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하고 약점도 거대하다

입력 2021. 07. 29   14:56
업데이트 2021. 07. 29   14:57
0 댓글
29 비행선

수십 톤 폭탄 싣고 막강 공격력 발휘
비행기 기술 발전으로 공중전 한계
크고 느리고 약한 먹잇감으로 전락
 
‘배틀필드’ 존재감 부각+판타지 가미
1차 대전 주요한 배경 장치로도 사용
‘커맨드…’ 느리지만 강력한 특징 표현

 

‘배틀필드 1’ 오프닝 트레일러의 마지막 장면. 거대한 그라프 제펠린의 등장이 만들어내는 스펙터클은 수많은 게이머로 하여금 입이 벌어지도록 만들었다.  사진 출처=DICE스튜디오 공식 누리집
‘배틀필드 1’ 오프닝 트레일러의 마지막 장면. 거대한 그라프 제펠린의 등장이 만들어내는 스펙터클은 수많은 게이머로 하여금 입이 벌어지도록 만들었다. 사진 출처=DICE스튜디오 공식 누리집

전쟁만큼 인류의 기술을 급격하게 발전시키고 실용화하는 무대도 없을 것이다. 대규모 전쟁이 발발하는 시기에 인류는 온갖 첨단기술을 현실화하며 전장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로부터 시작된 기술이 전장과 전쟁 이후의 세계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있지만, 아주 잠깐의 충격과 공포 이후에는 사장되어버리는 기술도 있다. 전자의 중요한 사례가 컴퓨터라면, 후자의 대표적 사례로는 비행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막대한 폭장량, 느린 속도로 전장에서 퇴역

1차 세계대전기는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중요한 기점으로도 꼽힌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속도로 총알을 쏟아붓는 기관총이 등장하며 재래식 보병 전술을 무력화했고, 독가스가 군사용으로 등장해 무차별 대량 살상의 가능성과 화생방 개념의 도입을 촉진했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비행 기술의 발전을 통해 하늘이 전장의 무대로 활용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작은 열기구를 띄워 간단한 정찰 정도의 임무를 수행하던 시기를 넘어 본격적으로 하늘을 공격 루트로 삼기 시작한 1차 세계대전기의 하늘에 비행기와 함께 떠오른 것은 비행선이라는 기계였다. 동력기관으로 프로펠러를 돌려 추진력을 얻고, 그 추진력으로 날개에 양력을 걸어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아직 충분한 추진력과 속도를 갖추지 못했던 시기에 비행선은 훨씬 더 손쉽게 하늘 위로 날아오를 수 있었다.

거대한 기낭(기체를 담는 비행선 상부의 풍선 같은 공간)안에 헬륨, 수소 같은 가벼운 기체를 채워 그 부력으로 떠오르는 비행선은 별도의 동력 없이도 공중으로 떠오를 수 있었고, 그 덕에 비행기로는 상상하기 힘들 만큼의 탑재량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한 대의 비행선이 수십 톤의 폭탄을 싣고 떠올라 적의 대공사격이 닿지도 않을 고도에서 그저 싣고 온 폭탄을 뿌려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공격력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 1차 대전기에 독일이 비행선으로 수행한 영국 폭격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독일 해군 소속의 비행선들은 영국까지 무리 없이 넘어가 수도 런던에 대규모의 폭탄을 투하했고, 600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만들어내며 제해권을 쥔 채로 안전을 오랫동안 보장받아 왔던 영국에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무거운 폭탄을 달고 장거리를 이동해 폭격 후 돌아오는 비행선의 성과는 이른바 전략폭격이라고 부르는 전선 안쪽의 적 후방을 공중에서 타격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비행기 기술의 발전은 한계를 맞은 비행선의 성능을 뛰어넘기 시작했다. 엔진 개량으로 점점 빨라지고 무장량 탑재도 늘어나기 시작한 비행기와 달리, 비행선은 특유의 느린 속도와 함께 비행을 위해 가스를 담는 기낭이 지나치게 크고 약해 표적이 되기 쉽다는 점에서 매우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단순히 하늘에서 지상으로 폭탄을 쏟아붓는 개념이 아니라 공중에서의 지배권을 잡는 공중전 자체에 무게가 실리자, 느리고 약하고 거대한 표적인 비행선은 1차 대전기를 버티지 못하고 전쟁사에서의 퇴역을 맞아야 했다.

제트 엔진과 스텔스 같은 첨단 기술이 더해진 오늘날의 공군 무기 체계 속에서 비행선은 이제 비행기와는 아득한 수준의 격차를 가지며 멀어졌지만, 특유의 에너지 효율과 수송량 자체는 환경문제가 중요하게 떠오른 오늘날 역으로 다시 관심받는 기술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속도가 생명인 현대 공중전장에서 비행선의 의미가 전선의 최전방에 자리 잡히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로 비행선이 나타나 무지막지한 양의 폭탄을 쏟아붓던 순간이 주었던 스펙터클이 강렬했던 관계로 많은 게임이 전장 속 비행선을 담아내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배틀필드, 워크래프트, 레드얼럿 2의 비행선


실제 1차 대전기를 배경으로 삼은 게임 ‘배틀필드 1’의 트레일러(게임 발표 직전의 예고 영상) 마지막을 장식하는 주인공이 바로 비행선이다. 1차 대전기에 활약했던 독일의 대형 비행선인 ‘그라프 체펠린’이 등장하는 이 장면은 거대한 비행선이 주는 위압감으로 플레이어들을 사로잡으면서 동시에 1차 대전기에 비행선이라는 기계가 전장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이 게임이 1차 대전을 조명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장치로도 사용되었다.

본 게임 안에서도 비행선은 주요한 전장 오브젝트로 등장한다. 거대한 비행선의 동체가 공중전의 중심에 자리하고, 수많은 전투기가 비행선 요격과 방어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하늘을 맛볼 수 있다. 플레이어가 아예 전투기에서 뛰어내려 비행선 위에 올라타기도 하는 등의 판타지적 요소 또한 비행선의 위압감을 잘 드러내는 부분들이다.

현실의 전장을 벗어나면 비행선 특유의 느낌을 살리는 판타지 세계의 표현들도 쉽게 접해볼 수 있다. 주로 ‘스팀펑크’라고 불리는, 현대 이전 근대 세계를 기반으로 한 게임들에서 비행기를 대체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비행선들의 운용을 대중적으로 잘 보여준 쪽은 ‘워크래프트’ 시리즈다.

전략시뮬레이션인 ‘워크래프트 3’에서는 고블린 비행선이 등장해 유닛을 실어나르는 공중수송선의 기능을 수행한다.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인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는 세계관 속 주요 대도시를 오가는 대중교통으로도 고블린 비행선이 활용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비행선의 전투 용도 활용이 무엇보다 비중 있게 드러나는데, 아예 공중전함의 개념으로 호드와 얼라이언스 양 진영이 모두 비행선에 탑승해 공중전을 벌이는 장면이 영상뿐 아니라 실제 게임 속 특정 전투들에 활용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리치 왕의 분노’ 확장팩의 최종 보스인 얼음왕관 성채 공략전 중반부에는 호드와 얼라이언스가 서로 비행선으로 포격과 근접전을 벌이는 모습이 보스 라운드의 일부로 편성될 정도로 ‘워크래프트’ 시리즈에서 비행선은 매우 비중 있는 전투 기계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클래시 오브 클랜’, ‘에이스 인 더 스카이’ 등 군용 비행선이 등장하는 게임은 현실에서 퇴역한 모습과는 달리 매우 많은 숫자를 자랑하지만, 그중에서도 최초로 비행선이 등장했을 때의 위압감을 고스란히 전달해 주는 게임으로는 아무래도 고전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인 ‘커맨드 앤 퀀커: 레드 얼럿 2’의 소련군 비행선 ‘키로프’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전체적으로 개그 콘셉트가 강한 게임이라 미국, 소련 양 진영 모두 희화화된 군사 유닛들이 가득하지만, 그 속에서도 키로프 비행선은 의외로 비행선 특유의 성질들을 녹여낸 유닛이었다. 엄청나게 비싼 제작비와 오랜 제작 시간도 그렇지만, 무지막지하게 느린 이동속도는 실제로 운용되었던 군사용 비행선의 특징을 다소 과장되게 녹여낸 사례에 속한다. 그러면서도 일단 떠오른 비행선이 목적지에 도착하면 얼마나 공포스러운 무기가 되는지를 키로프는 잘 보여주었다. 도착하기만 하면 실전 비행선을 떠올리게 만드는 무지막지한 지상 폭격을 보여주며 적진을 초토화시키는 바람에 실제 1차 대전기 영국이 런던 상공에 도착한 비행선을 보면서 느꼈을 감정을 고스란히 살려내는 효과를 보여주었다.


필자 이경혁은 게임칼럼니스트이자 평론가다.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게임 연구를 하고 있고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 등을 집필했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

오늘의 뉴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