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가해의 명분 악용된 홀로코스트 상처

입력 2021. 07. 21   16:37
업데이트 2021. 07. 21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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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저항과 폭력의 변증법-바르샤바 게토 봉기와 역사적 아이러니
 
독일군에 강제 이주 당한 폴란드 유대인
나치 ‘절멸 정책’ 맞서 청년 무장 봉기
실패했지만 훗날 이스라엘 국방군 잉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탄압 묘한 데자뷔
“상처 받았으니 상처 준다” 비극 악순환

 
1939년 9월,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은 수도 바르샤바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분류하여 별도의 거주 공간을 만들었다. 독일군은 1940년 10월 12일, 35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을 3.3㎢ 규모로 조성된 좁은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 지역은 ‘바르샤바 게토’로 명명되었다. 유대인들은 가슴에 표식을 달고, 정해진 지역을 벗어나는 것이 금지되었다. 좁은 면적에 35만이 넘는 인원이 갇혀버리자 위생 문제와 식량 문제가 심각해졌다. 게토 지역을 탈출하는 유대인들은 즉각 사살되었고 체포된 자들은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독일군에 체포되는 유대인 청년의 모습. 필자 제공
독일군에 체포되는 유대인 청년의 모습. 필자 제공

바르샤바 게토의 행정을 담당한 ‘유대인 평의회(Judenrat)’는 허울뿐인 자치기구에 불과했다. 유대인 평의회 의장 랍비 아담 체르니코프(1880~1942)는 독일군에 협조하면서 게토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의 생존을 도모했다. 그렇지만 독일군은 유대인 평의회에 무리한 요구를 거듭했다. 여자와 아이들을 풀어주겠다는 명목으로 평의회에 그들의 몸값을 요구했고, 소량의 식량과 의약품을 제공하면서 거액을 챙겼다. 독일군은 유대인 경찰에게 게토의 치안을 맡겨 동족들끼리 서로 감시하고 불신하도록 만들었다. 게토 지역과 외부를 분리하는 장벽을 건설하는 막대한 비용도 유대인들에게 전가했다. 장벽을 쌓는 강제 노역에 동원된 유대인들에게 제공되는 식량은 일반 시민들의 10%에 불과했다. 이런 처우에 분노하면서 크고 작은 저항조직을 결성한 유대인 청년들은 체르니코프에게 무기를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체르니코프는 독일군을 공격하는 것은 자살행위일 뿐만 아니라 게토의 모든 유대인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한다. 그는 다소 고통을 겪더라도 무고한 희생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친위대 지휘관 위르겐 슈트루프의 게토 보고서.홀로코스트를 증명하는 기록이다.  필자 제공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친위대 지휘관 위르겐 슈트루프의 게토 보고서.홀로코스트를 증명하는 기록이다. 필자 제공

1942년이 되자 상황이 급변했다. 독일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는 ‘절멸 정책’을 실행에 옮기라고 명령했다. 매주 분류된 수천 명의 여자·아이·노인들은 트레블링카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곧바로 가스실로 보내졌다. 친위대는 독가스를 주입한 후 나이·성별에 따라 사망에 이르는 평균 시간을 측정했다. 게토의 유대인들은 단지 학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도구로 취급되었다. 평의회 의장 체르니코프는 가스실로 끌려가는 동포들을 보면서 자책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게토에는 노동이 가능한 청년층만 남게 되었다. 모데카이 아니레비츠(1919~1943)라는 청년을 중심으로 결성된 유대인 무장투쟁 조직(ZOB·Zydowska Organizacja Bojowa)은 나치에 맞서 싸울 것을 천명했다.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무기를 게토에 반입했고, 지하실과 하수도를 잇는 비밀 통로를 만들었다.

게토 봉기를 주도한 마릭 에델만. 
 필자 제공
게토 봉기를 주도한 마릭 에델만. 필자 제공

1943년 4월 19일, 마침내 봉기가 시작되었다. 화염병과 소총으로 무장한 유대인들은 게토 내의 독일군을 공격했다. 기습에 놀란 독일군은 게토 외부로 퇴각했고, 유대인들은 건물 지붕에 올라 환호했다. 바르샤바 시민들은 그 모습을 보고 동요했다. 그러자 다음 날 위르겐 슈트루프 장군이 지휘하는 독일군 친위대는 전차와 야포까지 동원하여 반격에 나섰다. 독일군은 화염방사기로 건물을 불태우고 지하실에 독가스를 살포했다. 하수구에도 대량의 물을 주입하여 유대인들의 탈출을 막았다. 1개월에 걸친 격전 끝에 봉기는 진압되었다. 모데카이 아니레비츠를 비롯한 1만3000명의 유대인 청년들이 사망했다. 독일군의 피해도 컸다. 슈트루프는 게토 봉기에 대한 보복으로 유대인 3만6000명을 절멸수용소로 보내 살해했다. 그러나 탈출에 성공한 극소수의 생존자들은 폴란드 레지스탕스에 합류하여 저항을 계속했다. 그들의 장렬한 희생은 바르샤바 시민들이 떨치고 일어난 ‘1944년 바르샤바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게토 봉기의 생존자이자 저항조직의 핵심이었던 마릭 에델만(1919~2009)은 책을 저술하여 모데카이 아니레비츠를 비롯한 유대인 청년들의 활동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의 저서는 존 애브넛 감독의 게토 봉기를 다룬 영화 ‘업 라이징’(2001)의 토대가 되었다. 의학도였던 마릭 에델만은 폴란드에 남아 심장 전문의가 되었고, 1989년 폴란드 공산체제 붕괴를 이끈 자유노조 연대(Solidarity) 활동에도 참여했다. 2009년, 에델만이 90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이스라엘 외무부는 성명을 통해 “유대 민족과 이스라엘 국가는 바르샤바 게토 봉기에서 생존했던 마지막 지도자의 죽음을 슬퍼한다”며 “게토 봉기는 홀로코스트 시대에 인간의 존엄성을 알린 투쟁이었다”고 논평했다. 프랑스 정부는 에델만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폴란드 정부는 ‘흰 독수리 훈장’을 추서했다. 바르샤바 게토에서 결성되었던 유대인 무장투쟁조직(ZOB)는 훗날 이스라엘 국방군의 모태가 되었다.

유대계 미국 정치학자 노르만 핀켈슈타인의 저서 『홀로코스트 산업』(한겨레출판, 2004).
유대계 미국 정치학자 노르만 핀켈슈타인의 저서 『홀로코스트 산업』(한겨레출판, 2004).

그러나 이스라엘은 현재 팔레스타인을 탄압하면서 국제적인 비판을 받고 있다. 유대계 미국 정치학자 노르만 핀켈슈타인(1953~)은 『홀로코스트 산업』(2001)이라는 저서에서 홀로코스트의 비극이 악용되는 모습을 비판했다. 핀켈슈타인의 부모는 바르샤바 게토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였다. 그는 부모 세대가 겪었던 전무후무한 비극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에 분노하면서 『홀로코스트 산업』을 저술했다. 미국에 이주한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에 줄곧 침묵하다가 1967년 아랍-이스라엘 전쟁(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자 갑자기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신화로 만들었다. “언제든 다시 홀로코스트를 당할지도 모를 고립무원의 피해자 집단”의 이미지로 이스라엘을 미화시키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아랍인들에게 행사한 폭력은 희석되었다.

폭력의 피해자는 쉽게 가해자로 변모한다. 가해자들은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쉽게 면죄부로 삼는다.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을 탄압하는 이스라엘 국방군의 모습은 과거 유대인들을 핍박했던 독일군 친위대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 데칼코마니적인 풍경의 저변에는 “나는 상처받았으므로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합리화가 존재한다. 전쟁의 폭력이 낳은 기이하고 슬픈 아이러니다.

<이정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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