 광장에 전시된 무솔리니의 시신은 처참하게 훼손되었다. 20년 넘게 장기 집권한 독재자의 처참한 말로였다. 히틀러는 이틀 후 베를린 방공호에서 자살했다. 무솔리니의 집권과 몰락 과정은 불안과 열패감이 휩싸인 인간들이 얼마나 빨리 폭력과 집단광기에 빠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2020년, 팬데믹과 경기침체에 빠진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를 옹호하는 여론이 20%를 넘었고, 그의 무덤은 이탈리아 극우파의 성지가 되었다.
파시즘의 비극은 언제든지 되풀이될 수 있다. 인간의 정신은 나약하고 흔들리기 쉽다.사진=필자 제공
필자 이정현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