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기술이 지배하는 미래 전장에서 무인기 관련 기술은 핵심 요소로 주목받는다. 무인항공기(UAV·Unmanned Aerial Vehicle)는 조종사가 탑승하지 않고, 지상에서 원격조종 하거나 사전에 입력된 프로그램 또는 비행체가 스스로 주위 환경을 인식하고 판단해 자율적으로 비행한다. 무인으로 운용돼 인명을 보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전 반경이 넓고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지형까지 면밀히 감시가 가능한 장점이 있다.
일찍이 우리나라는 KT-1 기본훈련기 개발로 세계에서 12번째로 항공기 개발국이 됐다. 이어 독자적인 기술로 탄생시킨 정찰용 무인항공기를 육군 군단급 부대에 운용하기 시작하는 등 항공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이 모든 개발비행시험 과정에는 32년간 국방 항공산업에 헌신한 국방과학연구소(ADD) 국방시험연구원 성덕용(예비역 공군대령) 수석연구원이 있다. 국방 항공산업 발전의 산증인인 성 수석연구원을 만나 유·무인기 개발비행시험 성공과 실패의 숨은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국내 최초의 비행시험기술사
“저기 무인기 보이시죠? 저 무인기가 초도 비행에 성공하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벅찼던 순간이었죠”
유·무인기 개발비행시험이 한창인 해미 항공시험장에서 만난 성 수석연구원은 무인기 격납고를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기자를 안내했다. 그는 국내 최초의 비행시험기술사(Flight Test Engineer)다. 공군사관학교 31기로 1983년 소위로 임관한 이래 ‘KT-1 기본훈련기’를 시작으로 유·무인기 개발비행시험 업무에 평생을 바쳤다.
“돌이켜 보면 이 길에 들어선 것은 운명이었어요. 초급 장교 시절, 반복되는 군 생활에 염증을 느껴 군복을 벗고 새로운 삶을 모색하던 어느 날, 비행시험기술사 모집 공고를 우연히 보게 됐어요. 공고를 보자마자 ‘아! 내 길을 찾았구나’란 생각이 들었죠.”
주저 없이 비행시험기술사에 응시한 그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최종 4명(조종사·엔지니어 각 2명)에 뽑혔다. 전투기 조종사에서 국방 무기 개발 요원으로 인생의 항로가 수정된 것이다.
최종 조립 후 비행시험 수행
“영국에 있는 시험비행학교(ITPS·International Test Pilot School)에서 1년 반 동안 유학하고 돌아와 KT-1 기본훈련기 개발비행시험요원으로 참여했죠. 당시 우리 손으로 만든 항공기에 탑승해 우리 하늘을 나는 것은 공군 조종사뿐 아니라 항공 분야 종사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던 꿈이었죠. 항공기 개발은 첨단기술의 집약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결국 KT-1 시제기를 시험하고 계측하기 위한 시험시설을 개발과 병행해 구축하며 이뤄냈지요.”
비행시험은 비행을 위한 시제 항공기(Prototype Aircraft)가 최종 조립을 마치면 지상통합시험을 통해 엔진·유압·착륙장치·비행조종·항전장비 계통 등이 정상 작동하는지 점검한 후 이상이 없으면 저속 활주 시험을 수행한다. 이후 초도비행준비회의를 통해 시험계획 및 위험요소에 관한 안전 절차 등을 거쳐 고속 활주 및 초도 비행을 수행한다. 예기치 않은 결함이 발생할 수 있어 비행까지는 약 2~3개월이 소요되는 정밀한 과정이다. 이처럼 대한민국 항공산업의 새역사를 쓴 그는 유인기에 이어 무인기 개발비행시험 주역으로도 활약한다.
황무지 개간 각오로 시험절차 만들어
“우리 독자기술로 KT-1 개발을 이뤄낸 자부심이 있었기에 무인기 비행시험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무인기 초기 개발 당시 비행시험에 관한 자료가 극히 제한적이었어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죠. 이스라엘 방위산업체로부터 기본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 문을 두드렸지만, 그곳은 우리와 운용체계가 다를 뿐 아니라 주요 기법에 대해서는 공개를 꺼리는 상황이었죠. 정말 막막했어요. 외국 무인기 비행시험 자료와 유인기 비행시험 경험을 바탕으로 절차를 만들어 개발자와 시험자 모두가 초도 비행을 준비했습니다”
어려움이 적지 않았지만, 무인기 성공을 위한 그의 열정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무인기 개발비행시험을 총괄한 그는 황무지를 개간하는 각오로 시험 절차를 만들었다. 그리고 공군 훈련이 없는 주말 새벽녘 활주로에서 무인기 비행시험을 했다. 주말에 예정된 가족 행사에 한 번도 제대로 참석하지 못하고, 그토록 업무에 매달렸던 이유는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내가 무인기 초도 비행에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나라 무인기는 10년, 20년 후퇴할 수 있다는 엄청난 압박감이 저를 짓눌렀어요. 어깨에 짐이 너무 무거웠던지 밥도 제대로 못 삼킬 정도였죠. 한번은 치통으로 치과에 갔는데 치아에 미세한 금이 가 있는 것이 발견됐어요. 치과의사 말로는 스트레스가 극심하면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내 몸까지도 무인기 성공을 간절히 바라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더 열심히 일에 몰두했어요.”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아찔했던 순간도 많았다. 비행 중 데이터 링크가 끊어져 비행체가 중국으로 향할 뻔했던 일, 기지에서 시험을 진행하다 지상 활주 중 활주로를 벗어났던 일, 자동 귀환 절차가 수립되기 전 비상시 수동으로 비행체를 착륙시키기 위해 모의실험실에서 반복해 연습했던 일, 자동 착륙이 안 돼 외부 조종사가 투입돼 수동으로 안전하게 착륙시켰던 일 등등 지금은 웃고 넘기지만, 그때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들이었단다. 그리고 이토록 눈물겨운 그의 열정과 땀은 결국 이 땅의 우리 기술로 무인기를 전력화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했다.
“‘과연 커다란 무인비행체가 부양할까’ 하는 초조감과 기대감을 가득 안고 숨죽인 채 모니터를 지켜봤던 긴장된 그 순간이 지금까지도 생생합니다. 성공적으로 이륙해 하늘로 오를 때 느꼈던 벅찬 감동은 그동안의 고생을 모두 털어내고도 남기에 충분했죠.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단언합니다.”
이제 그는 국방 항공산업을 새로 쓴 선구자로서 소임을 마치고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1990년 공군대위로 국방과학연구소 비행시험요원으로 파견근무를 시작한 이래, 내년 1월이면 정년퇴직해 32년간의 개발비행시험에 마침표를 찍는다.
“미래 전장은 스텔스 기술을 활용한 무인전투기 개발이 세계적 추세입니다. 우리도 빨리 이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고 감히 고언해 봅니다. 저는 태어나서 조금이나마 국가에 기여한 저 자신이 자랑스럽고 보람된 인생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떠나지만, 앞으로도 국방과학연구소 국방시험연구원이 자주국방의 초석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글·사진=노성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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